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차 창작/기타

[프로메어]너를 달까지 흘려보내는 꿈을 꿔

-갈로 티모스+크레이 포사이트

-본편 스포일러 있습니다.


 

갈로 티모스가 감기에 걸렸다. 전날 방이 덥다고 창문을 열어놓은 채로 잠든 탓이었다. 이런 일이 없도록 일부러 난방을 따뜻하게 켜두었던 크레이 포사이트는 이 어이없는 결과 앞에 승복했다. 그가 받아들이지 않고 버틴다고 해서 갈로 티모스의 감기가 저절로 낫지는 않을 테니까. 물론 세간에는 감기란 병원에 가면 칠 일, 안 가면 일주일 앓는 병이라는 농담이 있지만 크레이는 차후 아동학대의 여지로 보일 수 있는 요소는 모조리 차단하고 싶었다.

 

레시피를 검색하여 준비하고 끓이기 시작한 야채죽은 정해진 온도에서 보글보글 끓었다. 병든 몸에 너무 자극이 심하지 않도록, 동시에 입맛이 없어서 도중에 숟가락을 내려놓는 일이 없도록 세심하게 죽을 요리하던 크레이는 시선을 느낀다. 이 집에 등록된 호적은 두 사람 뿐이기에 굳이 의식적인 뺄셈을 시도할 필요는 없었다. 크레이는 자신이 몸을 돌리는 각도 하나하나를 신경쓰며 부엌 문가에 기대서있는 갈로 티모스를 바라본다.

 

"갈로, 침대에서 쉬어야지."

 

크레이 포사이트의 말에 갈로가 뭔가 대답하려다가 콜록인다. 열이 제대로 가라앉지도 않은 몸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여기까지 오다니. 만약 현기증이 일어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그 경험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크레이는 죽을 끓이던 불을 줄이고 부엌 문가로 다가갔다. 다리를 굽혀서 아이와 키를 맞추는 번거로운 작업을 거친 끝에 갈로 티모스의 두 눈을 마주한다. 자신이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전부 불태워버린 일가의 생존자가 코를 훌쩍이곤 쉰 소리로 말한다.

 

살인자.

 

"나 다 나았어요."

"거짓말쟁이구나."

 

크레이는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싣는다. 갈로는 '진짜로 다 나았어요!' 같은 말을 하다가 요란하게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크레이 포사이트의 두뇌가 회전한다. 언제나 어떤 문제에서든 제 머리의 순발력과 판단력을 믿는 그는 조금 전에 들었던 날카로운 환청의 잔향을 금새 털어버렸다. 여기서는 갈로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줘서 조용히 만드는게 좋겠군. 뇌세포가 일정한 결론에 다다르고 그가 가진 경험과 지식이 거친 아이디어를 매끈하게 사포질한다. 갈로 티모스는 고집쟁이 아이처럼 볼을 부풀리다가, 자신을 안아 들어올리는 크레이의 동작에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들렸다.

 

"감기는 침대에서 푹 쉬어야 낫는 법이야."

"충분히 쉬었는데." (콜록)

"갈로, 너무 애쓸 것 없어."

 

난 어차피 너에게 그리 큰 애정이 없단다.

 

"넌 아직 어려. 그리고 지금은 환자고. 네가 얌전히 누워 죽을 먹는다 해서 비난할 사람은 없단다."

"그치만… 나리는 수업도 (콜록콜록) 있을텐데."

 

알긴 아는군.

 

"괜찮아. 대체 리포트를 제출하면 되니까."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또 그 소리인가. 크레이 포사이트는 작은 침대에 갈로 티모스를 눕히며 몰래 넌덜머리를 낸다. 그날, 그 사건 이후로 정신을 차린 갈로 티모스는 툭하면 저런 소리를 했다. 내가 은혜를 갚을게요. 나리의 힘이 될게요. 나리는 제 영웅이니까요! 그게 얼마나 무의미하고 헛된 소리인지 알지도 못하는 채로.

 

"그럼 일단 죽부터 먹고 푹 자야겠구나. 병이 나아야 뭐든 할 수 있으니까."

 

갈로 티모스는 그제야 말을 들었다. 아이가 따뜻한 죽을 한 그릇 전부 먹고 잠드는 것까지 확인한 크레이 포사이트는 아이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뒤로 한 채 방문을 닫았다. 빈 그릇을 깨끗하게 설거지해 말리고 방으로 돌아온 그는 익숙한 노트를 꺼냈다. 그가 생각을 정리할 때마다 쓰는 일종의 브레인스토밍용 노트였다. 이미 사용한 흔적이 있는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비어있는 공백 한복판에 '갈로 티모스'란 이름이 나왔다. 크레이 포사이트는 그 주변에 적힌 글자들을 천천히 훑는다. '성인', '의무교육', '졸업', '취직', '미래'.

 

아이는 아직 작다. 하지만 시간은 언제나 흐르므로 아이의 무릎이 굵어지고 어깨가 높아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타고나길 몸을 움직이길 좋아한다. 만약 그가 원한다면 스포츠 분야로 진로를 밀어주는 것도 좋겠지. 하여간에 지금은 저렇게 자신에게 딱 달라붙으려고 하지만, 좋아하는 분야나 취미를 알게 된다면 관심도 저절로 그쪽으로 옮겨갈테고. 어쩌면 애인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건 그것대로 좋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보호자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사람의 천성이니까. 그리고 크레이 포사이트는 갈로가 설령 불량배와 사랑에 빠진다 한들 반대할 마음은 없었다. (만약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위협하는 경우라면 이야기는 좀 다르겠지만.)

 

크레이 포사이트는 자신의 뇌세포를 믿는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판단력을 믿는다. 따라서 갈로 티모스의 미래는 어떠한 경우의 수 앞에서 정교하게 맞물려나간다. 그래, 만약 성인이 되자마자 결혼을 원한다면 집 정도는 알아봐줄 수 있겠군. 크레이 포사이트는 자신도 아직 결혼하지 않은 몸인 주제에 그런 생각을 하며, 갈로 티모스가 자신에게 작별을 고하는 상상을 한다. 입가가 미소를 그린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흔히 느끼는 그런 감정 때문은 아니었다.

 

다음 날 갈로 티모시는 깨끗하게 나아 크레이 포사이트를 깨우러 왔다.

크레이는 갈로의 머리를 쓰다듬고, 함께 아침을 먹으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