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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제왕의 별 3기(2017)

[22세]별은 서로 이어지지 못해도 인간은

"아직 트릭이 없던 먼 옛날, 서로 먼 곳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소통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적어도 한 나라에 있었다면 사람을 통해 정보나 소식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보다 더 거리가 멀어지면 말을 타거나 마차에 짐을 싣거나, 혹은 대규모의 사절단을 조직해서 보내는 방식이 사용되었죠. 어떤 방법이든 거리에 비례되는 상당한 시간이 소모되었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불상사로 도중에 소통이 끊어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가 귀에 잘 스며든다. 하지만 지금 그의 주위에 다른 사람은 없고, 오로지 귀마개를 닮은 뭔가에서 (연구소 사람이 트릭의 힘을 이용한 소리전달장치라고 말했었는데, 정확한 명칭은 발음이 어려워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적당한 템포의 안내음성이 흘러나올 뿐이다. 트릭의 힘을 빌린다면 통신 뿐만 아니라 이런 것도 가능한거구나. 헤마르는 한 손으로 제 귀를 덮은 귀마개를 만지작거리며 두꺼운 책자를 순서대로 넘겼다. 듬직해보이는 말, 튼튼한 가방을 맨 배달꾼 등 옛날 모습이 그려진 삽화를 넘기다 보니 조금씩 트릭에 대한 언급이 등장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트릭의 초기 개발분야가 통신에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선 트릭의 힘을 빌린다면 수신인과 발신인 사이의 거리 문제가 무의미해집니다. 언제, 어디에 있든 원하는 사람과 목소리를 나눌 수 있지요. 트릭 기술과 안정된 매개체를 통해 소통하는 동안에는 정보가 손실될 우려도 없습니다. 하지만 트릭 기술의 잠재력은 통신의 간편화나 통신 범위의 확산으로 끝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우수한 인재들이 새로운 이론 및 기술을 개발하는 지금, 트릭 기술은 한층 더 높은 곳을 향해 발전해나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먼 옛날 존재했다는 마법과 같은 기적을 재현하는 것도 가능하겠지요."

조금 생뚱맞게 옛 종족들의 모습들이 나타난다. 날개 달린 윙, 아랫쪽 몸이 물고기의 형태를 띈 세이렌, 거대한 드래곤, 자그마한 요정, 귀가 뾰족한 엘프, 짤뚝한 몸을 가진 드워프. 그리고 그들이 펼치는 마법의 힘을 묘사한 삽화들. 불꽃과 파도와 번개와 섬세한 세공품들…. 헤마르가 그 페이지를 오랫동안 바라보는 동안 여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언젠가는 마법을 뛰어넘는 우리만의 위업이 달성될 것입니다…."

*

"어떠셨나요?"

긴 설명이 겨우 끝나고 소리 나는 귀마개를 벗은 헤마르가 가벼운 한숨을 쉬자, 언제부터인가 곁에 서있던 연구원이 빙긋 웃으며 귀마개를 받아들었다. 헤마르가 탐사대의 일원이라는 것을 듣자마자 이것을 가장 먼저 체험해달라며 안내음성기기쪽으로 안내해주었던 장본인이다.

"귀가 좀 눌린 기분이야."
"이런, 다음 개량 때에는 참고하겠습니다."

귀마개 끝에는 튼튼해보이는 끈이 달려, 그대로 안내용 책자가 놓인 탁자 속으로 들어가 고정되어있다. 저 안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물어봐도 알아들을 수 있을까? 자신의 능력에 대해 그럭저럭 알고있는 헤마르는 속으로 고개를 젓고 다시금 연구원을 바라보았다.

"내용은 꽤 재미있었어. 트릭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기 위해서 개발됐다는거 말이야."
"그쪽에 주목하신건가요? 재미있네요. 같은 내용을 들어도 다들 관심을 보이는 부분이 다르거든요."
"아하하, 나는 사람을 대하는게 좋으니까 말야~ 기왕이면 여행중에 타종족도 만나보고 싶었어."
"그런가요. 하지만 만날 수 없으셨겠죠. 이 세계에는 이제, 인간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남자의 말에는 딱히 쓸쓸한 기색도 없다. 이 기계는 최신식이라고 말하는 듯한 어투였다.

"그동안 인간은 이 세상에 별처럼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을 제대로 이어줄 기술도 도구도 없었죠.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트릭이 생겼으니까?"
"네. 저희는 그 기술로 사람을 서로 이어주며,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기술을 개발할 작정입니다. 방금 전 안내음성으로도 들으셨겠지만, 옛 이야기로 전해지는 마법을 흉내내는 것으로 트릭의 잠재성을 끝낼 생각은 없으니까요."

목표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헤마르는 그렇게 말하곤 웃었다.
별처럼 흩어진 인간. 그 말이 묘한 울림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