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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언라이트(합작)

[얀데레 합작]워켄X브라우닝(워켄우닝) : Stockholm

http://erushica.dothome.co.kr  

 

“자네는 늘 다쳐서 오는군,”  

 “탐정 일을 하다보면 이래저래 싫은 일도 겪는 법이니까.”

 “그럼 좋은 일은 있나?”

 “…….”

 

 브라우닝은 대답 없이 새하얀 붕대가 감긴 손을 움찔거렸다. 별 것 아닌 추리와 추적의 산물인 상처투성이 팔에서부터 알콜 소독제의 아릿함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이 상처가 다 나으려면 며칠이 걸릴까. 또 그 며칠 동안 무슨 의뢰가 들어오고 어떤 꼴을 당하게 될까. 그런 것을 반추해보던 브라우닝은 상념을 몰아내려 어깨를 추스렸다.

 

“…다치는 일 없이 돈을 벌 수 있는 일거리가 들어온다면, 그게 좋은 일이지.”

 “세속적이로군. 자네와는 안 어울려.”

 

 그것이야말로 상대방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자동인형 이외에는 흥미를 가지지 않는 줄 알았건만 인간을 상대로 특정 행위가 어울린다느니 어울리지 않는다느니 하는 평가를 내릴 정도의 주관적인 '감정'을 품을 수도 있었단 말인가. 그동안 인간에 대해선 초연하다고만 생각했던 워켄을 의외의 눈으로 바라보던 브라우닝은 이윽고 그가 자신의 앞에 커피잔을 놓는 모습에 위화감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은 없나? 그, 도니타라는 아이.”

 “잠깐 심부름을 가서 없네. …왜, 만나고싶은가?”

 “그건 아니고…. 직접 타주다니 별일이다 싶어서.”

 “모든 일을 도니타에게만 맡기지는 않네. 커피 정도는 내가 탈 수 있어.”

 “아… 실례했네. 아무래도 처음 보는 광경이라….”

 

 하기사 자동인형의 제작자라고해서 커피를 끓이는 법을 모르란 법은 없다. 여기서 일부러 끓여준 것을 거절해봤자 괜히 분위기가 냉각될 뿐이라 고분고분 커피잔을 받아든 브라우닝은 컵에서부터 스며나오는 따스한 온기와 달짝지근한 향기에 한결 기분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잠기운을 억지로 쫓아내거나 머리를 가동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단순한 휴식을 위해 마시는 커피는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려던 브라우닝은 갑작스레 자신의 등 근육을 물어뜯는 섬찟한 통증-거기에는 도망치던 와중에 생긴 검붉은 피멍이 있다-을 참지 못하고 잔을 놓쳤다. 의자 가장자리에 맞아 튕겨나간 커피잔은 깨끗한 바닥 위에 다 마시지 못한 커피를 요란스레 흩뿌리며 산산조각났다.

  

 “이런….”

 “다치지는 않았나?”

 “나는 괜찮네. 그렇지만….”

 “신경쓰지 말게. 예비는 아직 많으니까.” 

 

 워켄은 엉거주춤 파편을 주으려는 브라우닝을 제지하고 부서진 찻잔에는 눈길도 주지 않으며 아까와 똑같은 무늬의 새 찻잔에 커피를 따라 내밀었다. 흡사 미세한 부분이 고장난 자동인형을 떠올리게 하는 워켄의 권유에 뒤늦은 부담감을 느끼는 브라우닝이었지만, 그렇다고 커피를 고사하자니 피로한 몸에 스미는 커피의 향기라던가 맛이 아까운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거절은 커녕 새로운 커피를 받아들고만 브라우닝은 그대로 잔을 기울이려던 찰나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워켄, 혹시 나에게 할 말 있나?”

 “할 말?”

 “아까부터 나를 계속 쳐다보길래.”

 “글쎄….”

  

 워켄은 말끝을 얼버무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창 바깥에서는 어슴푸레한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어제부터 거의 자지 못했군. 그런 생각을 하는 브라우닝의 귓가에 워켄의 나직한 목소리가 닿았다.

 

  “…브라우닝, 나는.”

 

 

 이어져야 할 말은 입술에 닿은 커피의 감촉과 함께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은 오히려 ‘자신이다. 가장자리가 검게 눌어붙은 기억과 함께 찾아드는 희뿌연 의식 속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린 브라우닝은 짙은 나른함 속에서 머리 위에 매달린 전등과 옅은 벽지를 바라보다 도로 눈을 감아버렸다. 아무래도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에 의식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컵을 깬 걸로도 모자라 의자에 앉은 채로 기절까지 해버리다니…. 자신을 여기까지 옮긴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워켄의 또 다른 인형이었을까? 아니면, 워켄 자신?)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치고 말았다며 몸을 뒤척이던 브라우닝은 자신의 몸에 감도는 어느 기묘한 위화감을 감지한 순간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서슬에 그의 몸을 덮고있던 시트가 부자연스레 뒤틀렸다.

 

  “…….”

 

 삐걱이는 동작으로 시트를 걷어내던 손이 멈추고 악물린 이 안쪽에서 숨이 뒤엉켰다. 길을 걷다 뒤늦게 자신의 시계나 모자가 제자리에 없음을 알아차린 사람이 느낄 법한 전울. 하지만 그 순간 브라우닝이 느낀 것은 고작 소지품이 없어졌다던가 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머리 위쪽 절반이 통째로 날아간 기분으로 붕대가 단단히 감겨있는 허벅지에 손을 뻗는다. 다리에선 소독약 냄새가 났고, 새하얀 붕대가 단단히 감겨있었으며, 고작해야 한 뼘의 살덩이가 몸에 간신히 매달려서, 마치 꿈틀거리는 벌레처럼, 비명처럼.

 

 브라우닝은 침대의 난간을 붙잡고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 식도 아래에서부터 끓어오른 비릿한 위액이 침과 섞이며 새하얀 타일에 툭툭 떨어져내리는 감각은 소름끼치도록 현실적이라, 도리어 이것이 꿈은 아닐까 하는 한 줌의 소망이 희번덕거렸다. 그 광기 어린 빛에 균형감각을 잃고 휘청이던 브라우닝은 어느 순간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기척도 없이 나타난 그림자는 눈에 몹시 익숙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괜찮은가? 브라우닝.”

 “워, 켄… 워켄, 워켄, 내, 내가, 내 다리, 가, 다리가, 지금, 이게.”

 “좀 혼란스러운 모양이군. 무리도 아니야.” 

 

 허파가 떨리고, 혀가 경련하는 가운데 금방이라도 어린 시절의 울음으로 변질되려는 호흡을 억누르며 발음하는 단어들이 제멋대로 튀어오른다. 위액에 쓸려 너절해진 절규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워켄은 장갑 낀 손을 들어 조금도 꺼리는 기색 없이 브라우닝의 얼굴을 닦아냈다. 얼굴을 적시는 눈물자국, 입가를 더럽히는 위액과 침을 닦아내는 것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한 장갑이 주인의 손에서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동안 시큼한 호흡을 거듭하며 겨우 정신을 추스린 브라우닝이 장갑의 말로를 바라보는 사이 근처의 의자를 끌어당겨 앉은 워켄이 브라우닝의 뺨을 맨손으로 어루만졌다.  

 

 “브라우닝, 진정했나? 내 말을 들을 수 있겠어?” 브라우닝은 쿨럭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들어주게. 조금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자네의 다리는 내가 잘랐네.”

  

 소망은 사후경련을 일으켰다. 시계 초침소리도 들리지 않는 방에서 주입된 ‘사실’의 밀도를 받아들이지 못한 의식이 무섭게 팽창했다. 아예 파열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와중에 ‘사실’의 망망대해를 떠돌던 ‘의문’ 하나가 입술에 닿을 수 있었던 것은 이제까지 그가 탐정으로서 살아온 시간이 낳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자네가…? 왜…?”

 “말했지 않은가. 나는 더 이상” “자네가” “다치는 걸” “바라지 않“ ”네.“ ”는다고.”

  

 그 순간 단절되어있던 커피잔의 기억과 목소리가 눈 앞의 워켄과 겹쳐져, 브라우닝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래, 분명 워켄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쑥스러움을 감추려 괜시리 커피를 마시던 자신은 이내 몰려오는 현기증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고….

 

 “어딘지 모를 장소에서 나도 모르는 사람이나 사정에 의해 다쳐서 돌아오는 자네를 보호하려면 궁극적으로는 이 방법 밖에 없다고 판단했네.”

  

 워켄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침착했다. 시계 초침소리 대신 그의 목소리가 규칙적으로 째깍이는 지경이었다. 브라우닝은 있는 힘껏 숨을 고르고 떨리는 손에서 얼굴을 들고 워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새하얗고 무기질적인 방 안에 서있는 흑발의 남자.

 

“미쳤군.”

  

 뱉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워켄은 분노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난 자네가 내 곁에 있기를 바랄 뿐이네.”

  

 그런 말이 전등 아래를 떠돌았다.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걸까. 워켄은 정말로 브라우닝이 자신의 곁에만 있는다면 -정확히는 자신의 지하 연구실에, 지만- 다른 어떤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식사나 물같은 기본적인 것은 물론 그가 원할 법한 기호적인 물건도 아낌없이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는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워켄도 물러서지 않아서, 신경질과 울음이 섞인 논쟁 끝에 겨우 하루에 두 개피를, 그것도 받자마자 피운다는 조건 하에 허락받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새장 안에 갇힌 새였다. 단순히 사방이 막힌 지하에 감금되어있을 뿐이라면 과거에 보았던 탐정소설을 되짚어 어떻게든 탈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브라우닝은 다리가 잘려있었고, 그런 그가 밖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은 날개 잘린 새가 남은 두 발로 잠긴 새장 문을 열어젖히고 탈출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즉, 자유와 맞바꾼 죽음이다. 조금 더 하드보일드한 성격의 탐정이라면 당연하다는 듯 그쪽을 선택할지도 모르지만, 브라우닝은 그 정도로 단호한 인품은 아니었다. 워켄이 지나가듯이 흘린, 언젠가 자네가 온건히 내 것이 되었다는 확신이 들면 다리를 달아주겠다는 말 또한 그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분명 워켄의 목소리와 눈은 끝없는 진심을 내비추고 있었지만 그것이 진심으로 이루어질 일을 두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단순히 브라우닝이 죽어서라도 여길 빠져나갈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던져놓은 미끼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어딘가의 명탐정처럼 눈짓이나 말투만으로 모든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결국 며칠간 끙끙대던 브라우닝이 내린 결정은 워켄의 말을 잠정적으로 믿어보면서 지낸다는, 실로 미적지근한 대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결정했다고 해서 잘려나간 다리에 대한 마음까지 차분히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한번 흔들리면서 균형을 잃은 내면의 감정들은 언뜻 차분하게 고여있다가도 하루가 머다하고 폭풍을 맞이한 바다처럼 뒤집히고 역류하며 비명을 질러대기 일쑤였고, 브라우닝은 그때마다 워켄이 구해온 책을 엉망으로 찢어버리거나 자신의 팔이나 손가락을 물어뜯어 자학하는 식으로 난동을 부리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다. 워켄은 워켄대로 따로 감시장치를 달아놓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속도로 그의 난동을 눈치채고 달려와 브라우닝을 꽉 껴안아주며 진정시키거나 혹은 약물을 주사해 강제로 그를 재우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약물은 대개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사용되었고, 대부분의 경우 워켄은 브라우닝이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이나 욕설, 혹은 두서없는 저주를 달게 받아들이며 참을성 있게 그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누군가의 다리를 자른 이가 보이기에는 지나치게 아가페적인 행동. 어쩌면 그는 발작을 멈춘 브라우닝을 안고 침대에서 함께 잠드는 것까지가 자신의 의무이자 권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언젠가 충동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브라우닝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자신에게 수갑이나 재갈을 채우거나 하루종일 진정제를 놓을 것을 권한 적도 있었다. 최소한 그렇게 해놓으면 자학이나 자살을 할 방법도 사라지고, 워켄 또한 번거롭게 자신을 감시하거나 일부러 귀한 피를 흘리며 자신을 치료해줄 수고를 덜테니까. 하지만 워켄은 그런 것으로 이 이상 브라우닝의 의식이나 신체를 속박할 생각은 없다며 일축해 버리고는 새로 사온 탐정 소설을 내밀었다. 흔한 제목을 하고있는 주제에 찢을 기운도 나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책이었다. 그래서 브라우닝은 오랫동안 그 책을 내버려두었다. 계속 내버려두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그 책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책장의 글자를 읽으며 워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것이 자신의 새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짓이란건 알고있었다. 그래도 읽었다. 워켄은 브라우닝의 그런 변화에 대해 호들갑스레 기뻐하지는 않았다. 다만 브라우닝의 곁에 앉은 채 그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나 책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는 소리를 가만히 들을 뿐이었다.

  

 뜻밖의 방문자가 찾아온 것은 소설의 결말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의 일이었다.

  

 그날따라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워켄을 의식하며 책등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브라우닝은 누군가가 문을 발길질하며 열어젖히는 소리를 듣고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여지껏 검은색과 남색과 하얀 가운만을 허락한 방 안에 너무나 생소한 붉은색과 찬란한 금빛이 바깥의 공기를 머금고 일렁였다.

 

 “역시 당신이었구나.”

 

 너구나. 브라우닝은 멍하니 생각했다. 워켄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워켄이 보이지 않기에 그녀가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거겠지. 예전에는 당연스레 알고있었던 그녀의 이름은 완전히 녹슬어 금방 기억나지 않았다. 한때는 그렇게나 가볍게 부를 수 있었는데. 브라우닝이 자신을 기억하거나 말거나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온 붉은 소녀는 그의 잘린 다리를 발견하고 거칠게 혀를 차며 그의 몸을 번쩍 들어올렸다. 다리가 없다고는 해도 중년에 가까운 남자의 몸이다. 소녀가 쉽게 들어올릴 수는 없을…테지만, 자동인형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그래, 이 아이는 자동인형이다. 머릿 속의 녹이 한 겹 떨어져나갔다.

  

 “여기서 나갈거니까 꽉 잡고있어.”

 “…나간다고?”

 “그럼 여기서 계속 있을 셈이야? …농담하지마.”

 

 소녀의 말에는 시퍼런 날이 서있었다. 그 말이 들을 때마다 녹슨 의식이 불꽃을 일으키며 강제로 깍여나가는 기분이었다. 나간다, 여기서 나간다. 그래, 그것이야말로 그가 마땅히 원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브라우닝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소설책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있었다. 주우러 가기에는, 약간 성가신 위치였다. 게다가 도피길에도 방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남기고 가기에는.

  

 “미안하지만… 저 책도 같이 가져갈 순 없을까?”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미안해. 하지만, 워켄이 준 물건이라….”

  

 왜 그 순간 그의 이름을 꺼냈던 것인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말투에 날이 서있기는 해도 나름 협조적이었던 소녀는 브라우닝의 말을 들은 순간 입을 꾹 다문 채 부서진 방문을 나가 좁고 길게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갔다. 역시 무리한 부탁이었을까. 하지만 이렇게 점점 멀어지는 것도 어쩐지 초조해서 견딜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의 일부를 저 안에 놓아두고 남긴 듯한 상실감. 혹은.

 

  “그렇게나 중요한 책이야?”

  

흔한 책이다. 흔한 탐정 소설이다. 별로 마음 뺏길 이유는 없다. 그냥 지나쳐버리면 그만이다. 그까짓게 뭐나 된다고, 정말이지, 아무런 특색 없는 탐정소설에 불과한데.

  

 “그럼 스스로 가져오지 그래?”

  

 허공에 내동댕이쳐지는 감각. 그것이 그녀로부터의 냉담한 반응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대던져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목제 계단의 모서리가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죽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흉악한 타격을 몇 번이고 받아내며 계단 맨 끝까지 굴러떨어진 브라우닝은 참으로 간만에 느끼는 물리적인 공포에 사시나무처럼 떨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좁고 어두운 계단 위에서 브라우닝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분노에 찬 붉은 여왕을 떠올리게 했다.

 

 “짜증나짜증나짜증나짜증나!! 네가 뭔데…!! 그냥 여기서 바로 죽어버려!!”

  

 여왕은 계단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며 브라우닝의 몸을 짓밟고 -명백히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거대한 낫을 꺼내들었다. 검은 날은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음울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기에 베이면 분명 그대로 끝장이겠지. 이것이 목적이었다면 왜 진작 이렇게 하지 않은 걸까. 묘하게 차분한 머리로 사소한 추리를 시도하던 브라우닝은 이내 그 방 안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어떤 이와 그녀와의 관계 사이에 자신이 어떤 의미로 얽혀있는지 깨닫고 피거품 섞인 숨을 토해냈다. 낫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를 향해 떨어져내렸다.

  

 그 다음에 보인 것은 소녀의 손을 무자비하게 뚫고 들어오는 두 개의 검은 침. 순식간에 붉은 여왕에서 상처 입은 소녀로 전락한 그녀가 채 울부짖을 틈도 없이 세 번째 침이 자비없이 가느다란 뒷목을 뚫고 들어갔다. 터져나오는 초록빛. 쓰러지는 붉은 색. 허공에서 사그라드는 음울한 흑빛. 그 너머로 달려온 워켄이 답지 않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브라우닝의 몸을 잡아 일으켰다. 코피와 찰과상, 내상 등으로 불거져 나온 피가 닥터의 옷깃을 더럽히는 가운데 워켄의 손목에서 흘러내린 피 또한 브라우닝의 입가로 뚝뚝 떨어져내렸다.

  

 “마시게. 어서!!”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비릿한 액체를 마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 안쪽에서 느껴지던 불쾌한 감축과 따끔거리던 통각이 사그라들어 한결 호흡이 편해진 브라우닝이 크게 숨을 토해내자, 그때까지 브라우닝을 부축한 채 피를 먹이던 워켄이 크게 안도하며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늦지 않아 다행이군….”

 “…워켄, 그 상처는.”

 “자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아픈 데는 더 없나?”

 “없네. 하지만 이 아이는….”

 “도니타는 강제로 전원을 끊었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자네가 죽어버렸을 거야.”

 “……소중한 조수, 아니었나…?”

  

 워켄은 일순 입술을 깨물고는 말을 이었다.

  

 “물론 소중하네. 그렇지만 자네를 죽이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어.”

 “……내가 그녀보다 소중한가?”

 “그 이상이네.”

  

엉망진창이다. 쓰러진 소녀는 질투했다. 다리가 잘린 남자는 우울하다. 다리를 자른 남자는 안도하고 있다. 배신당한 초록 피, 고통받는 붉은 피.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느껴지는 이 감정은, 도대체.

  

 “브라우닝.”

 

 이름을 불린 것만으로도 심장이 꿈틀거린다. 근욱과 혈관이 몸을 떨며 찌릿거리는 감각. 이것은 공포일까, 공포에 굳어지는 몸을, 작금의 현실을 제대로 인정하지 못한 의식이 멋대로 왜곡시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사막의 오아시스를 찾듯 그 다음 말을 갈망하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문득 귀를 막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그의 두 팔은 워켄의 팔에 가로막혀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워켄이다. 워켄이 모든 원인이다. 그것을 깨닫고, 브라우닝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자네를 사랑하고있네.”

  

 심장이 떨렸다. 절망때문인지 기쁨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샌가 이 새장 속에 가득 차 있는 그의 집착에 물들어 길들여진 것일까. 혼란스런 마음을 부둥켜안은 채, 브라우닝은 피로한 머리를 워켄의 어깨에 기대며 소녀의 치마폭 사이에서 튕겨져나온 자신의 총을 주워들었다. 자신을 바깥으로 데려간 뒤 쏘아죽일 생각이었을까? 지금에 와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아직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워켄의 품 속에서. 브라우닝은 천천히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팔을 뻗었다. 총구 너머, 쉼없이 경련하며 검은 침을 뽑아 겨누던 소녀의 눈동자에서 투명한 빛이 흘러내렸다.

  

 방아쇠는 당겨졌다. 총알은 충실히 제 역할을 다했다.

 차오르기 시작한 화약냄새 사이로 누군가가 고맙다고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