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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제왕의 별 3기(2017)

[19세]얼어붙은 수면을 부수는 소리



"얼음 아래로 낚싯줄을 드리우는 것이 겨울의 묘미지."

수염 덥수룩한 노인은 추위도 상관없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빙반을 탐사하던 와중에 노인을 도와 한참동안 얼음을 깼던 헤마르는 짧은 웃음을 토하곤 그 옆자리에 앉았다. 혹시 모를 손님을 위해 늘 가지고 다닌다던 노인의 휴대용 의자는 의외로 제법 편안했다. 근처에는 큼직한 깡통에다 연료와 장작을 넣어 만든 모닥불이 타오른다. 다행히도 바람은 그리 불지 않아, 모닥불의 열기는 흐트러지는 일 없이 두 사람의 몸을 데워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리안 타이의 레피디움 출신이라고?"
"네, 그쪽 바다의 작은 섬에서 왔어요."
"나는 크세로이바 제도 포베 섬 출신일세. 어떻게보면 동향이구만."

노인은 그렇게 말하곤 품 안에서 작은 보틀을 꺼내 마셨다. 거리가 그렇게 가까운건 아닌데도 알코올기가 느껴질 정도인걸 보면 꽤 높은 도수인 모양이었다. 인심 좋게 자신에게도 권하는 것을 거절하고, 헤마르는 노인 앞에 놓인 가느다란 낚싯대를 바라보았다. 미끼를 끼우고 얼음구멍 안으로 던져넣은 낚싯줄은 아직껏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여행을 떠날 때 가족들이 반대는 하지 않았나?"
"음, 사실 할머님이 추천해주셨어요. 그래서 좀 수월했죠."
"응원과 격려를 받으며 떠난 여행인가. 부러운 일이구먼. 나는 쫓겨났거든."

메마른 웃음소리가 들린다. 헤마르는 옷매무새를 잠시 가다듬었다가, 노인을 돌아보았다. 날은 조금도 흐리지 않은데, 얼음을 파낼 때까지만 해도 생동감에 차있던 얼굴에 어느 틈엔가 그림자가 한 겹 달라붙은 것처럼 보였다. 어딘가에서 잘려나갔을 왼손 새끼손가락이나 뺨의 상처도, 기이하게 부각되보였다.

"랑기아나 섬에는 가봤나? 한때는 그곳에 미쳐 살아서 말이지. 집안 재산을 다 쏟아붓고도 정신을 못차려서 여기저기 빚을 지고 가보를 몰래 전당포에 팔고... 미친 짓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네. 여기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인 셈이지."

헤마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간 낚싯줄이 흔들려, 노인의 이야기도 끊어졌다.

낚여올라온 물고기는 제법 튼실한 크기였다. 오늘 하루는 운이 좋을 것 같다며 껄껄 웃는 노인의 곁에서, 헤마르는 적잖은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 낚싯줄은 움직이지 않았으나 노인은 랑기아나 섬에서 있었던 일들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마을의 소소한 사건이나 술에 취해 생긴 헤프닝을 얘기하며 과장스런 너스레를 떨었다.

이 사람은 분명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지.
그럴 수도 없을거야.

물고기 셋을 낚은 뒤 자리를 추스려 떠나는 노인을 배웅하고, 헤마르는 비행선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공교롭게도 해가 지는 석양이 똑바로 비춰드는 서쪽이었고 하얗게 얼어붙은 호수 표면이 불이라도 옮겨붙은 것마냥 화려한 주홍빛으로 일렁거렸다. 울퉁불퉁한 윤곽마다 드리워진 그림자는 마치 호수가 일렁이는 듯한, 석양에 가득 물든 바다 위를 걷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더니.

-헤마르.
-헤마르 오르토.

언젠가 파도소리와 함께 들었던 할머니의 말이.

-도망쳐라.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거다.

"……."

싸늘한 바람 한 조각이 빰을 스친다. 헤마르는 제 목도리를 정리하곤 걸음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