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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듀라라라!!

[키다미카]BLACK OATH

소재제공 : 카가미네 린/카가미네 렌 - 비밀~검은 맹세~

배경소재등은 이리저리 변조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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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부터 말하기를 하늘의 규율을 어기면 천벌이 내린다 하였다.

 

=

 

이것이 그 천벌인가.

 

키다 마사오미는 눈 앞에 굳건하게 서있는 존재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를 향해 길다란 검을 겨누고 있는 소녀의 뺨에서 단정하게 잘린 흑색의 머리카락이 창문을 타고 불어들어온 산들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지금 그녀의 눈동자에 담겨있는 붉으스레한 감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봄바람이었다. 마사오미는 바닥에 엉거주춤하게 앉아있던 자세를 추스려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다시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누가 보더라도 미소녀라는 의견을 내놓을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의 용모는 그 손에 들려있는 검날의 무미건조한 차가움이라는 모순적이 이미지와 한데 어우러져 감히 이쪽에서 먼저 말을 걸기 힘든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한 번의 경험으로 그와 비슷한 존재를 만난 적이 있었던 마사오미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뒤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언젠가는 올거라고 생각했어, 천사씨."

「………….」

"그렇게 노려보지 않아도 알고있어. 내가… 죄인이라는 것쯤은, 말이지."

 

마사오미는 자신의 얼굴에 자조 섞인 미소를 띄우며 시선을 떨궜다. 그의 시야에는 이제 갈색의 마룻바닥과 그 위에 앉아있는 자신의 무릎, 그리고 마룻바닥을 디디고 서있는 「천사」의 두 발밖에 보이지 않았다. 볕이 들어오는 창문을 등지고있는데도 불구하고 천사의 발끝에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완전무결한 빛에서 태어나는 천계의 존재들에게서는 그림자같은 '어둠'이 빌붙을 틈새가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만났던 한 천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잠시 추억을 되새기던 마사오미는 철컥이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목 바로 옆으로 바싹 달라붙은 칼날의 서늘함에 숨을 삼키며 현실을 직시했다.

 

"…역시, 나는 죽는건가."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어. 들어줄 수 있어?"

「말해보세요.」

"내가 죽었다는걸, 그 아이가 모르게 해줘."

 

고개를 들어올리면서 말한 최후의 소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목에 붙어있던 검날이 더욱 간격을 좁혀왔다. 자신의 목을 보호하고 있는 한 장의 가죽이 금방이라도 서걱이며 베어나갈 것 같은 압박감이 더더욱 몸집을 부풀리는 가운데, 마사오미는 바싹 말라붙은 입술을 핥으며 붉게 녹슨 눈동자의 천사를 올려다보았다.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그녀의 시선이 날카롭게 피부를 도려내는 것 같았지만 눈을 돌릴 수는 없었다. 만약 그런 짓을 했다간 자신의 마지막 부탁은 완전히 거절당할 것이고, 만에 하나 그렇게 되어버린다면… …사랑하는 미카코가, 무척이나 슬퍼할 테니까.

 

마사오미는 고요히 이를 악물었다.

차디찬 현실 속에서 추억이 뱅글뱅글 떨어져 내려왔다.

 

=

 

키다 마사오미에게는 연인이 있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그녀가 이제는 그의 곁에 없기 때문이다. 한때 서로를 사랑했던 그들은 서로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다기보다는 많은 미련이 얽기설기 뒤엉킨 형태로 갈라섰고, 어떤 의미로 볼때 서로를 미워하는 것보다 더 질이 안좋게 헤어져버린 마사오미는 솔기가 터져나간 헝겊인형처럼 너덜너덜한 마음을 가진 채 그녀를 멀리했다. 마사오미의 연인이었던 사키는 그런 그를 오랫동안 기다리다 전부터 병들어있었던 마음의 문제와 신체적인 질병문제가 겹쳐 머나먼 곳으로 요양을 떠났고, 그곳으로 떠난 지 정확히 3개월이 지난 어느 여름날에 영원한 잠에 빠져들었다.

 

마사오미는 지금도 부고장이 날아왔던 그날의 일을 잊지 못한다. 이상하도록 높게 떠있던 태양, 가로수에 붙어 시끄럽게 울부짖던 매미의 울음소리, 거리에 가득 차있던 인파의 소란스러움, 이상하도록 고요한 방 안의 공기, 조금 삐걱이던 마룻바닥, 책상에 올려져있던 편지봉투와 거가에 적혀져있던 어딘가의 주소, 안에 들어있던 편지의 덤덤한 필체와, 그리고, 그리고…….  ………….

 

그는 어느 비오는 날에 치뤄진 그녀의 장례식에 얼굴을 내밀지조차 못했다. 대신 그때부터 검은 옷을 입었다. 새까만 천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있노라면 그 검은 빛깔이 모조리 자신의 죄로 물들어있는 듯한 착각이 일어나기도 했거니와, 겁쟁이에 구제불능인 자신에게 허락된 색깔은 이것뿐일거라는 자조섞인 생각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이전에는 얼굴을 내밀기는 커녕 일상생활의 범주에 넣을 생각조차 못했던 교회라는 장소에 들리기 시작했던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그런 연유로 이후 신부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될 정도로 교회에 자주 출입하게 된 그였지만, 정작 거기에서 기도를 올린 적은 얼마 되지 않았다. 미사에 참여하여 누군가에게 기도하는 시간이 되어도, 텅 빈 교회에서 아무도 없는 빈 의자에 앉아봐도, 왠지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자신의 행위를 채점하는 듯한 강박관념이 이빨을 드러내는 바람에 조용히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감각이 자신이 감히 그녀를 애도할 수 있는걸까라는 의문을 품은 그의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알면서도, 그렇기에 자신의 두려움을 없애지 않는 한 같은 일이 반복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무의미하게 교회에 발걸음을 옮기는 일을 계속했다. 그야말로 자기중심적인 이야기지만, 최소한 이렇게라도 하고있는 한 자신이 그녀를 금방 잊어버릴 일은 없으리라는 말을 끝없이 되뇌이면서.

 

…그런 생활이 시간이 돌고 돌아 다시 여름이 찾아올 때까지 반복되었다.

 

교회의 뒷뜰에는 넓은 숲이 펼쳐져 있어서 이따금 부모의 강압에 못이겨 억지로 끌려온 아이들이 몰래 빠져나와 떠들썩하게 놀거나 수녀들이 이런저런 약초나 나물을 채집하거나 직접 재배하기도 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범주에도 들어가지 않는 마사오미는 이따금 목적없이 숲을 산책하는 것으로 자신의 강박관념에서 도망치기를 반복했고, 그날도 그는 무더운 공기를 가득 머금고있는 나무들 사이를 정처없이 헤메이고 있었다. 짙은 녹음빛의 커튼이 햇빛을 가리고 있는데도 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져서 공연히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는 묘한 날씨였다. 그렇게 얼마나 숲을 헤메었을까, 문득 어지러워진 시야와 함께 균형을 잃고 쓰러질뻔한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서둘러 부축해주었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을 짓고있는 긴 흑발의 소녀가 있었다. 

 

"저, 저어… 괜찮으신가요?"

 

그것이 '키다 마사오미'와 '류가미네 미카코'와의 첫만남이었다.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부모님이 없는 천애고아로, 특유의 소심한 성격때문에 마사오미가 있는 이 마을로 이사오기 전에는 마을 바깥으로 한 발짝도 나온 적이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 고아원을 나오게 된 것을 계기로 이제까지와의 자신과는 다른 무언가 새로운 삶을 발견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웃 마을인 이곳으로 상경할 결심을 세웠으며, 그 결심대로 이제 막 교외의 한 집으로 이사를 오려던 참이었다며 수줍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마사오미는 언젠가 자신이 느꼈던 감정이 심장 속에서 다시 샘솟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감미로운 기쁨이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심장을 짓찢을 정도로 차가운 공포이기도 했다. 누군가가 들으면 어이없는 이야기라고 웃을지도 모르지만, 키다 마사오미는 이제 막 처음 보게 된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마사오미는 물론 그 감정에 저항하려 했다. 그는 미카코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사키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고, 미카코의 웃음을 볼 때마다 사키의 창백한 웃음을 떠올렸고, 미카코의 생각이 떠오르려 할 때마다 그 여름날의 건조한 편지를 떠올리며 자신의 마음을 수없이 죽여나갔다. 그런데도 정신을 차리고보면 그는 어느샌가 미카코를 찾고있었고, 그녀가 기뻐할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그녀와 더 함께있고싶다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이성과 감정이 서로 격렬하게 뒤얽히는 가운데 마사오미는 점점 교회에 찾아가는 대신 근처로 이사오게 된 미카코의 집에 자주 찾아가게 되었다. 그 횟수에 비례해서 처음에는 비어있던 그의 손에도 꽃이라던가 예쁜 리본같은 여자가 좋아할만한 물품을 하나씩 들려지게 되었고, 마침내 그는 자신의 손에 아름다운 꽃다발이 자연스럽게 잡히게 된 어느 늦가을날에 자신이 미카코를 사랑하고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사키를 배신하였다 하더라도 상관없을 정도로 깊은 사랑이었다.

 

그는 그 꽃다발을 사키의 무덤에 바치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사죄의 말을 바친 뒤 곁에 있던 미카코의 손을 힘있게 붙잡았다. 미카코 또한 마사오미의 손을 굳게 붙잡은 뒤 사키의 묘비를 향해 깊게 깊게 허리를 숙였다. 맑게 개어있는 하늘 아래에서 미카코의 두 뺨으로 투명한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이후 마사오미는 자신 대신 그녀가 울어주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펑펑 우는 미카코를 달래주느라 진을 빼야했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진부하다면 진부할 정도로 행복한 사랑의 나날이었다.

 

미카코는 비유하자면 맑은 하늘같은 소녀였다. 그녀는 수줍게 웃었고 솔직하게 기뻐했고 순수하게 화를 내고 있는 그대로 슬퍼했다. 그녀에게는 감정의 꾸밈이라는 것이 한 조각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사오미가 그녀에게 끌린 것도 그녀의 그런 맑은 심성때문이었다. 이런저런 감정에 찌들어 오랫동안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낼 수 없었던 그에게 있어 자신에게 솔직하게 행동하는 그녀의 순수성은 하늘에서 살다 이따금 지상으로 내려오는 천사의 그것과 흡사하게 느껴졌다. 때문에 그는 데이트를 하거나 집에서 미카코와 함께 지내는 동안 그녀의 그림자 대신 한 쌍의 날개가 보인다며 장난을 쳤고, 그때마다 미카코는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이며 가녀린 팔로 키다를 마구 공격했다. 그런 싸움은 대개 마사오미의 애정 어린 스킨쉽으로 마무리 지어졌고, 그런 일상이 서서히 쌓여가면서 두 사람이 깊은 관계를 맺게되는데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겨울이 저물어가는 저녁노을 속에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두 사람은 봄의 지저귐과 함께 동거를 시작했다. 그것은 여태까지의 사랑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달콤한 생활이었지만, 그렇기에 마사오미의 마음 속에 문득 문득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 불안감이란 사랑을 거부하고 또한 등져버렸던 자신이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가더라도 괜찮은 것일까하는 것이었고, 이따금 마을에서 실체를 드러내곤하는 격언 -하늘의 규율을 어기면 천벌이 내린다- 과 뒤섞인 불안감은 행복으로 가득 차있어야할 그의 마음에 작은 가시처럼 박혀들어 결코 뽑히지 않았다. 물론 마사오미 또한 그 사죄만으로 자신의 죄가 모두 상쇄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죄가 되어 자신이 심판 받았을 때, 그 이후에 남겨질 미카코의 슬픔을 생각하면 그 작은 가시를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이 깨져나가는 듯한 절망이 느껴졌다.

 

…그래도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다. 마사오미는 그렇게 되뇌이며 자신의 불안함이 미카코와 함께 엮어낸 행복을 침식하는 일이 없도록 마음가짐을 단단히 했다. 하지만 닭의 목을 잘라내어 버리거나 부리를 부러뜨린다고해서 아침을 막아낼 수는 없듯이, 단순히 마사오미가 마음을 닫아버리는 것 만으로는 하늘을 눈을 속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봄햇살이 따사로운 오늘, 어딘가로 외출한 미카코를 기다리며 서랍 속의 작은 편지-사키의 부고장-을 꺼내 천천히 읽어보던 마사오미가 기묘한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소리없이 내려선 그림자 없는 천사는 이미 손에 들린 날카로운 검으로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추억은 모두 떨어져내렸다.

 

 

마사오미는 눈꺼풀을 깜빡이지도 않으며 천사를 올려다보았다. 만약 단 한 번이라도 눈꺼풀을 움직인다면, 그래서 자신의 눈에 암흑이 가득차게 한다면 그 다음 순간에 자신의 눈꺼풀 너머의 세계를 다시 마주할 일은 없으리란 사실이 피부에 저릿저릿하게 와닿고 있었다. 때문에 오직 미카코의 우는 얼굴이 보고 싶지않다는 일념 하나로 인간을 아득하게 넘어선 존재와의 눈싸움을 계속하던 마사오미는 천사의 입술이 움직이면서 만들어낸 말을 듣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 소원은 들어줄 수 없습니다.」

"…어째서야? 나는 미카코를 슬프게 하고싶지 않은 것 뿐이야!! 그런데 왜!!"

 

천사에게 인간이 대든다는 정신나간 상황에도 불구하고, 녹슨 눈동자의 천사는 무미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이미 한 번 그녀를 슬프게 했습니다.」

 

마사오미가 그 말을 듣고 머리로 이해하고 그에 대한 반응을 이끌어내려는 동안, 자신의 말을 마친 천사는 아무런 전조없이 들고있던 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날카롭게 벼려진 채 줄곧 주인의 손에 속박되어있던 칼날이 부드러운 살갗과 탄력있는 근육과 피로 가득찬 혈관을 베어버리며 기쁨에 찬 웃음소리를 흘렸다. 여려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단 한번의 일격으로 사람의 숨통이 끊어질 정도의 치명상을 입힌 칼날의 주인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무기가 더 베고싶다고 칭얼거리는 것을 무시하고 서서히 피웅덩이가 퍼져나가는 방을 등지고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마사오미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자신의 피웅덩이를 어떻게든 감춰보려 했지만, 이제 곧 생명의 촛불이 꺼지려는 상황에서는 더없이 부질없는 손길에 불과했다. 눈동자가 제멋대로 지나간 추억들을 되새기는 가운데 힘없이 피웅덩이 속에서 철벅이던 손가락들이 움직임을 멈췄고….

 

그와 동시에 마사오미의 생명이 숨을 멎었다.

 

=

 

툭, 데굴데굴.

 

품에 안고있던 종이봉투가 바닥에 떨어진다. 안에 들어있던 사과가 봉투를 벗어나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가며 피웅덩이에 몸을 적셨다. 붉은 과실이 그보다 더 붉은 빛깔로 자신의 몸을 물들이는 가운데,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비척비척 방안으로 걸어들어간 미카코는 쓰러진 마사오미의 바로 앞에서 풀썩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고여있던 핏물이 튀어오르며 그녀가 입고있던 원피스와 그녀의 하얀 무릎에 새빨간 얼룩을 남겼다.

 

"…마사오미…?"

 

평소에 비하면 한없이 사그라든, 마치 바싹 타버린 잿더미 같은 목소리로 속삭인 미카코는 가만히 손을 뻗어 쓰러진 마사오미의 몸을 흔들었다. 온기와 피와 혈색과 영혼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 몸은 그저 잘려나간 나무토막처럼 흔들릴 뿐이었다. 핏물이 하얀 원피스 자락의 한쪽에 완전히 스며들어 버릴 때까지 계속 마사오미의 몸을 흔들던 그녀는 어느 순간 북받치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투명한 눈물 한 줄기를 흘렸다. 그 눈물은 언젠가 미카코가 울음을 터뜨렸을 때 그녀를 따스히 위로해주던 마사오미의 품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그 연쇄작용으로 인해 여지껏 그와 만들어왔던 추억의 범람에 빠지게 된 미카코는 숨을 깊게 헐떡이며 이미 차갑게 식은 마사오미의 한손을 잡아올렸다.

 

"…저기, 마사오미…. 기억하고있어?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의 일."

 

"내가 길을 잃고있을 때 마사오미가 먼저 손을 내밀어 줬었잖아. 나 말야, 그때 마사오미를 보자마자 처음으로 반했었어. 길을 잃어버렸던 거라던가, 상처를 입고있었다던가, 그대까지 무척이나 외로웠다던가 고독했다는 사실까지 전부 잊어버릴 정도로 가슴이 떨리는거야. 그래서 마사오미의 특별한 사람이 되고싶었어. 마사오미랑 내가 서로 사랑할 수만 있다면 다른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사오미를 좋아했어. 그러니까, 그래서 나는………."

 

미카코는 마사오미의 차가운 손을 쥐고있는 자신의 손에 힘을 주었다. 원피스를 점령한 핏자국들은 서서히 흑갈색으로 변색해가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져있는 마사오미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정돈해준 미카코는 마지막으로 마사오미의 싸늘한 이마에 입맞춤을 남긴 뒤 조그맣게 속삭였다.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보다 더더욱 약한 그 목소리는 허공에 날리는 잿가루만큼이나 덧없는 것이 되어있었다.

 

"…운명을 부수기로 한거야…."

 

그리고 마사오미는.

그래서 미카코는.

 

=

 

…마사오미는 흐릿한 꿈을 꾸고있었다.

 

주마등같은 것은 이미 먼 예전에 지나가버린 뒤의 일이었다. 이제 이 꿈이 사라지고 주변이 빛으로 감싸이면 자신은 온전한 죽음의 세계로 발을 내딛게 되리라. 이상할 정도로 충만한 마음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던 마사오미는 꿈 속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그의 귀에도 무척이나 익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누구의 것인가는 알 수 없었다. 마사오미는 그저 나른한 공기에 몸을 맡긴 채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ㅡ안녕? 여기서 뭘하고 있어? 천사씨?

ㅡ…길을, 잃어버렸어….

ㅡ우왓, 그거 큰일이네- 괜찮다면 우리 집으로 올래?

ㅡ에….

ㅡ어차피 갈데도 없잖아? 자자, 사양하지 말고 렛츠고!!

ㅡ아, 아, 응…. 고마워.

 

목소리는 두 명의 것이었다. 마사오미는 하나의 목소리가 아직 사키가 먼 곳으로 떠나기 전의 자신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그 도중에 또 한 명의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그가 생전 처음으로 만난 천사의 목소리였다. 자신보다 어려보이면서도 나이는 몇 배나 많았던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을 흐릿하게 덧그려보던 마사오미의 귀로 그 다음 대화가 이어졌다.

 

ㅡ내 이름은 키다 마사오미. 아무거나 편한걸로 불러.

ㅡ…아, 그럼… 키다군… 이라고 불러도 돼?

ㅡ물론이지. 그런데 우리 귀여운 천사씨의 이름은 뭔가용용?

ㅡ아, 그게, 저기….

ㅡ응? 어랏, 그 반응은 뭐지? 혹시 고귀한 천사님의 이름을 미천한 사람이 묻는건 무례한 짓이었다던가?

ㅡ아, 아냐!! 그런건 아니고….

 

천사소년은 오랫동안 말을 아꼈다. 지루해진 마사오미가 곁에서 이런저런 말로 구워삶은 끝에서야 비로소 입을 연 천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보통 사람의 귀로 듣기에는 도저히 알아듣기 힘든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사오미는 흐릿한 의식 속에서도 그때의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렸다. 의자에 거꾸로 앉은 채 자신이 얼빠진 표정을 짓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천사 소년은 우물쭈물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ㅡ천사의 이름은 인간들이 발음할 수 없는 언어라서… 키다군에게는 잘 들리지 않을거야.

ㅡ그런가, 알았어!! 그렇다면 나는 나만의 식으로 너의 이름을 부르면 되겠군!! 말하자면 메이드 인 마사오미!!

 

갑작스런 자신의 발언에 천사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의자에 턱을 괸 채 곰곰히 생각하던 자신은 이윽고 두 손을 서로 맞부딪치면서 외친다.

 

ㅡ좋아, 나는 이제부터 너의 이름을【            】라고 부르겠어!!

 

그 안에 들어가던 이름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이름이 무엇이라 불렸는지를 기억한 마사오미는 완전히 굳어져있던 숨결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눈 앞에는 그토록 사랑하던 미카코의 얼굴. 그녀의 눈가에 고여있는 눈물에 가슴이 터져나가는 기분을 느끼며 마사오미가 손을 뻗자, 손끝에 닿은 길다란 흑발이 마치 먼지처럼 흩날리며 사라지더니…

 

"…사랑해, 키다군."

 

그곳에 그가 처음으로 만났던 천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천사의 모습은 마치 유리조각이 깨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모습을 감췄다.

눈앞의 허공에 남은 것은 단 한 장의 검은 깃털 뿐이었다.

 

그녀의 뺨을 만지려하던 키다 마사오미의 손에는 그 새카맣게 물든 깃털 한 장만에 안겨들었고,

그 깃털에서 모든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려버리고 만 키다 마사오미는 처절하게 단 한사람의 이름을 외쳤다.

 

 

"미카도!"

 

 

 

그것은 그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것은 하늘에서 살아가는 자의 이름이었다.

그것은 그가 밀쳐내버리고 말았던 소년의 이름이었다. 

그것은 자신만의 사정에 몰려있던 그가 상처입힌 천사의 이름이었다.

그것은 끝없이 순진하고 깨끗했던 존재의 이름이었다.

그것은 그를 좋아했던 천사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자신을 구하고 사라졌다.

 

너무나 무거운 그 진실을 견뎌내지 못한 채, 마사오미는 손아귀의 검은 깃털만을 있는 힘껏 그러쥐며 절규했다.

비명소리가 텅 빈 방 속에서 몇 번이고 울려퍼지는 가운데 핏자국이 남은 사과만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