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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언라이트(합작)

[추모 합작]그룬왈드 파트 : 죽음은 재로, 재는 안식으로

http://collabowit.tistory.com/7

 

하나는 어릴 때부터 어린 짐승이나 불쌍한 이들을 죽이고 그 시체를 능욕한 죄.

둘은 그 죄로 추방된 이후에도 사악한 술수를 부려 제1왕자와 제2왕자를 살해하고 국왕의 건강을 크게 해친 혐의.

셋은 이러한 우환으로 나라가 근심에 가득 찬 사이 추방명령을 무시하고 돌아와 옥좌를 차지하여 민중과 왕실을 혼란스럽게 만든 죄.

넷은 유일한 왕위 계승자라는 위치를 이용해 살인을 저지르는 한편 스스로 전쟁에 나서는 왕자의 모습을 가장하여 민중을 기만한 죄.

다섯은 전쟁에서 불리해지자 아군의 병사도 버리고 도망쳐온 뒤에도 제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왕과 가신단의 목숨을 노려 나라의 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든 죄.

 

이상의 다섯 가지 죄가 너무나 악질적이고 악독하며 죄인에게 반성의 여지가 보이지 않으므로, 그 죄의 책임을 엄중히 물어 론즈브라우의 성(姓)과 온전한 몸으로 무덤에서 영면(永眠)할 권리를 박탈한다. 

 

=

  

참으로 요란한 판결이었다. 하기사 고작 하루 사이에 왕실을 이끌어가던 가신들을 몰살한 범인을 민중 앞에 내보내기 위해선 그만큼의 죄를 덮어씌우지 않으면 안되었으리라. 하지만 그런 식으로 민중의 눈을 한쪽으로 쏠리게 했다하여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죽은 가신들은 거만하긴 했지만 이 몇 년간 단순히 왕좌라는 이름의 병석에 앉아있기만 했던 왕을 대신했던 만큼 나라의 요소요소를 지배하는 실세가 되어있었다. 그런 그들이 순식간에 없어져 버릴 때 찾아오는 것은 경쟁자를 잃은 왕실의 안정이 아닌 지배자를 잃은 사회의 혼란. 거기에 절대악의 인물을 끼워넣어봤자 찾아올 혼란을 막을 수도, 속도를 늦출 수도 없다. 왕비가 그토록 중히 여겼던 유구한 역사, 빛나는 명예는 의식없는 왕의 마지막 한숨과 함께 끝을 고하겠지.

 

 아쉽지 않냐고 묻는다면, 물론 아쉬웠다. 즉위하기 전부터 알고 지냈던 오랜 친구가 아내를 얻고 자식을 낳으며 다스렸던 나라다. 언젠가 그의 자식이 나라를 물려받는다면 자신이 죽는 날까지 옆에서 충실히 보필할 생각 또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자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의식불명에 빠진 친우의 목숨도 잘해야 한 달 남짓. 왕비인 마루라는 아직 정정했지만, 그녀를 생각해서 혼란에 빠질게 뻔한 나라에 굳이 남아줄 정도의 친분이나 정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 미련 없이 성을 등졌다. 회의장의 가장 중앙에 앉힌 셋째 왕자는 사람이라기보다 무기물에 가까운 시선으로 그를 배웅했다. 살아있는 그를 본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지만, 자신이 한 행동에 후회는 없었다. 

 

“후회는 없다고?”

 

쉼없이 불어대는 거친 바람에 황량한 땅이 뒤집혀 날려가지 않도록 온갖 돌덩이가 대지를 짓누르고 있는 언덕. 구름이 잔뜩 끼어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어둔 땅을 걸어가던 두 명 중 한 명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갑주 아래에서 짓밟힌 돌조각들이 으드득 소리를 내며 으스러졌다.

  

“정말로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건가? 그룬왈드는 자신의 나라에서 사상 최악의 살육을 벌인 범죄자로서 처형당했다. 당신이 제때 막았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거야.”

“전하가 처형당하신 것은 나도 참으로 유감일세. 허나 분명 전하께선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좋으셨을테지.”

“궤변이다.”

“그렇게 생각하나?”

  

노인과 청년 사이에서 일방적으로 팽팽하게 당겨지던 대화는 숨 한 번 쉬기 어려울 정도로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람을 얻어맞고 산산히 흩어졌다. 장갑 낀 손으로 얼굴을 가려 간신히 날카로운 바람을 피하고 고개를 든 청년은 마치 이 이상의 논쟁을 거절한다는 듯 자신을 향해 굳건히 펼쳐진 주름진 손바닥을 발견하고 일순 어이없음을 느꼈으나, 뒤이어 무언가를 깨달은 듯 황급히 노인이 바라보는 곳을 돌아보았다. 까마귀 울음소리가 알알이 흩뿌려진 어둑어둑한 바위밭, 거친 바람의 틈바구니로 명백히 이질적인 덩어리가 보였다.

  

“브레이즈, 보이나?”

“…그래.”

“서두르는게 좋겠군. 전하는 오랫동안 방치되셨어.”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잰걸음으로 앞서나갔다. 브레이즈라 불린 붉은 갑주의 청년은 멀어지는 노인의 등과 얼룩처럼 시야에 달라붙어오는 검은 덩어리를 한참동안이나 쏘아보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힌때는 함께 싸웠던 옛 전우의 몰락한 모습을 마주한 애잔함이나 분노, 슬픔이 자신의 등을 꾹 눌렀기 때문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들을 배신하고 사냥하는 입장에 선 시점에서 그런 감상적인 감정을 곱씹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모욕에 가까웠다. 하지만, 하지만 저 시체는….

  

“로휀, 한 가지 묻고싶은게 있는데.”

“뭐지?”

저건 정말로 그룬왈드인가?”

“물론이다. 마지막으로 전하를 뵌 내가 증명하지.”

“…….”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다. 전(前) 왕족 그룬왈드 론즈브라우를 향한 판결은 그의 시신이 온전한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과 그가 왕족의 이름을 가지고 왕족의 명예와 함께 땅에 묻힐 권리를 박탈했다. 그에 따라 평범한 무덤에 묻히는 것도 인정받지 못하고 황량한 바위 언덕에 버려져 썩어가는 시체가 생전과 같은 모습을 유지하리란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마주한 그룬왈드의 상태는 브레이즈의 막연한 상상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악의적이었으며… 참담했다.

  

우선 팔이 없다. 다리가 없다. 한쪽만 없는게 아니다. 양쪽이 없다. 즉 사지가 잘려나갔다. 사지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남은 밑둥의 단면만이 처참했다. 검게 변색된 피를 머금고 몸을 둘둘 감은 붕대는 이미 너덜너덜. 가슴을 걸쳐 배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날카로운 단검 끝에서 탄생했을 법한 수많은 자상(刺傷) 또한 살점을 노리고 덤벼든 까마귀들이 물어뜯은 자국과 어우러져 차마 말로 하기 힘든 풍경을 만들어냈다. 거기에, 참수당한 머리. 자신보다 앞서간 로휀이 몸뚱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서 훨씬 작은 무언가를 집어드는 장면을 보며, 브레이즈는 자신이 싸구려 연극에 끌려들어온 듯한 위화감을 느꼈다. 누가 씌웠는지 모를 둔탁한 철가면은 죽은 이의 얼굴 전체를 감싸듯 들러붙어있었다.

  

“그 가면은 뭐지?”

“…죄인은 죽어서도 신분을 증명하지 못한다, 는 것이겠지. 협정심문관인 자네에겐 성가신 일이려나?”

“벗길 수는 없나?”

“무리일세. 가면 자체가 단단하게 붙어있는데다 떨어진 충격으로 모양이 일그러졌어.”

“…흠.”

  

눈을 의심하게 될 정도의 훼손 때문에 되도록이면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이래서야 한 발 물러날 수 밖에 없다. 그룬왈드의 머리로부터 시선을 돌려버린 브레이즈와 교대하듯이 자리를 이어받은 로휀이 짧은 기도문 같은 것을 읊기 시작한 사이 주변을 돌아보며 머리와 마찬가지로 어딘가에 떨어져있을 사지를 찾기 시작한 브레이즈였지만, 어째서인지 주변에 있는 것이라곤 까마귀와 바위 정도가 고작이었다. 결국 까마귀들의 시선과 거친 바람을 한 몸에 받은 보람도 없이 헛수고만 한 브레이즈가 다시 돌아왔을 때, 로휀은 하얀 천을 펼치고 한창 그룬왈드의 신체를 수습하고있던 참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었던 이가 그런 식으로 수습되는 장면을 보는 것은 몹시 기묘한 일이었지만… 어차피 브레이즈는 옛 동료들을 죽여온 배신자다. 이 풍경은 그동안 자신이 저질러온 숱한 ‘작업’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시체가 훼손된 적은 처음이었지만.

  

“…남은 팔다리가 보이지 않는군. 혹시 어디에 있는지 짐작가는 곳은 없나?”

“사지를 찾으려고? 무리일세. 그쪽은 트레이드 영구 요새의 폐허 더미 어딘가에 파묻혀 있으니까.”

  

까마귀가 울었다. 길게 울었다. 그 울음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그래서‘ 그가 로휀의 말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현실에 적용시키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어쩌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까마귀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그룬왈드는 죽어있었다. 로휀은 담담했다. 브레이즈는 찐득한 의구심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먼지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말은, 그룬왈드는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이미 이런 상태였다는 건가? 이런 몸으로 가신단을 죽였다고?”

“정확하네.”

“당신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아. 그룬왈드가 죄에 의한 처벌을 받기 이전에 이미 이런 상태였다면 죄를 저지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나.”

“하지만 전하는 그걸 원하셨지. 그래서 미력하나마 내가 도와드린 것이고.”

 

또, 까마귀가 울었다. 브레이즈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문득 떠오르는 것은 이 눈 앞의 노인과 서로 나누었던 이야기. (당신이 있었다면 막을 수 있었을런지도 몰라.) 당신이 있었다면. (처형당하신 것은 참으로 유감일세.) 처형. (허나 분명 전하께선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좋으셨을테지.) 그런 것 따위. (그래서 내가 도와드린 것이고) 그래서 내가. 도왔다.

 

 로휀은 자기 목에 드리워진 칼날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손이 멈추긴 했지만, 그것은 시체를 수습하는 일련의 작업이 대강 끝났기 때문이었다. 태양이 뜨지 않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짐짓 더운 한숨을 토해낸 뒤, 로휀은 슬쩍 고개를 움직여 브레이즈를 올려다보았다. 싸늘하게 갈린 검날은 아무래도 제 소유자의 눈빛보단 못했다.

 

“당신, 그룬왈드의 의지를 대신한다는 명목으로 가신들을 죽였나?”

“이런, 엉뚱한 오해를 심어버린 것 같군.”

 

노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브레이즈는 웃지 않았다.

 

“이런 노인이 무슨 힘이 있어 사람을 죽이겠나. 단지 왕년에는 엔지니어 기술을 배웠던 몸이라, 사지를 잃은 몸에 기계로 된 의수의족을 달아드리는 것 정도는 해드릴 수 있었을 뿐이네.”

“그것이 그룬왈드에게 당신이 해준 것이라고?”

“그래. …그것도 지금은 어딘가에 폐기처분된 모양이지만.”

“용케 붙잡히지 않았군. 공범으로 간주되어 문책당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뭐, 그때 나는 이미 성에 없었으니까.”

 

정신이 들었을 때 까마귀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새까만 벼락이 브레이즈의 등골을 후려쳤다. 이제 곧 비를 뿌리겠다는 구름의 경고가 허공의 습기가 되어 떠도는 가운데, 브레이즈는 검을 거두려했던 손에 더 깊은 감정을 실으며 노인의 옆얼굴을 직시했다.

 

“이미 알고있었군.”

 

전쟁통에 사지를 잃은 불행한 왕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성에는 왕자의 잃어버린 사지를 되살릴 수 있는 현자가 있었습니다. 왕자는 생각했습니다. 사지를 되찾으면 가신단을 죽여버리겠어. 이윽고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왕자는 계획대로 가신단을 모두 죽인 뒤 붙잡혀 사형당했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현자가 성에 남아있었다면 공범으로 함께 심판받았을 테지만, 그는 성에 없었습니다. 이미 왕자의 생각을 알아채고 도망친 뒤였기 때문입니다. 죄를 저지를 왕자를 내버려두고 도망쳤기 때문에.

  

그는 살았습니다.

  

“알고있었으면서도 자신의 안전을 위해 도망친건가?”

“진실로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다면 전하에게 의수의족을 달아드렸을 리 없지. 그건 이른바 내 최후의 봉공이었네.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네만.”

“누구라도 이해하지 못할거다. 그런 정신나간 소원을 알고있었으면서도 사지를 달아주고, 그래서 그룬왈드가 살육을 벌이고 그토록 끔찍하게 처형당해버렸는데도 정작 당신은 아무런 가책도 후회도 느끼지 않았다고? 믿을 수가 없군. 그러느니 차라리…!!"

"차라리, 뭔가? 사지를 달아주지 말았어야 했다고? 설령 달아주더라도 어떻게든 설득해서 그런 짓은 그만두게 해야했다고? …귀환하셨을 때의 전하는 단순히 사지를 잃었다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정도의 중상을 입은 상태셨네. 그런 상태에서 무리하게 목숨을 늘려봤자 의미가 없어. 몸에 갇힌 정신이 미쳐갈 뿐이지. 그렇다면 차라리.“

 

차라리.

원하는 바를 이루고 죽는 것이 낫다.

  

“…당신과는 이야기가 맞물리질 않는군.”

“그런가? 이 늙은이는 자네가 조금 이해되려는 참인데.”

“나를, 이해한다고?”

“그래.”

  

로휀은 어느샌가 브레이즈를 똑바로 마주보고 있었다. 길게 뻗은 백은검의 검날이 언제 목을 베어버릴지 알 수 없는 와중에도 올곧은 눈빛이 노인을 내려다보고 있는 브레이즈의 시선과 교차했다.

 

“판데모니움의 감시국에서 파견되어, 오염자들을 처리하는 일이 전부인 협정심문관이 표적의 죽음을 두고 이토록 집요하게 늙은이를 추궁하는 걸 보면 대충 감이 오지. 자네는 차라리 전하가 살아있어주길 바랐던 거 아닌가?

  

우레소리와 함께 차가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까마귀들이 젖은 날개를 털어냈다.

  

=

  

“No.20710713는 소용돌이의 영향으로 인해 미쳐있었다고 사료됩니다. 론즈브라우 국내의 재판기록을 봐도 자명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광증을 위장하고 공범을 통해 죽음을 가장한 다음 국외 어딘가로 도망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도 없었기에, 셉터의 회수와 시체의 신분확인을 각각 분담하여 수행했습니다. 그 결과 시신은 틀림없이 본인이었고 셉터 또한 성 내부에서 발견되었으므로 NO.20710713은 완전히 사망했다고 판단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번 작업도 깔끔하게 끝냈군요. 그런데….”

  

감시국원은 예의바른 태도와 차분한 목소리로 책상에 놓인 서류를 뒤적였다. 아마도 미흡한 부분을 찾아내어 그 부분을 지적하려는 것이리라. 신분확인의 신뢰성, 혹은 셉터 회수에 맥스 혼자만을 보낸 경솔함…. 속으로 이런저런 지적을 예측하며 대답을 궁리하던 브레이즈에게, 아니나다를까 걱정을 위장한 떠보기가 이어졌다.

  

“맥스를 시체 확인이 아닌 셉터 회수에 단독으로 보낸 건 어째서죠?”

“셉터는 오염자들 자신에게는 중요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물건입니다. 누군가가 빼돌리거나 그걸 두고 목숨을 걸고 싸울 가능성은 없으며, 만일 있더라도 협정심문관이 단독으로 물리칠 수 있는 수준이리라 판단했습니다.”

“기록을 보니 당신과 이번 오염자는 한때 동기였던데, 시체 확인에 괴로움은 없었습니까?”

“임무에 사적인 감정은 개입시키지 않습니다. 시신은 틀림없이 오염자 본인이었습니다.”

“시신의 훼손정도가 꽤 심했다고 하던데?”

“훼손된 부분은 처형시의 기록과도 일치합니다.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흐음… 다행이로군요. 사형당한 것이 본인이어서.”

 

 브레이즈는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불쾌함을 이기지 못하고 눈썹을 찌푸리거나 입술을 깨물지도 않았다. 서류를 뒤적여보던 상사는 조금 전의 대화로 보충설명은 충분하다고 판단했는지 앞으로도 완벽한 작업을 기대한다는 말과 함께 브레이즈를 방 바깥으로 내보냈다. 복도는 밝았다. 적어도 창문 하나 없는 방에 비하면 포용적인 태도였다. 창문을 따라 들어오는 햇빛의 무늬를 응시하던 브레이즈는 이내 깨끗하게 청소된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바탕 빗줄기가 휩쓸고 지나간 판데모니움의 거리는 평소보다 활기에 가득 차 있었다. 새파란 하늘, 붉은 벽돌,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녹음 가득한 가로수, 길가에 늘어선 가게의 주황색 입간판과 재잘대는 소녀들의 노란 꽃 장식, 갈색 모자를 쓰고 뛰어다니던 소년은 남색 그늘 아래서 땀을 식히고는 다시 저편으로 달려나갔다. 마치 이제까지는 세상 그 자체에 한 겹의 먼지가 쌓여있었다는 것 마냥 선명하게 몰아닥치는 색채 속을 다만 한결같이 걸어나가던 브레이즈는 어느 꽃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꽃집의 꽃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어서오세요, 무슨 꽃을 찾으시나요?”

 

자신의 가게 앞에서 멈춰선 브레이즈를 손님이라 생각했는지, 가게 안쪽에서 꽃다발을 손질하던 여성이 총총걸음으로 달려나왔다. 그녀가 말을 걸어온 뒤에도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며 여주인을 당황시킨 브레이즈는 멈춰섰을 때와 마찬가지로 덤덤하게 자리를 떠났다. 헛물만 켠 꽃집의 주인이 뭐 저런 이상한 손님이 있냐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지멘트에선 시신이 있는 장례식이 도리어 드물었다. 출동 전 까지만 해도 자신의 옆에 있던 대원이 괴물과 기이한 환경에 쫓기며 콜뱃에 귀환한 뒤에 주위를 돌아보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꿈에나 나올 법한 악몽이 아니라 살아있는 현실이었고, 모두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레지멘트의 운명이었다. 한때는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믿은 적도 있었다. 아마 모두가 그런 식으로 쓰디 쓴 운명을 받아들였으리라. 하지만 레지멘트는 그들 모두가 목숨을 바치기도 전에 무너졌다. 남은 잔해 사이에는 영광도 박수도 없었다.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은 스스로 무너지거나 협정심문관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브레이즈 또한 협점심문관의 가죽을 뒤집어 쓰고 몇 명이나 되는 전우들을 직접 죽였다. 발치에 몇 겹의 시신이 쌓였다. 장례식은 없었다. 시신은 있는데 장례식이 없었다. 만약 장례식이 있었다 해도 브레이즈에게 꽃을 바칠 자격 따위 없겠지만. 

 

그에게 주어진 임무란 오염자를 처리하고 셉터를 회수하는 것. 오직 그뿐이다. 그룬왈드의 경우에는 훼손의 정도가 심각해서 -솔직히 그렇게까지 신원 확인이 힘든 케이스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행여 모를 빈틈을 남기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한때 스스로 자신을 죽여도 좋다고 말했던 그가 그런 짓을 하면서까지 살아가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확인해봐야 했다. 그것 뿐이다. 고작 그것뿐인 이야기다. 그것을 그렇게 착각하다니. 

 

입가가 경련했다. 브레이즈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설령 여기서 후회한들, 자신이 꽃을 사서 바친들, 이미 죽어버린 그룬왈드에게 닿을 턱이 없다. 꿈에서조차 불가능하다. 확신은 햇살과 함께 따갑게 내리쬐었다. 브레이즈는 그렇게 한참동안 서있었다.

 

=

 

화장터 안에 준비되어있던 꽃을 한 송이 집어들고, 로휀은 관에 담긴 그룬왈드를 향해 다가갔다. 원래대로라면 왕가의 관례대로 꽃이 가득한 두터운 관과 함께 왕실의 묘지에 묻혀 누구도 방해 못 할 영원한 잠에 들어야 할 테지만, 동맹국과 제국 사이의 전쟁으로 사지를 잃은데 이어 모국에서조차 오명을 뒤집어쓰고 처형당한 왕자가 잠들 수 있는 땅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어찌어찌 왕자를 묻는다 하더라도 결국은 사지가 텅 비고 목이 잘린 시신이 관 속에 갇혀 오랜 시간 썩어갈 뿐. 로휀은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시체를 한 줌 재로 바꾸는 화장(火葬)이었다. 물론 불에 태운다고 해서 사라진 사지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전장의 불꽃과 폭발 사이로 사라져간 왕자의 팔다리에 대한 진혼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게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역시 썰렁하군요.” 

 

아무 대답도 돌려주지 않는 이에게 말을 건넨다. 사전에 아무 말 않고 시신을 불태워주기로 약속한 화장터 관리인은 마지막 인사를 하게 해달라는 로휀의 말에 되도록 짧게 끝내달라는 퉁명스런 대답과 함께 가마를 보러 뒤로 돌아가버렸다. 로휀 자신과 죽어버린 그룬왈드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공간은, 일국의 왕자였던 자의 마지막 장례식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삭막한 것이었다.

 

“전하의 지인이라던 그 자도 왔으면 좋았을텐데 말이죠.”

  

자신의 말에 잠깐 동요하는가 싶더니 “그건 당신의 뒤늦은 후회가 낳은 착각일 뿐이다. 자신의 과오를 남에게 덮어씌우지 말아줬으면 싶군.”라며 그대로 바람처럼 돌아가버린 협정심문관의 모습을 떠올리며, 로휀은 짤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인지도 몰랐다. 최후의 봉공으로서 그룬왈드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주고 떠나오긴 했지만, 이따금 마음이 덜걱거리는 순간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좀 더 다른 길은 없었을까 생각한 것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이 현실을 대변해주진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과, 그룬왈드가 내린 선택과 결정에 따라 일어난 결과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로휀이 일부러 그룬왈드의 시체를 수습하러 돌아온 것 또한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그러고보면 그 자, 결국 태자님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군요.”

  

굳이 시체를 뒤적이지 않더라도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을 생각해낸 것인지, 아니면 그룬왈드 론즈브라우라는 인물이 이런 연극을 벌이면서까지 자신의 죄로부터 도망치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단순히 경황 중에 잊어버리고 말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덕분에 로휀은 가면 아래의 부서지고 깨어진 얼굴을 끝까지 숨길 수 있었다. 부서진 턱. 찢겨져나간 왼쪽 눈. 간신히 남은 오른쪽 눈은 이미 심하게 부패해 그룬왈드가 마지막으로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그래도 그가 마지막까지 후회에 빠지는 일은 없었으리라 생각하며 끊어진 목덜미에 하얀 국화꽃을 조심스레 올려둔 로휀은 아무래도 모자라다는 기분을 떨치지 못하고 수염을 매만졌다. 빗소리는 쭉 이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기다리다 지친 관리인이 노인을 찾으러왔을 무렵, 로휀은 그에게 마지막 양해를 구하며 너덜너덜한 목덜미에 비스듬히 놓여있던 자신의 국화꽃 위에 또 다른 한 송이를 서로 엇갈리게 두었다. X자로 겹쳐진 초록줄기가 잘려나간 목을 조심스레 가린다. 새하얀 꽃송이가 검붉게 드러난 단면을 감싸안았다. 관리인이 말했다.

  

“꽃은 한 사람당 한 송이씩입니다만.”

“아, 한 송이는 사정상 여기에 오지 못한 사람 몫이네.”

  

관리인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어보이긴 했지만 곧 용인하지 못할 건 없다고 판단했는지 가마의 입구를 열고 천천히 그룬왈드의 시체가 담긴 관을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가마 안쪽에서 쉼없이 타오르는 불꽃의 빛이 관리인의 얼굴과 로휀의 얼굴에 어지럽게 반사되다가 두터운 철문 너머로 사라졌다. 

 

철컹. 

 

=

 

불타오르는 난로 속에 던져진 국화는 금새 본래의 형태를 잃고 새까맣게 말라비틀어져갔다.

브레이즈는 팔짱을 낀 채 묵묵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시체를 전부 태우고, 뼛조각과 뼛가루를 모아 작은 상자에 옮겨담자 비가 그치고 날이 밝아있었다. 마지막까지 비밀을 지켜줄 것을 부탁하며 관리인에게 약간의 돈을 건네준 뒤, 로휀은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작아진 그룬왈드를 안아들고 화장터를 나섰다. 나서는 길에 지난 밤 동안 내린 비로 수위가 불어난 강이 나타났다. 물살이 사나웠다. 로휀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품에서 자신이 벗거낸 그룬왈드의 철가면을 찾아내 수면을 향해 내던졌다. 가면은 아침햇살을 받아 둔탁하게 빛나며 허공을 가르다 풍덩 가라앉았다. 잠깐 일렁이던 파문은 급류에 떠밀려 사라졌다. 

 

“없어지니 속이 시원하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룬왈드의 대답은 없었다. 로휀은 다시 짐을 챙겨들고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