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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검은방

[검은방3/승아태현강민]선전포고

여승아에게는 문병인이 온다

 

한 명은 그녀의 연인인 류태현. 약 3년전에 일어난 사건을 계기로 경찰이 된 그는 마음의 병을 얻어 목소리를 잃어버린 그녀에게 자신의 일상을 이야기한다. 음주단속을 하다 걸린 사람의 우습지도 않은 변명이라거나, 동료 경관의 끝을 모르는 애인자랑, 건널목을 건너가면서 한쪽 손을 번쩍 들어올리는 유치원생들의 모습 등등…. 이렇게 매일같이 병문안을 오고 또 한참동안 반응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일이 귀찮아지거나 지겨워질 법도 하건만, 그는 그런 기색 하나 없이 그녀의 곁을 찾아와 그녀의 마음을 지탱해준다.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가.
여승아는 그에게 미소짓는다.

다른 한 명은 생명의 은인인 하무열 형사. 3년 전의 그 사건에서 처음으로 만나 부상을 입으면서도 그들을 도와주었던 그는 그때 입은 부상때문에 사이버수사대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익숙치 못한 분야의 일로 머리가 복잡할텐데도 그는 언제나 바람처럼 병실에 나타나 승아에게 이런저런 충고와 다정한 위로를 건네고는 사라진다. 분명 그 사건으로 인해 지울 수 없는 그림자를 떠안게 되어버린 자신과 태현이를 마음 속 깊이 신경써주고 있는 것이리라.


이 얼마나 감사한 사람인가.
그녀는 하무열에게 미소짓는다.

…여기에서만 끝난다면, 여승아의 입원생활은 그럭저럭 순조롭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그녀를 찾아오는 문병인은 이 두 사람 말고도 또 한 사람 더 존재했다. 하무열이 방문하지 않는 날에 류태현이 병문안을 오지 않는 시간대를 노려 홀연하게 모습을 나타나는, 결코 달갑지 않은 불청객.


"안녕하세요, 여승아씨."

……………허강민.

"오늘도 목소리는 안나오나 봐?"
"……."

승아는 아무 말 없이 종이와 펜을 그러쥐었다. 좀전까지만 해도 따스한 햇빛으로 가득 차 있어 조금 나른한 기운이 감돌았던 병실의 이미지는 이 남자의 등장으로 인해 여러 마리의 벌레가 사방을 기어다니고 있는듯한 꺼림칙함을 지닌 공간으로 변모해버린지 오래였다. 허강민은 그런 승아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큼성큼 병실 안으로 들어온 것으로도 모자라 침대 근처의 위문용 의자를 멋대로 끌어당겨 그 위에 다리를 꼬고 앉은 뒤 승아의 발치에 화려한 꽃바구니를 올려놓았다. 멀리에 있는데도 꽃이 머금고 있는 선명한 색채가 햇빛을 받아 눈아프게 빛나서, 승아는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어둠 사이에서 강민의 목소리가 귓가로 눅진하게 흘러들어왔다.


"근시일 내에 태현군을 데려갈거야. 이번엔 폐건물."

 

승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예상했던 말이지만, 그렇기에 듣고싶지 않았다. 그녀는 마른 침을 억지로 삼키며 그때까지 힘주어 부여잡고있던 종이와 펜을 의사소통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가까스로 손의 힘을 풀었다. 하지만 강민의 선언을 듣자마자 격렬하게 뛰고있는 심장박동이 펜을 쥔 그녀의 손끝까지 떨리게 만든 탓에, 종이에 써진 그녀의 글씨는 처음 글자를 배운 아이의 그것처럼 서툴게 비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글자가 그녀 자신의 심리상태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또, 그를 괴롭힐 생각인가요?]
"괴롭히는게 아냐. 이건 사랑이라구."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당신도, 사랑은 아니잖아?"

일순 병실에 침묵이 흐른다. 청각적 침묵의 제공자인 허강민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고, 시각적 침묵의 제공자인 여승아는 펜을 꽉 쥔 채 얼굴을 찌푸렸다. 새하얀 종이에 펜끝이 짓눌리면서 점차점차 아래로 가라앉아간다. 만약 지금 맨 위의 한장을 넘겨본다면 그 다음장에서 끝장까지 걸쳐 조그맣게 남아있는 펜자국을 볼 수 있겠지. 승아는 이를 꽉 악물고는 힘주어 꾹꾹 펜을 놀렸다.

 

[그게 무슨 의미죠?]

"말 그대로의 의미인데."

 

강민은 철제 의자 위에서 가벼운 기지개를 켜며 그대로 양팔을 머리 뒤로 깍지꼈다.

 

"내가 볼 때, 류태현과 여승아씨 사이에 있는건 애정이라기보다는 단순한 동지의식이야. 그날 그 백화점에서 일어난 사고에서 시작된 죄책감이라고나 할까. 그 매몰사고에서 자신들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있는 건 당신과 류태현뿐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거기다 당신은 류태현에게 목숨이 구해진 셈이니 미안해서라도 그를 버릴 수 없었을테고, 류태현은 류태현대로 구할 수도 있었던 내 동생을 버리고 당신을 구한 자신의 행위를 긍정하기 위해서라도 당신을 버리지 못했겠지. 당신이 목소리를 잃은 뒤에도 그가 뻔질나게 찾아오는 이유도 유일하게 자신의 고통을 알아줄 사람을 자기 쪽에서 먼저 버릴 수는 없기 때문- 아니겠어?"

 

거기까지 말한 허강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까지 말했으면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라고 주장하는 몸짓이었다. 너와 류태현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같은 죄의식을 품고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을 뿐이라고 못을 박아버리는 동작이었다. 그녀가 이다지도 자신을 위해주는 류태현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단순한 심리적 이해관계로 깍아내리는 행동이었다. 자신들이 겪었던 고통과 괴로움을 그저 그런 사실로 치부해버리는 몰지각한 행위였다. 여승아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분노를 느끼며 거칠게 펜을 움직였다. 힘을 이기지 못한 종이의 일부가 찢어져 나갔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으며 자신의 글자를 강민에게 들이댔다.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함부로 말하지 마]

 

"-세요"부분은 절묘하게 찢어져있었다.

 

"이런, 미안하게 됐군."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는 표정으로 말한 허강민이 다리를 바꿔 꼬았다.

승아는 문득 그의 얼굴에 펜을 찔러넣고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에 다시금 종이에 자신의 목소리를 적어넣었다.

전신의 힘을 쏟아부어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으로, 자신의 모든 힘과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종이에 대신 퍼붓듯이.

[당신이 아무리 그렇게 말하더라도, 태현이가 당신에게 넘어갈 일은 절대로 없어]
"글쎄 어떨까. 열번 찍어 안 넘어오는 나무는 없다고들 하잖아?"
[그건 당신 생각에 불과해요!!!!]
"나한테 올거야. 여승아씨. 난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보지 않으면 억지로 내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타입이고 사람은 대개 그런 적극적인 대쉬에 끌리게 마련이거든. 그리고 태현군은 이미 당신에게 충분히 할만큼 해줬잖아?"
[억지 부리지 마세요]

"억지가 아냐. 이건 사랑을 위한 노력이라고. …뭐, 당신처럼 그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아무 말없이 방긋방긋 웃어대기만 하는걸로 그의 연인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고있는 수동적인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어렵겠지."

 

[XXXXXXXXXXXXXX!!]
"아하하, 화났어? 사랑의 라이벌끼리 너무 피튀기게 굴지 말자구."

어울리지도 않는 소리를 하고는 자리에서 튕겨올라가듯 일어선다.
승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태현군은 반드시 내 연인이 될거야."
[그럴일없어요]
"그건 당신 생각이지."

강민은 히죽이 웃어보이고는 승아의 침대 테이블 위에 꽃바구니를 얹어두고 병실을 나갔다. 

승아는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그것을 내던져 버렸다. 

 

 

…진한 꽃내음이 숨통을 틀어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