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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기타

[봉신연의/천상+나타]연꽃 관찰 일지


XXXX년 X월 X일 날씨 맑음.


오늘은 엄마가 연꽃 씨앗을 받아오셨습니다. 친구가 선물이라며 주었다고 합니다. 연꽃 씨앗은 껍질이 단단해서 사람이 깨지 않으면 싹이 나오지 않는대요. 그래서 어떤 경우엔 백년이나 오백년, 천년 된 씨앗이 꽃을 피우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엄마가 받아온 연꽃도 그렇게 오래된 것일지 몰라요. 나는 엄마를 도와서 씨앗 아랫쪽을 살짝 부순 다음 물그릇에 씨앗을 넣었습니다. 물그릇 아래에 동글동글 모여있는 씨앗이 언제 꽃을 피울지 궁금합니다.



XXXX년 X월 X일 날씨 비.


씨앗에 싹이 나더니 긴 줄기가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였는데 쑥쑥 자라더니 이제는 내 손바닥 길이를 훌쩍 넘어버렸어요. 이제 연꽃 씨앗은 물그릇이 아니라 둥글넙적하게 생긴 수반이라는 그릇으로 옮겨졌습니다. 주말에는 수반 그릇에 흙을 채워넣고 물을 담는 걸 도왔어요. 그동안 형은 옆에서 구경만 했습니다. 흙을 만진 손으로 장난을 쳤더니 순식간에 반격당해 버렸습니다. 한참을 놀다보니 둘 다 더러워져서 아빠에게 혼났어요. 깨끗이 손을 씻고 간식을 먹었습니다. 맛있었습니다.



XXXX년 X월 X일 날씨 흐림.


줄기에 잎이 많이 생겼습니다. 엄마가 말하는데 연잎에는 물방울이 늘 동그랗게 맺힌대요. 물방울을 떨궈보니 정말로 예쁜 모양이 되어서 놀랐습니다. 엄청 신기해서 계속 물을 톡톡 떨궜더니 나중에는 엄청 큰 물방을이 맺혔어요. 물 속으로 꾹 넣어보니 그것도 신기했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식물을 너무 괴롭히면 안된다고 하셔서 앞으로는 안하기로 했습니다. 대신 한 두 방울은 괜찮다고 해서 조금만 할거에요. 빨리 연꽃이 핀 걸 보고싶습니다.



XXXX년 X월 X일 날씨 맑음.

 

연꽃은 햇빛을 아주 많이 받아야 꽃이 피어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름은 되어야 꽃이 피어난다고 엄마가 가르쳐주셨어요. 아직 여름은 멀었지만 그동안 물을 열심히 주고 정성을 들여서 가꿔주면 예쁘게 피어날 겁니다. 방학이 되면 연꽃이 얼마나 자랐는지 관찰 일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엄마아빠도 좋은 생각이라고 해주셨어요. 형은 작심삼일이 되는거 아니냐고 놀렸습니다. 못됐어요.



XXXX년 X월 X일 날씨 더움.


여름방학이 되니 연꽃이 몰라볼 정도로 쑥쑥 자라더니 봉우리가 맺혔습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꽃이 피어날 것 같아요. 하루에도 몇 번씩 수반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엄마가 그렇게 쳐다보면 꽃이 부끄러워서 피지 못한다고 말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몰래 숨어서 지켜보기로 했어요. 여름 햇살을 받은 연꽃 봉우리는 무척 조용해보였습니다. 



XXXX년 X월 X일 날씨 어엄청 더움! 


오늘 드디어 연꽃이 피었습니다! 연분홍색 꽃잎이 여러 장 겹쳐져 있어서 신기했습니다. 그런데 오후가 되니 꽃잎이 다시 닫혀버렸어요. 아빠에게 물어보니 연꽃은 오전에만 피어있고 오후에는 꽃잎을 오므린다고 합니다. 날이 너무 더워서 그런걸까 물어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물에 얼음을 넣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물이 너무 차가우면 연꽃이 싫어한다고 했어요. 어느 쪽 말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오후에는 엄마랑 같이 연꽃에 대해서 많이 공부했습니다.



XXXX년 X월 X일 날씨 


오늘은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잠을 자고 있는데 꿈 속에 모르는 사람이 나왔어요. 게다가 이상한 걸 신고 공중에 둥둥 떠있었습니다. 내가 누구냐고 물어보니 자기는 연꽃의 화신이라고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꿈 속인데도 연꽃이 피었을 때랑 비슷한 향기가 났습니다. 꿈 속에서도 냄새를 맡을 수 있다니 신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 피어있는 연분홍색 연꽃이랑은 하나도 안 닮았어요. 그 얘길 하려는데 잠에서 깨버렸습니다. 일어나자마자 엄마아빠에게 말해줬는데 웃기만 하고 안 믿어줬어요. 진짜인데!



XXXX년 X월 X일 날씨 비! 


오늘도 꿈에서 연꽃의 나타 형을 만났습니다. 나타 형은 먼 옛날부터 쭉 연꽃의 화신이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옛날이라고 하니 아주 아주 오랜 옛날이라고 했어요. 다른 연꽃의 화신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혼자 뿐이래요. 그럼 외롭지 않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외로움 같은건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주 아주 옛날부터 혼자였다면 심심할거에요. 혹시 내 꿈에 찾아오는 것도 그것 때문이냐고 물었더니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쓸쓸한 거에요! 앞으로 나타 형이랑 재밌는 것을 하고 놀아야겠습니다. 



XXXX년 X월 X일 날씨 계속 비!


계속 계속 비가 와서 축구를 하러 나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연꽃도 시들시들해보여요. 걱정되서 손전등으로 불빛을 비춰주고 있자니 형이 뭐하고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타 형이 아프지 않게 빛을 비춰주고 있다고 했더니 무슨 소리냐고 해서 처음부터 전부 설명해야 했어요. 형은 곰곰히 들어주는가 싶더니 요새 아이들 사이에서 그런게 유행하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런거 아닌데! 흥입니다.



XXXX년 X월 X일 날씨 맑음!


어제부터 날씨가 맑아졌습니다. 어제 꾼 꿈 속에서 나타 형에게 현실에 나타날 수는 없냐고 물어봤더니 형은 꿈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대요. 아쉽지만 대신 형의 등에 타고 꿈 속 세계를 탐험했어요. 꿈 속 세계에는 여러가지 재미있는 것이 많습니다. 뭐든지 상상하는 대로 나와요. 가끔 엄청 무서운게 나오기도 하지만 그럴 때는 나타 형이 물리쳐줍니다. 나타 형은 엄청 강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모습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혹시 아주 아주 옛날에 나는 나타 형이랑 아는 사이였던 걸까요? 내일 나타 형을 만나면 물어봐야겠습니다.



XXXX년 X월 X일 날씨 맑았다가 비.


오늘 나타 형을 만났습니다. 만나자마자 어제부터 계속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나타 형은 놀란 얼굴을 하더니 맞다고 했습니다. 진작에 말해주면 좋았을걸! 왜 말해주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내가 기억을 못하는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합니다. 혹시 우리 둘이 사이가 안 좋았었냐고 물어보니 그런건 아니었대요. 그래서 안심했습니다. 나타 형이랑 사이가 나빴다면 무척 미안한 일이니까요. 그치만 처음부터 말해줬어도 좋았을텐데. 



XXXX년 X월 X일 날씨 맑고 바람이 많이 붐.


요즘 들어 연꽃이 점점 시들어갑니다. 엄마에게 물어보니 연꽃은 여름에만 피고 그 이후에는 져버린대요. 그럼 나타 형은 어떻게 되는거지? 너무 초조해지는 바람에 오늘은 축구하자는 것도 빼먹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치만 초조해할수록 잠이 오질 않아서 시간만 낭비해버렸어요. 밤에는 꼭 나타 형을 만날 겁니다.



XXXX년 X월 X일 날씨 비.


나타 형을 만났습니다. 꽃이 시들면 나타 형은 어떻게 되는건지 물어봤어요. 나타 형은 아무 말도 않더니 그 씨앗의 꽃이 시들면 자기는 없어진다고 했어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다시 물어봤더니 자기는 너무 오랜 시간을 연꽃의 화신으로 지냈기 때문에 이제 존재할 수 있는 힘이 다 떨어졌대요. 꽃이 시들면 다른 이들처럼 혼백으로 돌아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거라고 했습니다. 그럼 다시 만날 수 있대요. 사실 나는 나타 형이 꿈에서 계속 놀아주는게 좋았지만, 형을 방해하면 안될 것 같아서 꾹 참았습니다. 꾹 참고 인간이 된 나타 형이랑 다시 친구가 되겠다고 약속했어요. 잊어버리지 않게 몇 번이고 다시 약속했어요. 일어나보니 수반의 연꽃이 전부 시들어 있었습니다.



XXXX년 X월 X일 날씨 맑음.


오늘은 시든 연꽃을 마당에 묻어주었습니다. 묘비를 세울까 했지만 나타 형이랑은 다시 만날 수 있으니 세우지 않기로 했어요. 대신에 엄마에게 부탁해서 연꽃의 씨앗을 받았습니다. 공책을 뜯어서 작은 봉투를 만든 다음 그 안에 씨앗을 전부 넣었어요. 언젠가 인간이 된 나타 형을 만나게 되면 이 봉투 안에 든 연꽃 씨앗을 같이 키울 겁니다. 연꽃 씨앗은 단단하니까 꽃을 피우게 하려면 껍질을 부숴야 한다는 것도 가르쳐줄 거에요.


그 날이 무척 기다려집니다.



*


일기장에는 이후로도 드문드문 나타 형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다 끊어졌다. 천상은 남은 페이지를 파라락 넘겨보다 일기장을 덮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 일기장을 쓴 지도 벌써 7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혼자서 멀리 나가보기도 하고 동네 공원에서 무턱대고 기다리기도 했지만 나타 형을 만나지는 못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떤 부모가 갓 태어난 어린아이를 데리고 밖을 돌아다니겠는가. 거기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채 꿈 속의 모습을 찾아다녔던 자신이 우스워, 천상은 혼자 쓴 웃음을 지었다. 


그 이후에 바로 태어났더라면 지금쯤 7살이려나. 이제는 가물가물한 꿈 속 모습을 줄여보던 천상은 누군가가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가족 모두 어디론가 외출한 참이라 집에는 천상 한 사람 뿐이었다. 택배라도 도착한걸까 싶어 현관문을 열어보니 뜻밖에도 대문 앞에는 한 여성이 아이와 함께 종이 가방을 들고 서있었다. 천상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걸어나오자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이사와서 인사차 들렀답니다. 이건 이사 선물이에요."


그러고보니 어제 이삿짐을 잔뜩 실은 트럭이 와서 한바탕 분주했었다. 천상은 감사의 말을 하곤 그녀가 건네는 종이봉투를 받아들었다. 무게가 가벼운 걸 보면 안에 들어있는건 타월인 모양이었다. 다음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어린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린 천상은 순간 뒷목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감각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반응을 다른 것으로 착각했는지 여성이 아이를 바라보며 살짝 손을 끌어당겼다.


"참, 이 아이는 우리 아들 나타랍니다. 나타, 인사해야지?"

"……안녕."

"후후, 얘가 낯을 조금 가려요. 앞으로 잘 부탁 드릴게요."


어떻게 고개를 끄덕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이 들고보니 천상은 한 손에 타월을 든 채 멍하니 대문 앞에 서있었다. 황급히 밖을 내다보니 멀지 않은 집의 푸른 대문이 닫히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어제 이삿짐 트럭이 서있던 그 장소였다. 천상은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으로 한참을 서있다, 서랍 어딘가에 있을 연꽃 씨앗을 찾기 위해 집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