본문 바로가기

2차 창작/기타

[잔불의 기사]겨울에는 발자국이 남았지 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까

※지우스X나견

※본편 시점에서 약 3~4년 후 시점입니다. 

※죽음을 향한 욕망의 묘사가 나옵니다.


 

나견은 시종 불만스런 얼굴이었다.

 

"분명히 따로 제출하자고 했잖아요."

"그랬지."

 

지우스는 그걸 딱히 달래주지도 않으며 미리 사왔던 붕어빵을 나견에게 내밀었다. 부루퉁한 시선의 주인이 잘 익은 빵을 바라보다가 손만 뻗어 쏙 집어갔다. 받아가기는 하지만 감사 인사는 하지 않는다… 꽤 화났군. 상대의 행동을 담담하게 판정한 지우스는 자신의 행동이 조금 많이 (여기서 더 객관성을 더하자면 심하게) 노골적이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기사 둘의 휴가 날짜가 겹친다는거야 별난 우연으로 생각될 수 있어도, 한 명의 기사가 다른 기사의 휴가까지 같이 신청한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인과를 추적해보기 마련이다.

 

그걸 염려해서 하다못해 휴가신청서를 따로 제출하자고 한 건 나견이다. 지우스도 분명 수긍했다. 헌데 나견이 잠시 임무를 나갔다 와 보니 지우스가 자기 몫까지 휴가를 신청한 상태였고 기사단 내부에는 낯간지러울 정도로 따뜻한 시선이 쫙 퍼져있었다. 나견이 그 자리에서 지우스를 찾아가서 멱살을 잡고 따지고 들지 않은 이유는 세 가지였는데 하나는 휴가 일정을 생각하면 일단 돌아가서 짐부터 싸야 했기 때문이었고 둘은 나견에게 그만한 근력이 없어서였고 세 번째는.

 

"같이 가고싶다고 하셨으니까 참는 거에요."

"알고 있어."

 

따뜻하던 붕어빵 봉지가 텅 비었을 무렵에는 나견의 미간 주름도 느슨해져 있었다. 맘이 풀린 것 같다고 해서 저 사이를 문질러보려고 하면 엄청 화내겠지. 지우스는 생각할 것도 없는 사실을 구태여 상상하며 마차의 창 밖을 바라보았다. 적당히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목제 마차는 달각달각 경쾌한 소리를 내며 굴러가고 있었고 내부에는 한파를 방지하기 위한 폭신한 깔개와 뜨거운 물을 채운 탕파가 놓여있었다. (물론 이 모든 난방 도구들은 기꺼이 나견에게 양보되었다) 가는 도중에 도적이나 사고를 만나지만 않는다면 오늘 저녁 무렵에는 목적지에 도착하리라.

 

"잠깐 자고 있어라. 도착하면 깨워줄테니까."

 

나견은 잠시 지우스를 빤히 응시했다. 그 말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그런 말을 하면서 자연스레 제 한쪽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모습을 보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뭐. 안 잘거야? 지우스가 지지 않고 마주보고있으면 담요와 탕파를 양도받을 때와 똑같은 표정을 지은 나견이 얌전히 상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여기선 괜한 말을 해봤자 소용없으리라 판단한 모양이다.

 

"잘 자라, 나견."

"네."

 

잠을 자지 못하면 실없는 대화라도 나눌까 싶었는데 나견은 꽤나 금방 잠들었다. 그만큼 피곤했다는 것이겠지. 지우스는 고른 숨소리를 내는 나견을 한쪽 어깨에 실은 채 말없이 창 밖을 바라보았다. 마차는 한파에 대한 대책을 빠짐없이 갖추었긴 했지만 문가에 앉은 손끝은 역시나 조금 싸늘했다.

 

*

 

"춥군."

"춥네요."

 

두 사람은 똑같은 말을 하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짐을 풀고 침대에서 잠을 청한 뒤, 아직 사위가 밝아오지도 않은 새벽에 몸을 일으켜 호숫가로 나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은 잘 갈아놓은 칼날처럼 사람의 품을 파고들었고 나견은 목도리 사이에 얼굴을 묻으며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눈썰미 좋은 지우스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갈까?"

"바보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애초에 이걸 보려고 온 거잖아요. 나견이 말하면 지우스는 그건 그렇지, 하고는 호숫가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물이 하도 맑고 투명하여 거울 눈동자 호수라 불린다는 이곳은 아직 해가 뜨지 않아 고요했지만 지우스나 나견처럼 무언가를 기대하듯이 한쪽 물가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서로에게 속삭이거나, 웃거나, 추위를 견디려 뱉는 한숨이 옅은 어수선함이 되어 호숫가의 물결처럼 찰랑인다. 지우스는 아주 잠깐이나마, 그런 소리들이 나견에게 제대로 들리고 있을지를 생각했다.

 

"다들 부지런하군."

"해돋이를 보려면 부지런해야죠."

 

나견의 뺨이 상기되어있고 눈빛이 반짝이는 것은 분명 착각이 아니다. 지우스는 그 사실에서 자신의 감정을 떼어내기 위해 그 목에 단단히 감아둔 목도리나 머리에 씌운 털모자, 단추를 꼭꼭 채운 코트 등을 바라보았다. 나견이 '저를 이대로 솜옷에 파묻어버릴 셈이신가요?'라고 물을 정도로 집요하게 입힌 장본인은 물론 지우스다. 정작 자신은 목티에 코트 정도만 입고 끝내버리는 바람에 제법 원성을 들었지만. ("지우스님은 그거인가요? 「얼어죽어도 패션파」?" "그런 건 어디서 들은 거냐?")

 

얼마쯤 기다렸을까, 호수 저 끄트머리에서 하얀 빛이 조금씩 새어들어오기 시작했다. 겨울의 추운 바람과 눈발을 휘감은 저 먼 산맥 너머에서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동이 터오고 있었다. 지우스는 그걸 바라보다가 최대한 느린 속도로 나견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둘 다 장갑을 끼고있어 감각은 둔하지만 상대방도 그 손길을 피하지 않고 맞잡아오는 느낌이 있었다. 지금 나견의 얼굴을 보면 어떤 색을 띄고 있을까. 그 얼굴에서 어떤 감정을 찾아낼 수 있을까.

 

지우스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정면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조금 시큰했다.

 

*

 

"할 수 있겠어?"

 

지우스가 낸 휴가신청서(물론 두 사람 몫이다) 이야기를 듣고 가장 먼저 찾아온 건 루디카였다. 안부인사고 뭐고 다 생략하고 다짜고짜 본론부터 나오는 건 그도 일련의 상황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우스는 잠시 입을 벌렸다가, 입술을 다물고, 손끝을 문지르다가, 겨우 말문을 열었다.

 

"할 수 밖에 없지."

"전에도 그 말을 들었는데."

 

루디카는 물러서지 않는다. 당연하다. 이 대화가 약 일 년 전에도, 반 년 전에도 똑같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는 조금 다른 답이 나와도 좋을텐데 실로 놀랍게도 지우스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낯설지 않은 질감의 침묵 앞에서 루디카는 험악하게 미간을 좁히겠으나 그 이상의 말은 꺼내지 않고 돌아간다…. 이제까지는 일이 대개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대는 순순히 물러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지우스, 너는 네 명예를 중히 여기지 않지."

"그래."

"우리는 네 신념을 존중해. 진심으로…. 하지만 이번만큼은 신중해줘."

 

지우스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정신을 환기시키기 위해 하는 행동에 가까웠다. 그걸 마주하고 있는 루디카의 뺨에서 굵고 투명한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져 바닥에 약간의 얼룩이 남았다. 하지만 루디카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고 목소리에는 슬픔의 기색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그건 아니군. 슬픔의 기색이 없는게 아니야.

 

슬픔을 억지로 짓눌러놓고 있는 거다.

 

"이대로 잃을 수는 없어."

 

그 말이 가리키는 주어가 누구인지는 지우스도 잘 알고 있다. 그 사람에 대해 어떤 말을 하든 명확한 결과를 내놓지 못하는 한 무의미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은 결국 하나의 명제를 부정하기 위해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한 사람의 복수가 끝나고, 기사라는 이름이 좀 더 먼지에 어울리는 것이 되고, 많은 것이 드러나거나 혹은 잊혀지고, 아직은 잠잠한 전쟁의 불씨가 어딘가에서 깜부기불처럼 깜박이는 이 세계에서.

 

"알고 있어."

 

하늘이 맑다.

 

"알고 있어…."

 

인간이 자신의 무력함을 가장 깊이 체감할 수 있는 색채였다.

 

*

 

"어땠나요?"

 

아침 해돋이를 보고 들어온 식당은 붐볐다. 그야 다들 끼니를 든든히 챙기기보다 일찍 일어나서 해돋이를 보러왔을테니 당연하겠지. 그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던 지우스와 나견은 따뜻한 국물요리와 야채 구이로 아침식사를 한 뒤 숙소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식후의 산책으로는 적당한 길이었다. 지우스는 나견의 곁에서 적당히 속도를 맞춰 걷다가 대답했다.

 

"꽤 인상적이던데. 그리고 추웠어."

"너무 삭막한 감상인데요."

"나무도 앙상했고…. 봄에 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더군."

"지금은 겨울이니까요."

"내년 봄에는 어떤 느낌일까."

"직접 와보시면 되죠."

"너는?"

 

나견은 금방 대답하지 않는다. 지우스는 제 목을 후려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저는 충분히 봤어요."

 

사람에게 있어 '충분하다'는 건 대체 어떤 의미일까. 어떤 이는 자신의 욕망이 전부 충족되었을 때 그 말을 쓸 것이고 어떤 이는 충분할 정도의 욕망을 채운 뒤에도 끝끝내 그 말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다른 이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욕망만을 채운 뒤에 고요히 말하곤 한다. '이제 됐어', '이제 충분해'. 마치 십 년의 갈증 끝에 도달한 시원한 물가에서 입술만을 축이고 돌아서는 고승처럼, 혹은 마지막 떠날 길을 앞두고 어린 존재에게 자신의 것을 양보하는 나이 많은 동물처럼.

 

지우스는 그게 싫었다.

 

"네가 여행을 다닌 건 겨우 1년 남짓 아니었나?"

"그게 '겨우'일지 '무려'일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죠. 지우스님은 어땠나요?"

 

이 여행이 즐거웠나요?

 

이어진 말이 너무 잔인해서 지우스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제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속절없이 무너져내리는데 그게 대체 어디인지 종잡을 수도 없었다. 그것도 모르고 태연하게 길을 걸어가던 나견이 숙소로 가기 위한 갈림길에서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우스는 그걸 보았다. 흔들리는 금빛 머리카락과 흩어지는 입김, 자신이 입혀둔 옷과 겨울 바람 사이에 파묻혀있는 존재를 보았다. 분명 눈 앞에 있는데도 붙잡을 수 없는 것이 거기에 있었다. 이 일 년 동안 오로지 그 흔적을 쫓아 숨이 차도록 달려왔는데 따라잡지도 못하고 떠나보내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아직.

그래도 아직은.

 

"지우스님. 돌아가는 길 기억나세요?"

 

나견이 눈 앞에 살아있는데도.

 

*

 

나견이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입을 뗀 것은 나견과 나진 사이에 얽힌 진실이 밝혀지고 일련의 사건들이 겨우 잠잠해졌을 무렵의 일이었다. 거짓말쟁이의 거대한 사기극(본인이 그렇게 지칭했다)에 휘말린 루지안과 라우준, 티르가 입회한 자리였고 거기에는 지우스도 있었다. 과거에 대한 오해가 풀리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모든 앙금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던 네 사람 사이에는 (특히 루지안과 나견 사이에서) 명목상으로라도 객관성을 유지해줄 제삼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가장 큰 피해자이자 기만의 대상이었던 루지안은 나견의 말에 어이없어 했고 화를 내기도 했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으나 최종적으로 이를 승인했다. 루지안이 의견을 정하니 라우준과 티르 또한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고, 이에 감사를 표한 나견은 그 다음날 아무런 언질 없이 곧바로 여행을 떠나 루지안을 분노케 했다. 다만 그 분노에 걱정이 섞여있다는 것은 지우스도 어렵잖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자식 어디서 죽어오지는 않겠죠?"

"그러지는 않을거다."

"지우스님은 어떻게 확신하세요?"

"확신하는건 아냐."

 

그냥 믿는 거지.

 

지우스의 말을 증명하듯이 나견은 약 1년 여의 여행을 마친 뒤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여행을 떠나기 전보다 머리가 좀 길어지긴 했는데 그걸 빼면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넌 어째 근육도 안 붙은 거 같다? 내가 빡세게 운동시켜줄까? 그새 후배들이 생겼다고 조금 둥글어진 루지안이나 티르가 놀리는 목소리에도 잔잔하게 웃을 뿐이었다. 나견은 며칠 뒤 지우스에게 면담을 신청했고 어차피 향후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던 지우스는 그 면담을 받아들였다. 정해진 시간대로 지우스를 찾아온 나견은 제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홀짝이고는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죽어도 될 것 같습니다."

 

나견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고 불안해하거나 우울해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동물들 중에서는 나이를 먹어 죽을 때를 알면 스스로 무덤을 찾아 떠나는 부류가 있다는데 그런 것들이 인간의 형상을 하면 이런 눈빛을 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지우스는 언제나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할 줄 알았고 이 상황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도 금방 알아냈다. 세계의 모든 것을 돌아보기에는 네가 살아온 세월이 너무 짧지 않느냐는 반박 앞에서 나견은 싱겁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제 죽어도 될 것 같습니다."

"루지안을 속이고, 다른 이들을 속이고, 네 동생의 존재를 연기한 걸 죽음으로 속죄하고 싶은거냐?"

"아뇨. 그런 건 불가능할거고, 애초에 제 목숨으로 무언가를 갚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어째서냐.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왜냐하면."

 

사실 이 시점까지만 해도 지우스는 상황을 크게 비관하지 않았다. 나견의 안에 깃든 죄책감이나 후회, 미련, 부채의식을 잘 걷어내면 이런 부정적인 생각도 사그라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견에게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바도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주어진 상황을 시뮬레이션 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들이 직시하지 않으려 하는 가능성을 몇 개 주워낼 수 있는데, 지우스도 그런 인물 중 한 명이었으니까. 다만 그런 지우스조차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저는 존재의의를 다했으니까요."

 

나견은 죄책감이나 후회에 등을 떠밀려 죽음을 결정한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모든 역할을 끝냄과 동시에 모든 의미를 달성했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미래에서 어떤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다한들 욕망할 이유가 없고 욕망의 이유가 없으니 삶에 대한 욕망 또한 없어졌다고 했다. 날이 무뎌진 가위가 스스로 용광로 안에 뛰어들겠다 말하는 꼴이었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인간은 도구가 아니야. 설령 생각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어도 마찬가지지. 어느 누구도 살아있는 인간을 두고 이 자는 이제 쓸모가 다했으니 죽어도 된다고 말할 수 없어. 그건 죽은 사람의 몸을 저울에 달아 무게를 재어본 뒤 장작으로 팔자는 말과 동급이라고. 지우스는 꽤 오랜 시간을 들여 나견을 설득하려 했으나 그는 마지막까지 제 의지를 잃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죽으려고요."

 

루지안을 비롯한 다른 기사들에게는 알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알겠다고 한 뒤 나견을 멀리 멀리 보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발상에 한계를 느낀 지우스는 장본인의 허가를 얻고 (이것도 꽤 웃긴 일이지만) 믿을만한 동기에게 조언과 도움을 구했다. 그들은 기꺼이 나견의 의식을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이승으로 끌어오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모두 실패했다. 그나마 나견이 이제까지 살아있는 것도 지우스가 그에게 부여한 새로운 역할 때문이었다.

 

"그럼 네가 본 풍경을 나에게도 보여줘. 그걸 모두 볼 때까지 네 마음을 바꿀 수 없다면 나도 포기하지."

 

며칠 뒤 두 사람은 봄의 거울 눈동자 호수로 떠났다.

긴 순례길의 시작이었다.

 

*

 

"나견."

"네."

"마음은 여전한거냐."

"네."

"망설임도 없군."

"있기를 바라셨나요?"

"그래."

"……."

"……."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사람의 마음이 멀다는 생각."

"그런가요."

"나는 네가 살아주길 바란다."

"알고 있어요."

"네가 무언가를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인간으로서 당연히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어."

"알고 있습니다."

"나견."

"네."

"나는 너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

"그건 지우스님의 욕심이네요."

"잘 아는군."

"이제까지는 잘 참으셨으면서."

"대체로 실패했다고 생각한다만."

"그렇긴 하죠."

"……."

"지우스님."

"듣고 있다."

"저는 기뻤습니다. 지우스님이 저를 붙들어주려고 해서, 곁에 있어주려고 해서 기뻤습니다."

"과거형으로 말하지 마."

"…지금도 기쁩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붙들어줄 수 있다."

"정말로 기쁜 말이네요."

"솔직히 말해서 너에게 이런 고백을 해서 삶에 붙들어 놓는건 최악의 경우라고 상정했기에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아."

"사랑은 변하는 법이니까요?"

"나는 네가 스스로 살아가길 바라는 것이지, 누군가에 의해 살아지길 바라는 게 아니니까."

"그런 부분은 엄격하시네요."

"그리고."

"또 뭔가 있나요?"

"나는 네가 웃는 모습이 보고싶다."

"……."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도 아니고, 어떤 목적을 위해서도 아니고, 그냥 네가 즐거워서 짓는 웃음이 보고싶어."

"지금도 웃을 수 있는데요."

"나도 웃을 수 있다."

"거짓말이네요."

"너도."

"……."

"나견."

"네."

"내가 아니었더라면 너는 마음을 바꿨을까?"

"……너무하시네요.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어요."

"그럼 조금만 더."

"……."

"조금만 더, 힘을 내다오."

"지우스."

"네가 이제 모든 역할을 다한 존재라 해도, 모든 이에게 그 정의가 똑같이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야. 적어도 나는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 너도 함께 있기를 바란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이뤄주지 않고 사라지겠다는 건 너무하지 않나?"

"아무 목적도 없는 삶 한 가운데에 저를 던져넣으라는 건가요?"

"한 가지만은 네가 정할 수 있지 않나."

"당신의 곁에 있는 것을?"

"아니."

 

"설령 아무 의미가 없다해도, 너 스스로 이곳에 살아있기를 정할 수 있지."

 

*

 

봄이 왔다. 다시금, 혹은 새로운 햇살을 맞이한 거울 눈동자 호수의 나무들 위에 당연하다는 듯 새순이 돋아나고 부드러운 색채의 꽃들이 피어났다. 그 꽃잎이 바람에 휘말려 공중에 떠올랐다가, 맑은 수면 위에 천천히 내려앉는다. 물결조차 일지 않는 작은 무게가 호수를 아름답게 수놓는 가운데 몇몇 사람들이 주변 벤치에 앉아 느긋하게 햇살을 쬐었다. 그 옆으로 어깨를 나란히 한 두 사람이 지나간다. 그 중 한 사람이 볼멘소리를 냈다.

 

"제가 이번엔 분명히 따로 제출하자고 했잖아요."

"그랬던 것 같군."

"또 모르는 척 하지 마세요."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바람이 일어서 마른 꽃잎이 한바탕 허공을 맴돌았다.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하지만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자신들이 여기 있음을 증명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