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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제왕의 별 3기(2017)

[20세]밀려오는 파도를 멈출 수 없어서

"헤마르 오르토."

티폴리우스 중앙대학. 국제언어학과의 교수직을 맡고있는 노인은 등이 곧았다. 몸을 감싼 푸른색 정장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달리 염색하지도 않은 회색머리를 빈틈없이 틀어올린 그녀는 업무용 책상에 앉은 채 빙긋 웃었다. 여러 문건과 서류가 쌓인 책상에 앉은 그 모습이 옥좌에 앉은 한 나라의 여왕을 연상시켰다.

"많이 자랐구나. 네 할아버지 장례식 이후 처음인가?"
"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부솔라 할머니."
"고모할머니라고 불러야지. 정확한 칭호가 중요한 거야. "

헤마르는 푸스스 웃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만족한 듯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책상 앞 응접용 테이블을 손으로 가르키며 앉으라 권했다. 검은 가죽 소파와 쇠 프레임으로 짜여진 테이블. 검은 꽃병에 담긴 드라이 플라워는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그 옆에 재떨이가 놓여있었지만, 부솔라는 담배를 입에 무는 대신 미리 준비해놓았다는 허브차를 따라주었다. 하얀 찻잔에 연두빛이 일렁였다.

"여행은 어땠니? 얘기해보렴."

헤마르가 입을 여는 사이 그녀가 빠르게 덧붙였다.

"해당 국가 언어를 써서."

시작부터 난관이다. 헤마르는 자신이 배웠던 언어들을 더듬더듬 구사하며 여태까지 있었던 일을 말했다. 레피디움에서 정리를 도왔던 언어연구소를 시작으로 사티우스의 진료소에서 마주했던 엄청난 빨래더미, 불시의 추락으로 떨어져 반년 가까이 살아야했던 무인도, 데알바타 섬의 비행 연구소에서 연구원들과 나눈 이야기, 랑기아나 섬에서 귀한 유물을 찾은 덕에 초대받은 선상파티, (부솔라는 미간을 좁혔지만 이내 입꼬리만 올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스타르디 남부에서 병을 앓았던 일, 바스타르디 북부에서 몸을 담그었던 온천, 락테아의 왕궁 박물관, 아르크의 바닷가, 클레레트에서의 얼음 낚시...를 마지막으로 말하고 있자니 어느새 2시간은 훌쩍 지나간 상태였다. 차주전자에 다시 뜨거운 물을 부은 부솔라가 웃었다.

"단어 사용이나 발음은 그럭저럭 괜찮지만 가끔 시제가 어긋나는구나. 여행은 견문을 넓히는게 우선이라지만, 기왕 배우는 것이라면 철저하게 배우렴. 지식은 사람이 팔 수도 살 수도 없는 가장 고귀한 것이니까."

헤마르가 볼을 긁적이는 사이 허브차를 홀짝인 부솔라가 잔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지식만이 최고는 아니란다. 네 할아버지는 그런 것과는 연이 멀었지만 심성만은 고왔으니까. 아귤라가 그런 점에 반했다고 했을 때 난 바보같은 소리라고 했다만 막상 내가 결혼을 해보니..."

부솔라가 후후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책에서 지식을 얻는 것이라면 몰라도 사람의 보는 눈은 모자랐던 모양이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손에는 가느다란 은빛 손목시계를 제외하면 아무런 장신구도 남아있지 않다. 공교롭게도 그녀와 그녀의 사라진 결혼반지에 얽힌 사정을 모르는 헤마르는 잔을 입가에 댄 채 오래오래 마시는 시늉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옛날 이야기는 이쯤 해두자. 가족들과는 자주 연락하고 있니?"
"네, 통신기가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늘상 연락 드리고 있어요."
"그래야지. 안그래도 네 아버지는 안면실인증 때문에 네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하지 않느냐."

그 사고만 없었어도...

중얼거림은 짧다. 하지만 그 말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오르토 가문에 관여된 사람이라면 전부 다 알았다. 그래서 헤마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별 것 아니라는 동작이었다.

"요즘은 잘 알아차리세요. 통신기의 목소리에도 익숙해지셨나봐요."
"그렇다면 다행이지. 인간은 상황에 익숙해지거나 타파하는 수 밖에 없어. 헌데 네 아버지는 후자를 택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헤마르는 거기에 더해 세번째 선택지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고 웃었다. 고모 할머니는 정말 사람이 택할 수 있는 행동은 그 두 가지 뿐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남은 길은 굳이 입 밖으로 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걸까.

어느 쪽이든 오랫만에 만난 먼 혈육끼리의 대화는 부드럽게 이어졌다. 그게 끊어진 것은 시계가 오후 2시 반을 가리켰을 무렵이었다.

"흠, 벌써 이런 시간인가. 삼십분 후부터 국제언어학 강의가 있으니 너도 출석하도록 해.  서투르다고는 하나 리안 어 모국어인 자가 라크티 어, 다나드어에 티피티피 어까지 익혔다면 꽤 재능이 있어. 앞으로의 여행에 있어서도 꽤 유용할테고 말이다."
"아하하,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부솔라 고모 할머니가 정한 일은 왠만해선 바뀌지 않는다. 본인이 그게 옳은 일이라고 굳게 믿는데다 실제로도 그렇기 때문이다. 늘상 생각하는 거지만 내 주위에는 정말 의지 굳고 대단한 사람 투성이야. 헤마르는 속으로 중얼거리곤 비어버린 찻잔과 차주전자는 자기가 씻겠다며 일어섰다. 부솔라는 그걸 거절하지 않았다. 교수실에 딸린 작은 세면장에서 다기를 씻는 동안 등 뒤에서 자료를 부지런히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교재는 당연히 없겠지. 남는 저서와 필기구를 빌려주마. 강의 시간은 총 세 시간. 중간에 졸면 깨워서 교재 낭독을 시킬 줄 알아. 망신살이 뻗치면 잠도 달아나는 법이지."
"에이, 고모할머님도 참. 제가 그러겠어요?"

너스레야 떨었지만 부솔라가 그렇게 말하는 이상 '정말' 농담이 아닐 것이다. 헤마르는 오랫만에 모골이 송연한 기분을 느끼며 절대 졸면 안되겠다고 다짐했다.

*

강의실에 모인 학생들은 하나같이 진지한 태도로 자신들의 연구과제를 발표했다. 익숙한 언어가 있는가 하면 앞으로 도달할 어떤 나라의 생소한 언어와 그 어원이 정밀하게 조명되기도 했다. 중간 쉬는 시간에 잠시 말을 나눈 이들은 대부분 사르겐티아나와 그 근처나라 출신이었으나 드물게 바다와 산맥을 넘는 먼 나라에서 온 자들도 있었다. 언어학에 대한 지식, 그리고 꼭 그 분야가 아니더라도 더 성장하고 싶어 찾아왔다는게 그들의 말이었다. 

세 시간으로 예정되어있던 수업은 발표가 이어진 관계로 15분 정도 늦게 끝났다. 이후로는 모레에 있을 학회 준비로 같이 저녁을 먹기도 여의치 않다던 부솔라는 (아마 오늘 시간을 할애해 얘기를 들어준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손님맞이였으리라) 마침 이런 것이 선물로 들어왔다며 큼직한 버터 쿠키 깡통을 건네주었다.

"앞으로도 여행 힘내거라. 어떤 생각을 했던 섬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도 장한 일이야."

종이가방에 담긴 선물을 받아들고 빠져나온 대학건물은 멀리서 보면 어둠 속에 떠오른 등불같다. 몇몇 사람들이 짤막한 이야기를 나누며 어딘가로 향하는 동안, 자신이 나온 방향을 응시하던 헤마르는 이내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게 도망친거라도요?"

그걸 아무도 듣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