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커뮤니티 로그/제왕의 별 3기(2017)

[22세/이벤트]파도는 해변으로 밀려오고

1.
"헤마르, 섬을 떠날 생각은 없느냐."

그때 소년은 열 세 살이었으며 주위에 친구가 많았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신에게 최선을 다해 애정을 쏟아주었다. 4살 위의 누나는 누구보다 친한 친구이자 적수이기도 했다. 그 작은 섬은 소년에게 꼭 필요한 것들로 충만했고,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소년은 이렇게 되물었다.

"섬을 꼭 떠나야만 하나요?"

손주를 바라보던 노인은 미미한 웃음을 띄우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가 만족한다면 그걸로 되었다는 듯이.

얼마 뒤 소년에게 변성기가 찾아왔다. 
아버지는 아이의 변한 목소리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2.
목소리로 구분할 수 없다면 다른 걸로 하면 되지!

소년은 연 날리는 법을 좀 더 연구해서 더 멀리 날리기 시작했다. 보란듯이 허리춤에 얼레를 매달고 다녔다. 이런 연을 만들어보자고 아버지에게 이야기하고, 실제로도 만들고, 함께 날렸다. 어딘가에서 아버지를 만나면 "안녕, 아빠. 나 마르야!"라고 말하는 버릇도 붙었다. 그럼 불투명한 유리 너머 형체를 보는 듯하던 아버지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변한 것은 그 정도였으므로 소년은 충분했다. 충분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 무렵 누나 이르 오르토는 의사가 되겠다며 섬을 떠났다.
모든 가족이 바다를 건너가 장녀를 떠들썩하게 배웅하고 돌아온 입학식 날,
아버지는 술을 마셨다.

취한 그는 자신을 침실로 옮겨주는 아내와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빠가 많이 취했나봐!"

소년은 일부러 배에 힘을 주고 그렇게 말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해야했다.

3.
"헤마르 오르토."

그때 소년은 할머니의 방에서 수많은 책 중 몇 가지를 뽑아 읽어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책 속에서 아버지가 모르는 얘기거리가 나온다면 통째로 들고가서 읽어줄 참이었다. 문제는 소년도 무엇을 들려주고 무엇을 들려주지 않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지만.

"여기서 도망쳐라."

소년은 책장 가득한 할머니의 방 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유난히 강한 석양빛을 받은 노인은 어떤 조각상 같았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거다."

바닥에 펼쳐두었던 책이 도로 스르륵 닫힌다. 소년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웃으려 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마법 시대의 문명을 쫓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탐사단이 온다더는 말은 이것 때문에 하신 거에요? 그보다 돌아오지 말라니, 너무 거창하지 않나요? 가볍게 토해낼 수 있었을 말은 혓바닥 위에서 빙글빙글 맴돌았다.

"이번에도 떠날 이유는 없느냐?"

4.
소년의 어머니는 갑작스런 결정을 듣고도 별달리 반대하지 않았다. 네가 여행을 해보고 싶다면 해보렴. 다만 언제 어디로 갔는지 꼬박꼬박 전하는 건 잊지 말렴. 세상 천지 자기 자식이 어딨는지도 모르는 부모가 얼마나 속 터지는지 아니? 그런 말을 담담히 건네며 거친 손끝을 잠시 매만졌을 뿐.

아버지 또한, 반대는 하지 않았다. 기실 가정사를 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이야기를 정하는 사람은 늘 어머니였고 아버지는 그 곁에 앉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게 대부분이었다. 사고 이전부터 늘 그런 식이었지만, 소년은 그날 하루만큼은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가지말라던가, 위험하지 않겠냐던가, 마법 문명을 쫓아서 무엇을 하려는 거니, 같은.

허나 아버지는 가족 회의가 끝나기 직전 딱 한 번.

"늘 응원하고 있으마."

그렇게만 말했다.

덕분에 소년이 준비했던 여러가지 근거들은 입 밖으로 나올 일 없이 심중으로 가라앉았다.

5.
그후로 소년은 자신이 보고 듣고 찾아낸 신기한 유물과 거기에 얽힌 이야기를 빼먹지 않고 아버지에게 전달했다. 아버지는 목소리 뿐인 아들이 전해주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며 어떤 때는 탄성을 터뜨렸고 어느 때는 안타까운 한숨을 쉬었다.

"내가 다른건 몰라도 마르 네가 걸어주는 통신만은 기다린단다. 네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 사람이 내 아들이란게 조금씩 기억나거든."

그 말을 듣고서 소년은 웃었다.

통신기를 아주 꽉 쥐고.

6.
"가장 높은 연을 날리는 아이가, 아빠의 아들인거야!"
"도망쳐라,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거다."
"세상 천지 자기 자식이 어딨는지도 모르는 부모가 얼마나 속 터지는지 아니?"
"부모란, 대부분의 경우 자식보다 오래 살지 못해."
"네 아버지는 안면실인증 때문에 네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하지 않느냐?"
"내가 다른건 몰라도 마르 네가 걸어주는 통신만은 기다린단다."

"그게 도망친거라도요?"

…잠시 선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헤마르는 눈을 뜬 채 숨을 들이쉬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날이 무척이나 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