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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제왕의 별 3기(2017)

[18세]파도보다 높은 곳, 눈보다는 낮은 곳


열과 기침으로 제대로 보지 못한 겨울은 산 끝자락에 걸려있었다. 이제 날짜 상으로는 봄이 한창인데도 싸늘한 공기가 감도는 설산 중턱에 선 채, 헤마르는 연신 하얀 입김을 내뿜었다. 옷은 든든하게 입고 온 덕에 춥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산길을 걸은 탓에 뺨이 조금 따끔거렸다. 지나치게 차가운 바람은 뺨을 따끔거리게도 하는구나. 헤마르는 장갑낀 손으로 뺨을 몇 번 어루만지곤 걸음을 서둘렀다. 오르막길 너머로 목적지가 보이고 있었다.

날이 쌀쌀한 탓인지 온천 안에는 몇몇 손님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헤마르가 아직 차가운 바깥 공기를 휘감은 채 그 모습을 보고있으려니, 안내원인 듯한 남성이 친절하게 말을 걸어왔다. 어차피 이 지역은 처음이겠다 사양 없이 그의 친절함에 의지한 헤마르는 잠시 후 노천탕으로 이어지는 탈의실 앞에서 제 옷을 한 번 털어내곤 문을 열었다. 안에는 마침 온천을 끝내고 나온 듯한 중년 남성 두 명이 기분좋은 얼굴로 껄껄 웃고있었다.

"이야, 오늘도 절경이었구만!"
"가서 밥이나 먹고 내려가자고!"

꽤나 절친한 친구인 모양이다. 하지만 바깥은 꽤나 추웠을텐데, 힘들지는 않았던 걸까? 헤마르는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다 그들과 떨어진 자리에서 주섬주섬 방한복을 벗기 시작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직접 들어가보면 알 일이었다.

*

두꺼운 옷을 벗느라 꽤 시간이 걸렸다. 어찌어찌 작은 옷장 안에 옷과 신발을 전부 밀어넣고 열쇠끈으로는 머리를 묶는다. 뒤이어 온천으로 들어선 헤마르는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를 보고 숨을 꿀꺽 삼켰다. 불, 이라기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 그것은 허공을 천천히 떠가다, 어딘가에서부터 투명해져 사라지고 있었다.

"증기?"

손을 뻗어봐도 잡히진 않지만, 덕분에 옷을 벗어 서늘해진 몸이 따뜻하다. 몸에 찬바람이 맞지 않게 걸쳐둔 가운을 다시 한 번 여미고 안쪽으로 걸어가자, 증기가 한 꺼풀 걷히며 설산의 풍경이 나타났다.

"...우와."

하늘은 맑다. 설산의 끝은 조각도로 날카롭게 파낸 것마냥 매끄럽세 하늘로 치솟았다가, 딱 알맞은 부분에서 깍여 맞은편 방향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산맥을 이루는 다른 줄기들이 거기에 합류되어 흡사 거대한 흰색 파도가 막 물결치는 듯 했다. 얼추 매어둔 가운의 끈이 풀리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멍하니 서있던 헤마르는 문득 제 품 안으로 찔러들어오는 찬 바람에 몸을 움츠렸다. 온천에서 올라오는 증기가 아무리 따뜻하다 한들, 쌀쌀한 바람을 전부 막아주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거기서, 온천으로 입수.

"으하~"

따뜻한 물이 순식간에 온몸을 감싸, 목까지 잠긴 피부에 짜릿할 정도의 온기가 퍼진다. 잠시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잊고 지긋이 눈을 감고있던 헤마르는 물 속에 잠겨있던 손을 살짝 들어보았다. 투명한 물 위로 파문이 퍼지며, 손가락 끝이 섬처럼 빼꼼 솟아났다. 솟아난 섬은 점점 높아지더니 이내 하나로 이어지며 다섯 봉우리의 산이 되고, 거기서 더 자라나 한 그루 나무가 되더니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가지 사이를 휘감다 사라져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무도 산도 섬도 모두 따뜻한 물 속으로 삼켜졌다. 헤마르는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고는 온천 물 속에 제 몸을 푹 담궈버렸다. 온기가 눈을 해칠까봐 눈을 꾹 감은 채였지만,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수초처럼 흔들리는 감각이나 뭄이 제 몸을 감싸안는 감각은 익숙했다. 그리고 이 위에는 수면에 일그러진 하늘과, 설산의 풍경이 있을테지. 머릿 속의 풍경은 점차점차 뒤로 흘러가더니 바스타르디 남부의 시장과 랑기아나 섬의 선상파티, 데알바타의 비행 연구소나 무인도의 동굴 따위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감긴 시간은 2년간 보지 못한 가족의 얼굴에도 다다랐고...

'...마르. 가끔 연을 날려주렴.'
'아버지도 종종 날릴테니까 말이다.'

지금껏 도착한 나라마다 연을 날려왔다. 그리고 통신기를 통해 연이 하늘을 날던 모습을 전할 때마다 아버지는 안도한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렇구나, 잘 했다 마르. 부디 높은 곳에서 많은 것을 보고 돌아오렴. 네가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들이 우리의 보물이 될거란다.

...온천에서 돌아가면, 집에 통신을 넣어볼까. 속으로 생각하며 물 밖으로 상체를 일으키자, 누군가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낸다. 젖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뒤를 돌아본 헤마르는 어느 손님이 기겁한 얼굴을 하고 있는걸 보고 겸연쩍게 웃었다.

이야기거리가 늘은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