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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언라이트(합작)

[성유계 합작/브라우닝]탐정은 2시간 뒤에 눈뜬다

깊은 어둠에 가득 찬 공간에서 겨우 빠져나와 처음으로 성유계에 발을 디딘 브라우닝이 가장 먼저 목격했던 것은 그가 나타난 줄도 모르고 대치하고 있는 보라색과 붉은색의 소녀였다. 색깔을 제외하면 완전히 동일한 디자인의 드레스와 머리장식을 착용한 두 소녀는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고, 그 감각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말을 건 브라우닝은 자신을 돌아보는 살벌한 안광에 그만 그대로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뒤를 이으려했던 인사말과 급작스럽게 동원된 사과의 단어들이 충돌사고를 일으켜, 그가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고 허둥대는 사이 소녀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날선 목소리를 토해냈다.  


 


  “뭐야, 당신?” 

  “우릴 알아?”  

  “응? 아, 으음…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 어디선가 보지 않았나?”

  “안 봤는데?” 

  “기억도 안 나. 로브도 모르겠지?” “웍.” 

  “흥! 제 주인을 닮아서 딱 멍청한 개에게 뭘 물어봐? 하여간 그 개에 그 주인이라더니!” 

  “이… 짜증나는 여자가! 이 자리에서 당장 없애버리는 수가 있어!” 

  “닥쳐! 그 전에 쳐죽여줄테니!!” 


 


  순식간에 불붙은 도화선은 브라우닝이 어떻게 말릴 사이도 없이 타들어가 분위기를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타이밍 좋게 모습을 드러낸 성녀의 딸과 묘하게 생긴 소년의 중재가 아니었더라면 둘은 틀림없이 싸움을 시작했을 것이다. 때문에 십년감수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린 브라우닝이었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대체 생전에 무슨 원한을 졌는지, 소녀들은 마주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거리기 바빴던 것이다. 아니, 차라리 그냥 으르렁거리는 수준이면 나았으리라.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보통 인간 이상의 기능과 내구를 갖춘 '자동인형'인 소녀들이 싸움이라도 시작하는 날에는 일반적인 아이들이 투닥거리는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살이 찢어지고 피가 튀는 격렬한 소동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퀘스트나 듀얼 때문에 매번 바인더만 지켜볼 수 없는 노릇인 지시자가 브라우닝에게 두 사람의 브레이크 역할을 맡긴 것도 그 즈음의 일이었다. 


 


  그나마 초반에는 쉐리가 쏟아내는 자해 공격만 잘 피해내면서 상대적으로 공격 수단이 적은 도니타를 진정시키면 그럭저럭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다툼은 도니타의 레벨이 차곡차곡 높아지면서 점점 그 난이도를 더해갔고, 마침내 지시자가 도니타를 레어4까지 해방했을 무렵에는 거의 최상의 난이도에 이르고 말았다. 쉐리는 자신도 찾지 못한 과거의 기억을 되찾은 도니타를 부러워하면서도 지시자가 보이는 관심의 편차에 짜증을 내며 도니타에게 시비를 걸고, 도니타는 도니타대로 자신이 되찾은 기억에서 배어나오는 어둠에 대한 열등감과 공포, 그리고 그 사실을 모르고 마음 편하게 조잘거리기만 하는 쉐리에게 반발심을 느끼며 있는 힘껏 그녀를 비웃으니, 이래서야 화해는커녕 대화의 여지가 생길 여유도 없다. 덕분에 브라우닝은 두 사람을 화해시킨다기보다 싸움의 후폭풍으로 애꿎은 주변으로 불똥이 튀지 않도록 자신의 몸을 최대한 던지다시피하며 말리는 것이 일상이 되어있었다. 


 


  오늘도 그러했다. 쉐리와 도니타가 마주쳤고, 결코 가볍게 끝나지 않을 언쟁이 인사처럼 지나가자마자 로브가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세에 이를 갈며 뒤로 물러선 도니타가 정신을 개방한 순간 쉐리의 팔뚝에서 초록 액체가 흘러내리며 도니타의 몸에 상처를 냈고, 미처 데미지를 막아내지 못한 도니타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거대한 낫을 꺼내들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브라우닝이 서둘러 현장에 도착했을 땐 도니타가 로브를 발로 걷어차며 팔뚝을 움켜쥔 쉐리를 크게 베어내려던 순간이었다. 


 


  특수 섬유로 짜여진 코트는 근거리 공격까지는 흡수하지 못한다. 따라서 서류 가방으로 얼굴을 감싸며 도니타의 앞으로 뛰어든 브라우닝은 근육와 뼈 사이를 파고드는 싸늘한 칼날의 감촉을 느낀 다음에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영혼까지 베어내는 죽음의 일격이 서류 가방 따위에게 막힐 리가… 


 


  ………없는데. 


 


  한번 끊어졌던 의식이 떠오르는 풍선처럼 이어진다. 긴 숨을 내쉬며 의식의 끈을 붙잡은 브라우닝은 이내 온 몸을 비트는 둔통과 어지럼증에 신음했다. 제 아무리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고 해도 자기가 받은 공격으로 인한 고통까지 송두리째 덜어가 주지는 않는다. 몸뿐만 아니라 의식도 누군가가 마음대로 주무르는 듯한 감각에 오랫동안 끙끙대던 브라우닝은 머리맡에 어디선가 많이 본 실루엣이 앉아있다는 것을 깨닫고 간신히 한쪽 눈을 열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지시자는 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레 앉아 무릎 맡에 펼쳐놓은 바인더 북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새로운 덱 편성에 대해서 고민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그가 막연히 생각하는 사이 책장을 넘겨보던 지시자가 고개를 들었다. 


 


  “일어났네.”

  “아아… 지시자는 무슨 일로 내 방에 있나?”

  “좀 생각할게 있어서.” 


 


  그렇게 말하고는 도로 시선을 내린다. 부글거리던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아가는 것을 느끼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브라우닝은 지시자의 손끝이 바인더 북을 초조하게 두드리는 모습을 발견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굳이 나를 덱에 넣어 데리고 다니려고 하지 않아도 되네.”

  “……딱히 브라우닝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던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시자는 바인더 북을 닫아버리고 턱을 괸 채 브라우닝을 쳐다보았다, 성녀의 힘이 깃들어져 만들어졌다는 인형은 기본적으로 무표정하면서도 이따금 깜짝 놀랄 정도로 생동적인 표정을 지을 때가 있다. 브라우닝은 여느 인간 못지않은 복잡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시자를 마주보며 지금이 바로 그런 때라고 생각했다. 


 


  “쉐리랑 도니타, 매번 싸우지. 그렇게까지 밉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난 잘 모르겠어.”

  “나도 잘 모르겠네.” 


 


  기억을 잃고 자신의 호오에만 의존하여 남을 판단해야하는 성유계에서도 그 둘의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주변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돌진하여 한 대 두들겨 패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을 정도의 미움. 어쩌면 그것은 그 아이들이 어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마주치면 싸우지는 않더라도 주변 반경에 노골적인 살의를 퍼뜨리는 인물도 몇몇 있으니까. 그 대표격인 검은 태자와 하얀 장군의 모습을 떠올리던 브라우닝은 이어지는 지시자의 말에 의식을 집중했다.  


 


  “브라우닝은 내가 밉지 않아?”

  “전혀.”

  “쉐리랑 도니타도?”

  “적당히 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지만, 그렇게까지 밉지는 않은걸.”

  “어째서?”

  “그 아이들은 싸우는 것만 아는게 아니니까.” 


 


  약간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은 채 지시자에게 웃어보이던 브라우닝은 자신의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를 듣고 들어와도 좋다고 말하며 천천히 상체를 들어올렸다. 조심스레 열린 문 사이로 로브를 껴안고 들어온 쉐리가 브라우닝의 침대 맡에 앉아있는 지시자를 보고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야, 지시자도 있었네?”

  “잠깐 생각할게 있어서. 자리 비켜줄까?”

  “됐어! 내가 무슨 고백이라도 하러 온 줄 알아?” 


 


  팩, 하고 돌아간 고개가 셔츠와 바지만 입은 채 반쯤 몸을 일으키고 있는 브라우닝을 향한다. 그 모습에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쉐리는 이내 로브를 안은 자세 그대로 입을 열었다. 


 


  “멀쩡한 것 같네.”

  “그래. 쉐리는 어때?”

  “뭘 내 걱정을 하고있어? 웃기네 아저씨. 그런 식으로 주제도 모르고 계속 끼어드니까 이 꼴이 나지.”

  “신랄하구나….”

  “싫으면 다음부턴 끼어들지 말던가. 하여간 귀찮아죽겠다니까.” 


 


  정말로 짜증난다는 듯이 발로 바닥을 걷어차고, 쉐리는 빙글 몸을 돌려 방을 나가버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지시자가 입을 연 것은 쉐리가 문을 닫고 멀어져간 다음이었다. 


 


  “일부러 찾아와서 저런 소리라니.”

  “둘 다 표현하는게 서툴러서 말이지.”

  “…로브까지 그런 줄은 몰랐는데.”

  “아, 실수했군. 내 말은….” 


 


  쾅. 


 


  문을 걷어차는 소리가 브라우닝의 말을 튕겨낸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휘둥그레 한 눈을 하고 굳어있던 브라우닝은 이내 무언가를 이해한 듯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고리를 돌려 열어젖힌 문가에는 그에게 더없이 익숙한 서류 가방이 놓여 있었다. 흠집은 보이지 않는다. 한 손으로 문틀을 짚으며 어렵사리 가방을 들어 올린 브라우닝은 복도 저 편에서 이쪽을 훔쳐보고 있는 금빛 갈래머리를 발견하고 감사와 자신의 무사함을 표현하려 살짝 손을 흔들어보였지만, 그 손짓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인기척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언제쯤 저 아이와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요원하게만 느껴지는 생각과 함께 방 안으로 몸을 돌리려던 브라우닝은 어느 사이엔가 자신의 발치에 바싹 붙어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지시자를 발견했다. 


 


  “방금 그거, 도니타였지. …그걸 돌려주려고 문을 걷어찬 거야?”

  “그렇겠지.”

  “서투른게 아니라 그냥 난폭한 것 같은데.”

  “하하…. 익숙해지면 별 것 아니야.”

  “매번 말리려고 뛰어들었다가 기절하는 것도?”

  “일상이지.”

  “…역시 모르겠어. 그건 일상이라는 말로 넘어갈 수 있는 거야?”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있던 지시자는 불시에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주치기만 하면 어떤 식으로든 다투는 자동인형 자매는 이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무사를 확인하고 돌아가고,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 제대로 표현되지 않을 뿐인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기는 충분하다. 그렇기에 둘의 싸움을 말리러 뛰어들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시키면 좋을까 고민하던 브라우닝은 문득 가방의 실루엣이 부자연스럽게 부풀어 있음을 깨닫고 서툴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가방 안에는 자신이 넣은 적 없는 붕대 하나가 마구잡이로 쑤셔넣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