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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언라이트(합작)

[공통된 한문장 합작]카렌우닝 : 끊어진 현

*글에 앞서 오른편의 브라우닝 봇(@Xbrowning_bot)에게서 소재를 얻어왔음을 밝힙니다.

*고어적인 표현이 약간 포함되어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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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사라진 지 정확히 스무 날 째 되는 밤이다….]

 

낡은 책방에서 싼 값에 사온 소설은「빗물 그림자 살인사건」이라는 멋들어진 제목까진 좋았지만 아무리 봐도 작위적인 증거와 턱없이 서투른 트릭, 감정적인 추리 끝에 지지부진한 결말을 맺었다. 책 말미에 다음 사건을 은근슬쩍 예고하는 글이 딸려있긴 했지만 작가가 스스로 한계를 알고 펜을 꺽었는지, 아니면 출판사 측에서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다음 권은 나오지 않았다. ‘당신‘의 정체는 물론이요 그(혹은 그녀)가 사라진 이유나 상황도 송두리째 실종된 셈이었다. 전작의 조잡한 완성도 때문에 뒷이야기를 기대하는 사람도 별로 없으리라. 브라우닝은 어쩌다 한 번씩 술에 취하거나, 혹은 그와 비슷한 감정상태가 되면 너절한 책등을 쓸어보곤 했다. 아무도 당신의 최후를 궁금해 하지 않는다. 아무도 당신을 신경 쓰지 않아. 중얼거리는 말은 혀 밑에서 씁쓸하게 고였 다.

 

지금은, 혀 밑에 핏물이 가득하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살점과 내장. 찢긴 혈관에서 샘솟은 피가 하얀 뼈를 적시는 이 비린내 나는 순간. 의식은 이미 둔탁해져서 하얗게 번뜩이던 통각의 칼날조차 놓쳐버린 지 오래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끊어진 것 또한 아니었다. 데이빗 브라우닝이라는 한 남자가 지금 현재진행형으로 살해당하고 있음을 주지시켜주려는 듯 불꽃처럼 튀어오르는 통각은 끔찍했지만 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잘려나간 손가락을 까딱할 수 없다. 비명을 지를 수도 없다. 사지가 찢겨나간 탐정. 배가 파헤쳐지는 탐정. 처참하게 죽어가는 탐정. 누가 이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을 찾아낼 수 있을까? 누가 이 비참한 죽음의 실체를 밝혀낼 수 있을까?

 

아무도 그럴 수 없어, 브라우닝.

 

풀려가는 동공으로 바라본 세계는 그저 흐물흐물하게 무너져갈 뿐이다. 살인자의 웃음소리인지 숨소리인지 모를 것이 갈 곳을 잃은 이명처럼 떠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이명은 더 높은 어딘가로 몸을 숨기고 세상은 모든 형체를 잃을 것이다. 흐르는 물처럼 고이기만 하는 통증도 멋대로 넘쳐 흘러가겠지. 그리고 데이빗 브라우닝은 죽는다. 죽어버린다. 아무것도 아닌 나날을 보낸 끝에 이름 모를 미친 살인귀에게 살점을 물어 뜯겨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어머니는 울지도 모른다. 마크가 그 어깨를 감싸안겠지. 특별할 것 없는 시민의 죽음을 마음 깊이 애도할 조문객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장례식조차 없어. 갈갈이 토막 난 네 시체는 남김없이 하수구에 버려질 테니까.

넌 그렇게 수많은 실종자 중의 한 명처럼 사라지는 거야.

 

…….

 

남자는 온 사방이 질척한 덩어리가 되버린 가운데 혼자 멀쩡히 서있었다. 패션이니 옷차림이니 하는 데에는 관심 없는데다 현재 죽음의 문턱을 넘기 직전인 브라우닝조차 눈여겨보게 될 정도로 산뜻한 복장이었다. 아니, 사실 복장 따위는 아무 상관 없다. 이 시간 이 장소에서 남자가 나타났다. 중요한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조개처럼 서서히 맞물리는 눈꺼풀 틈새에서 그가 웃었다.

 

데이빗 브라우닝. 너에게 선택의 시간을 주지.

 

하나는 살인귀의 손에 죽어 묘비도 무덤도 없이 오물 속에서 썩어가는 것.

또 하나는 나에게 영혼을 팔아 이 미친 살인귀를 산 채로 지옥에 보내는 것.

 

너는 어느 쪽을 택할 거지?

 

눈꺼풀은 단두대의 칼날처럼 단호하게 맞물렸다. 남자는 눈꺼풀 속에서 웃었다. 뱃 속을 헤집던 역겨운 감각이 사라진다. 대신 산 채로 불에 그슬린 살점이 역겹게 타들어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옥의 혹한에 얼어붙은 뼛조각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소리도 귓가를 어지러이 맴돌았다. 흐물흐물 녹아내린 근육과 내장은 형체를 잃고 어둠 속으로 추락한다. 오로지 우악스럽게 비틀린 신경만이 주변의 고통을 갈퀴처럼 긁어모을 억겁의 세월. 브라우닝은 멀리서 이름 모를 자의 비명소리가 메아리치는 것을 들으며 눈을 떴다. 방 저 편에선 살인귀의 비명소리를 머금은 져지가 노래하고 있었다.

 

“…자는 사람 면전에서 바이올린인가. 취미가 좋지 않군.”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당신에겐 무엇보다 감미로운 울림일텐데. 당신이 산채로 지옥에 처넣은 자의 비명소리니까.”

“꿈자리만 뒤숭숭해졌을 뿐이야.”

“기쁘지는 않은가?”

 

브라우닝은 대답하지 않았다. 몸을 누인 소파는 자신의 체온만큼 데워져 미지근했다. 그 어딘가에 기쁨이나 희열이 녹아있다고 한다면, 분명 지금쯤은 다 식어서 굳어버렸겠지. 얼마 남지 않은 기운을 끌어 모아 팔꿈치부터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사이 허리춤에 얹혀있던 책이 맥없이 추락한다. 옛날부터 책갈피를 끼우지도 않고 대충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어가며 읽던 책이다. 떨어져도 아쉬울 것은 없었지만 엎어진 책을 발견한 카렌베르크가 바이올린 연주까지 멈춘 것은 조금 의외였다.

 

“「빗물 그림자 살인사건」. 흐음, 오랜만에 보는군. 작가가 나랑 계약했었지.”

“계약?”

 

표지가 상당히 낡았음에도 불구하고 거뜬하게 제목을 읽어낸 카렌베르크가 손에 쥐어진 활로 정확히 책을 겨냥했다.

 

“「영혼을 팔아넘기는 대신 이 원고가 책으로 나오게 한다.」뭐, 심플하지. 하지만 정작 책이 나온 이후의 반응까지는 염두에 두지 않은 소원 탓에 몇 년 지나지 않아 자살해버렸어.”

“……자살이라.”

“악마까지 불러낸 것 치고는 허망한 죽음이지.”

“그럼 나는 왜 죽지 않지?”

 

현 위에 활을 얹으려던 우아한 자세 그대로, 카렌베르크의 눈이 그를 응시한다. 브라우닝은 탁하게 고여 있던 숨을 토해냈다. 이백년, 혹은 사백년 동안 켜켜이 쌓여있었을 숨결들.

 

“줄곧 신경 쓰였네. 나는 분명 내 영혼을 댓가로 그 남자를 지옥에 처박았어. 하지만 영혼을 팔아넘긴 뒤에도 나는 여전히 살아있고, 더불어 늙지도 죽지도 않아. 이건 어째서지? 나도 당신에게 영혼을 판 이상 어떤 식으로든 죽어야 하는 거 아닌가?”

 

브라우닝이 의혹을 쏟아낼 동안 카렌베르크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얼굴에 떠올라 있는 것은 낭패나 언짢은 기색이 아닌, 아주 얇고 얇은 초승달을 닮은 감정이었다. 언뜻 보기엔 신비해 보여도, 그 윤곽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을 바라보는 새카만 시선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연녹색 미소.

 

재밌군. 브라우닝.

 

당신, 자기가 아직도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생각해봐. 당신이 나와 처음 만난 뒤로 얼마나 되는 시간이 지났지? 백년? 이백년? 하지만 그건 동시에 백 일이나 이백 시간, 혹은 사백 초가 될 수 있지. 지금이 몇 월인지 기억해? 어제가 며칠인지는 생각나나? 물론 기억할 수 없겠지. 당신은 그날 눈꺼풀을 닫은 그 순간부터 내 안에 갇혔어. 그러니까 죽을 수도 늙을 수도 없지. 이미 다 끝났으니까.

 

“그럼… 나는 언젠가 그 살인귀처럼 되는 건가?”

 

초승달이 기울어진다. 브라우닝은 머리 뒤쪽에 달라붙어 머리를 휘저어대는 현기증에 최대한 저항하며 한 땀 한 땀 바늘을 박듯 제 말을 아로새겼다.

 

“그 남자, 분명 맨손으로 내 팔다릴 찢고 배를 엉망으로 헤집었어. 일반인은 결코 그렇게까지 하지 못해. 할 수 없다고 보는 게 맞지. 그렇지만 만약 그 남자가 당신과 영혼을 댓가로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면…….”

“이런, 얼굴을 마주한 상대의 과거 일을 꺼내는 건 좋지 않은 일인데. 그것도 당신과 나 같이 ‘긴밀한’ 사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이해해 줘야겠지?”

 

활대 끝이 필사적으로 현기증을 견디고 있는 브라우닝의 턱 끝을 짚고 끌어올린다. 마주보는 얼굴에 가득한 웃음은 자상한 마음을 가진 교사가 순수할 정도로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를 향해서나 지어보일 법한 표정이었다.

 

“당신은 버림받는 걸 두려워하는 모양이니.”

“…무슨 소리지?”

 

활대에 매달린 말총이 셔츠 위로 드러나 있는 브라우닝의 목을 천천히 긁는다. 그 별 것 아닌 마찰이 목덜미가 아닌 제 몸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자극하는 것만 같아, 브라우닝은 의식적으로 이를 꽉 악물었다. 카렌베르크의 말에 섣불리 반응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행동이었다.

 

“모르는 척 할 필요 없어. 나는 당신의 정신과 신체 뿐 만 아니라 기억감정추억관념감각취향사고방식을 모조리 넘겨받았으니까. 당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는 당연히 알고 있지. 아니면 인정하기 싫어서 눈을 돌리고 있었던 건가?”

“……나는, 버림받았던 적 따위 없어. 그런 걸 두려워 한 적도, 물론 없고.”

“제대로 된 추억을 쌓기도 전에 친아버지가 죽어버리고 어머니는 새로운 남자와 만나 재혼한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가 외로움을 느끼는 건 흔한 일이지. 게다가 탐정 일을 하면서 인간의 신뢰와 관계가 얼마나 쉽게 비틀리고 뒤집히는지 수없이 목격한 당신은 특별한 관계를 더없이 갈망하는 동시에 다른 누구보다도 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해. 그래서 나를 부르고, 선택한 거지.”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난 당신을 부른 적 따위 없어.”

“불렀어, 브라우닝. 어두운 골목에서 목을 졸리고 다리의 힘줄이 끊어져 산 채로 살이 찢기던 때를 떠올려 봐. 제 손으로 이 빌어먹을 살인자의 뇌를 휘젓고 핏줄을 다 뜯어내고 싶다고 절규했잖아. 그리고 더 깊은 곳에서는 자신을 해하는 이에게 철저하게 복수를 퍼붓고 채 피비린내가 가시지도 않은 손으로 이름을 불러주며 뜨겁게 끌어 안아줄 누군가를 찾고 있었지. 그래서 내가…….”

“카렌베르크, 논점을 흐리지 말게. 내가 묻고 싶은 건 하나야. 나는, 언젠가, 그 남자처럼 되는 건가?”

 

연주라도 하듯 연신 목덜미를 쓰다듬는 말총을 단호히 밀어내며 묻는다. 카렌베르크는 그 이상 강요하는 일 없이 활대를 거두었다. 습기 찬 손바닥 아래에서 쓸린 피부의 상처가 따끔거렸다.

 

“오늘따라 신경질적이로군.”

“……”

“난 당신의 영혼이 가진 빛깔이 마음에 들어. 내 심금을 울리거든. 그리고 난 내 마음에 든 예술품을 함부로 취급하지 않아. …이 정도면 대답이 됐나, 탐정?”

 

무엇을 알았겠는가. 그저 카렌베르크의 말을 듣자 결이 거친 나무처럼 술렁이고 어수선하던 마음이 잠시 사그러 들었을 뿐이다. 브라우닝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렌베르크는 다시 발을 돌려 건너편 자리로 돌아갔다. 아니,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카렌베르크는 사무소에서 밖으로 나가는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브라우닝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장에서 가시가 돋는다. 목이 타듯이 말라붙고 신경이 비틀렸다. 문을 나가기 직전 뒤를 돌아본 카렌베르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일이지? 브라우닝.”

“……아무것도 아닐세.”

 

도로 주저앉는 소파가 깊이 꺼진다. 카렌베르크는 안개 같은 미소만 남기고 문을 닫았다. 텅 빈 탐정 사무소에서 브라우닝은 어미의 살 속에 파묻힌 태아처럼 뭄을 웅크렸다. 겨우 한 사람이 빠져나갔을 뿐인데도 서늘한 한기가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외로운 것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았다. 혼자 지내는 것은 옛날부터 익숙하지 않았는가. 카렌베르크가 하는 말은 그저 제 과거를 대충 훑어보고 이리저리 얽어낸 말일 뿐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재혼은 자신에게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마크는 좋은 사람이다. 다만 가까이 하기가 어려웠을 뿐이다…. 이런저런 변명과 생각들로 허망함을 메우려 해도 한 번 벌어지기 시작한 새까만 구멍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내 구멍은 심장을 찢고 더운 피를 삼켜버렸다. 차갑게 식는 손끝을 잊으려 주먹을 꽉 쥐던 브라우닝은 어느새 제가 울고 있음을 알았다. 주먹으로 눈가를 비벼도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상처 입은 새끼처럼 헐떡이는 브라우닝의 얼굴에서 번진 눈물이 떨어져 허벅지를 적셨다. 브라우닝은 자신이 외로움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필사적으로 몸을 말았다. 떨어뜨린 책은 줍지도 않았다. 눈꺼풀 사이의 어둠엔 초승달이 없다. 누군가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아.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스무 번째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