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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검은방

[검은방3/승범태현]끊어낸 것이 다시 이어지다

-검은방3 트루엔딩 SIN 네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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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죄를 지었지만 살고싶습니다."

 

낡아빠진 웨딩홀에서 그는 그렇게 말했다. 물이 빠진 옷처럼 밋밋한 풍경 속에 색색으로 물든 풍선이 샹들리에에 매달리듯이 한데 뭉쳐 떠올라있었다. 눈에 확 들어오는 그 풍경의 대비만큼이나 태현의 말도 귓속에 푹 틀어박혔다. …아니다. 틀어박혔던 곳은 귀라기보다 좀 더 본질적인 부분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가슴이었고 심장이었으며 그 안에 잠들어있는 훨씬 치명적인 어떤 기관이었다. 승범은 숨이 꽉 졸리는 듯한 감각에 이를 악물었다. 태현에게 보이지 않도록 몰래 꽉 진 주먹은 엄지에 손톱을 박아드는 형태로 바뀌어있었다. 살고싶습니다. 승범은 웨딩홀에 울려퍼지던 태현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그래, 당신은 살아야 해."

 

중얼거린 말은 불꽃의 포효에 파묻힌다. 뜨거운 열기가 얼굴 피부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멀리서 무언가가 폭발하고 열기를 이기지 못한 유리창이 부서져나가는 폐건물의 맨 꼭대기 층에 우두커니 선 채, 승범은 의미없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3층에서 부순 수갑이 약간의 체인을 빼어 문 채 손목에서 서서히 달궈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불에 타 죽기 전에 화상을 입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머릿 속을 스쳐지나갔지만 그 이상의 위기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엉망이 되어버린 복수와 함께 여기서 사라질 것이다. 10년 전에 누나가 죽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서현진과 백건영을 죽인 이 건물에서, 앙금처럼 뭉쳐있는 어리석음과 회한만을 움켜쥔 자신에게는 그런 퇴장이 어울린다. 이곳에서 고통스럽게 타들어가서, 한 줌 재로 사라진다. 이렇게나 거대한 화형대라면 불이 꺼진 이후라도 유골조차 찾을 수 없으리라.

 

…어쩌면 수갑은 남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새까맣게 타들어간 폐허에서 홀로 빛나는 수갑 한쪽을 상상한 승범은 큭큭 웃었다. 열기와 연기가 폐로 치고들어와 기침인지 웃음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 조금 흠이긴 했지만, 어쨌든 웃었다. 메마른 입술과 최후의 순간까지 토해내어지지 못할 감정만을 끌어안은 채 아무런 의미없이 웃으며 수갑을 붙잡았다. 뜨거운 열기가 사나운 울음소리를 토해내며 손바닥을 물어뜯고 화끈거리는 통각이 뇌를 걷어찼지만 그래도 손을 떼지 않았다.

 

끊어진 수갑은 더 이상 그 누구와도 연결되어있지않다. 

한때나마 연결되어있던 사람은 이미 가버렸다.

그렇게 만든 것은 자기자신이었다.

그걸로 끝인 이야기다.

 

승범은 그렇게 되뇌이면서도 손목을 붙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거기에 무언가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매달려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문이 거칠게 열렸다.

 

 

폭발의 영향이라고 생각했던 승범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은ㅡ

 

"……………뭐야."

 

분명 지금쯤 건물 아래에 내려가 있어야 할 터인 류태현 순경이 그곳에 서있었다. 승범은 얼이 빠지는 기분을 느끼며 눈을 깜박였다. 죽음을 앞두고 보는 환각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불꽃이 춤추고 불티가 휘날리는 가운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남자는 틀림없는 본인이었다. 승범은 분노로 머리쪽에 피가 확 쏠리는 것을 느끼며 있는 힘껏 고함쳤다.

 

"미쳤어? 같이 자살한 속셈이야?!"

 

승범은 손목을 부여잡았던 손으로 허공을 가르며 세차게 발을 굴렀다. 낡은 방안의 어딘가에서 불길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언제 어떻게 무너져내릴지 모르는 그 위태로움에 괜시리 자신이 초조해지는 것을 느끼며 승범은 사납게 류태현을 노려보았다. 보통같았으면 어깨를 움츠렸을 그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는지 도리어 더욱 강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있었다.

 

"전 당신을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어디로 가는데? 저세상? 허튼 소리 말고 당장 꺼져!!"

 

자신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여기서 이렇게 타죽어도 괜찮다. 하지만 당신은 죽으면 안된다. 이미 두명이나 죽인 자신과는 달리 류태현 당신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 지었다 하더라도, 당신은 이미 그걸로 인해 충분히 괴로워했다. 허강민이라는 작자는 그것을 교묘히 이용해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 화형대에서 사라져. 여기는 당신같은 사람이 개죽음을 당해도 되는 장소가 아니야!!

 

…그런데도, 태현은 오히려 자신에게로 다가왔다.

승범은 한계까지 늘어나있던 분노가 어딘가로 튕겨나가는 허탈함을 느꼈다.

 

"…뭐야… 어째서 돌아온 거야…?"

"당신을 구하려고 왔습니다."

"………!!!"

 

승범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거기에 맞추듯이 태현이 한걸음 다가왔다. 처음 한 순간은 그가 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구해? 나를? 당신이? 뭐하러? 의문은 꼬리를 물듯 이어졌다. 그 사이에 자신이 무슨 말인가를 한 모양이지만 태현은 참 우직하게도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목욕탕에서 유리를 깼을 때는 깜짝 놀라서 미리 말 좀 하라도 투덜거렸던 주제에 어째서 이렇게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그딴 얼빠진 소리를 할 수 있는거지? 승범이 잠시 혼란스러워 하는 사이, 이번에는 태현이 승범에게 소리질렀다. 자신의 모든 것을 구겨담은 것 마냥 필사적인 외침이었다. 

 

"말하세요…!! 이대로, 개죽음 당하고 싶습니까? 정말로 이게 바라는 겁니까!!"

"……………."

 

목소리는 금방 나오지 않는다. 여러가지 감정들과 여태까지 봐왔던 죽음들이 서로 겹쳐졌다가 흐릿하게 사라져갔다. 죽은 누이와 복수에 대한 갈망, 시작점으로 살해된 백선교의 변호사와 어딘가가 억눌려있던 기묘한 고양감, 단말마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린 백건영과 공포에 질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다 목이 졸려 죽은 서현진은 복수를 달성했다는 쾌감보다는 묵직한 무게감만을 심장에 던져주었다. 죄를 잊고있던 민지은에 이르러서는 아예 죽이지도 못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백선교의 끄나풀에게 휘둘렸음을 알게되었을 때 남은 것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 힘들 정도의 무력감이었다. 그대로 마음을 정하려던 승범의 귓가에서 태현의 목소리가 또 다시 울려퍼졌다.

 

"저는 죄를 지었지만 살고싶습니다."

 

…이미 알고있는 말이다.

 

그 웨딩홀에서 자신의 무언가를 찔렀던 말이었다.

찔린 그 자국에서부터 무언지 모를 감정이 흘러넘치게 만들었던 말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을 죽이는 건 그만두자, 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말이었다.

 

그런 말이 어째서 이제와서 떠오르는 것인가.

 

승범은 눈부신 것을 보듯 태현을 쳐다보았다. 주위에서 붉은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면서 춤추는데도 그는 흔들림없이 서있었다. 내려다보고 있는데도 어쩐지 올려다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굳건하게 서있었다. 가슴과 심장보다 더 치명적이고 근본적인 부분에서 또 이름모를 감정이 스며나와 심장을 적시고 가슴에 스며들었다. 승범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검은 반쪽 어둠 저편에서 생전의 누이가 이쪽을 돌아보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로 손을 뻗는 대신에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살고싶어-

 

누이는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도 않고 저편으로 달려가서 사라졌다. 퍼뜩 고개를 들어올린 승범은 방의 한쪽에 달려있는 철창을 걷어차고있는 태현을 발견하고 아연해졌다. 여기는 5층이고 그런 높이에서 뛰어내렸다간 죽어버리거나 큰 부상을 입을게 명백하다. 하지만 승범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철창을 부순 태현은 그의 멱살을 붙잡고는 창 밖으로 몸을 기울였고, 그 행동에 순간적으로 주춤했던 승범은 곧 본능적으로 자신의 멱살을 붙잡고있는 태현의 몸을 단단히 껴안았다.

 

"…내가 '살고싶다'고 말하게 한 주제에,이딴 식으로 먼저 죽어버린다던가 하면 죽을 줄 알아…!!"

 

엉망으로 토해진 말에 태현이 무슨 반응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승범은 이를 악문 채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끔찍한 감각 속에서 그를 안고있는 팔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추락은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동안 귀를 스쳐지나가는 바람이 남기는 찢어지는 비명으로 시작해 아랫층에 자라나있던 나뭇가지등이 등과 팔을 긁어대다가 이윽고 둔중한 충격이 등허리를 후려치는 것으로 끝났고, 간신히 뜬 눈꺼풀 사이로 태현이 아무런 이상없이 자신에게 붙잡혀있다는 것을 확인한 승범은 안도섞인 한숨을 흘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의식이 가라앉기 전, 손목의 수갑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