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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언라이트(합작)

[비틀림 합작/그룬왈드]타나토스에 녹스는 눈동자

그룬왈드에게 있어 어머니란 초상화 속의 존재였다. 붉은 소파, 고급스러운 드레스, 틀어올려 고정시킨 은발에 매끈하게 드러난 목을 사파이어 목걸이로 장식한 채 성의 어딘가에서 생긋이 웃고있는 여인. 그룬왈드를 낳으며 심각한 난산을 겪는 바람에 몸의 건강을 해쳤다고 하는 그녀는 성 안 깊은 곳의 내실에서 조용히 요양을 취해야만 하는 처지였고, 때문에 친자식인 그룬왈드조차 마음대로 그녀를 만나러 갈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중한 상태라 해도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황은 어딘가 이상하다. 그룬왈드가 막연히 그것을 깨달은 것은 그가 막 철이 들기 시작한 늦겨울 날이었다. 그날따라 무서울 정도로 새파랗던 하늘과 유달리 싸늘하게 휘감기던 바람이 모정에 대한 굶주림을 자극했던 것일까, 무작정 정원의 흰 꽃 몇 송이를 꺽어들고 그녀가 있을 내실을 찾아 성 안쪽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그룬왈드를 지켜보는 초상화는 변함없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는 처음이지요?”

 “…네.”



 감색 제복의 하녀는 왕비와 셋째 왕자 앞에 차와 다과를 내려두고는 공손하게 물러났다. 정원에 피어난 색색의 꽃만큼이나 화려한 다과와는 대조적으로 새하얀 바탕에 앙증맞은 푸른 꽃 몇 송이가 그려진 찻잔 안에서 붉은 기 도는 액체가 찰랑였다. 그 모습에서 문득 떠오른 핏물의 이미지를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으며, 그룬왈드는 잠자코 홍차를 입에 머금었다. 봄날의 햇살만큼이나 따끈한 액체가 목구멍을 적시며 흘러내려가고, 이름 모를 새가 수다스레 지저귀는 소리에 잠깐 시선을 돌린 왕비가 이내 작게 웃으며 살짝 흘러내린 은발을 귀 뒤로 쓸어넘겼다.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정자의 그림자가 티 테이블을 가로지르며 그녀와 그룬왈드의 얼굴에 기묘한 음영을 드리웠다.


 “그때는 정말 놀랐어요. 그렇게 갑자기 찾아올 줄이야….”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미 지나간 일인걸.”

 

 

 왕비의 미소는 맑았다. 언젠가 흰 꽃의 그룬왈드가 조심스레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말을 걸었을 때 새된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위병을 불렀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녀의 절규는 갑작스런 소란에 달려온 하인 중 한 명이 급하게 그의 몸을 잡아 방 바깥으로 끌어낸 뒤에야 가까스로 멎었고, 그 서슬에 그룬왈드가 기껏 준비했던 하얀 꽃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왕비의 방에 떨어졌거나 했겠지. 하지만 지금 그때의 일을 입 밖에 냈다간 모처럼 만나게 된 어머니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 것 같아, 그룬왈드는 잠자코 다과를 씹어 삼켰다.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말을 한 마디라도 잘못 했다가는 지금 이 자리로 영원히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초조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테이블 아래의 발이 쉴 새 없이 꼼지락거렸지만, 왕비는 그에 대해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연 것은 티 포트가 상당히 가벼워지고 준비된 다과도 반절 이상 줄어든 다음의 일이었다.

 


 “그룬왈드, 다음에도 여기로 올 수 있겠어요?”

 “올 수 있습니다. …어머니.”

 "그래요, 그럼 다음에.“

 

 

 왕비는 그룬왈드가 머뭇머뭇 덧붙인 마지막 단어에 가벼운 웃음을 띄우고는 그의 뺨을 쓰다듬어주었다. 여지껏 텅 빈 마음으로만 살아왔던 그룬왈드는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레어서 좀처럼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렇다, 그녀는 그의 ‘어머니’였다. 그가 늘상 부르곤 하던 ‘유모’나 ‘하녀’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감을 지니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람.

 

 

 (그룬왈드.)

 

 

 그녀가 불렀던 자신의 이름이 아득하게 메아리친다. 그 울림을 쫓듯 몸을 웅크린 채 배게에 깊게 얼굴을 묻던 그룬왈드는 이내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지으며 어렴풋이 잠들었다. 그 모습을 누군가가 보았더라면 분명 왕비의 초상화를 떠올렸으리라.

 

 

 왕비와 그룬왈드의 티타임은 그 이후로도 멀리서 지저귀는 새 소리와 나비의 팔랑임, 일렁이는 찻물의 움직임을 배경 삼아 몇 번이고 이어졌다. 비명도, 핏물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도 없는 평화로운 만남의 시간. 불어오는 바람은 부드럽고 시간은 느긋하게 지나간다. 여느 과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달콤한 다과를 한 두개 몰래 옷에 숨겨가려던 것을 왕비에게 들킨 적도 있었다. 그때 왕비는 과자로 옷을 더럽히면 안된다며 그를 타이르면서도 그가 방으로 돌아가는 사이 하녀를 시켜 그룬왈드의 방에 바구니에 담은 다과 몇 개를 보내주었고, 처음으로 어머니의 손을 통해 받은 선물을 단숨에 먹어버릴 수는 없었던 그룬왈드는 잠들기 전에만 살짝 귀퉁이를 베어물며 다과회의 기억을 천천히 떠올리곤 했다. 두근거리는 가슴과 약간의 현기증을 품은 채 자신의 기억 속 왕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깊게 잠들 수 있었으니까. 이제 그에게 어머니란 더 이상 초상화 속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살아있었고, 웃고 있었고, 그의 이름을 불렀고, 그에게 어머니라고 불렸으며….

 

 

 그의 목도 조를 수 있었다.

 

 

 빗소리와 짙은 그림자를 뒤집어 쓴 실루엣이 거친 숨을 내쉰다. 초상화 속에서, 정자의 티 테이블 너머에서 그를 바라보던 이와 동일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흐트러진 그녀의 모습에 일순 이 모든 것이 꿈이라 생각한 그룬왈드였지만, 빗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낮은 속삭임과 함께 그의 목을 착실하게 조여오는 끈의 감촉은 꿈의 산물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선명했다. 꿈이라면 깨어나기를, 그리고 만약 현실이라면 크게 잘못된 무언가가 원래대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며, 그룬왈드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공포와 고통 속에서 왕비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바로 그제 있었던 때와 같이, 그녀가 미소 지으며 자신에게 작은 호의를 베풀어주기를 처절하게 바라면서,

 

 

 하지만 고개를 푹 숙인 채 흡사 그룬왈드의 목을 비틀어버릴 듯한 기세로 끈을 조이고 있는 그녀가 무언의 구조요청을 깨닫는 일은 없었다. 그녀가 반쯤 쉰 목소리로 속살거리는 언어들만이 저 먼 곳의 우레소리처럼 낮게 우르릉거릴 뿐이었다. 이대로 그녀를 향해 애원해도 아무것도 닿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그룬왈드는 즉시 손의 방향을 바꿔 자신의 목을 조르는 끈을 마구잡이로 긁어대며 발버둥치기 시작했고, 그때까지 그룬왈드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자신의 할 일에만 매달리던 왕비가 퍼뜩 고개를 들어 그룬왈드를 마주보았다. 방을 감싸는 짙은 어둠 속에서 둘의 시선이 뒤얽히는 것과 동시에 왕비에게서 히스테릭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제 그만해!”

 

 

 일순 편해지는가 싶던 호흡은 뺨을 후려치는 손길에 의해 도로 틀어막혔다. 일시적으로 얼이 나간 그룬왈드가 얼얼한 뺨을 어루만지기는커녕 호흡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얼어붙어있는 사이, 끈을 버리고 두 손으로 가느다란 목을 조르기 시작한 왕비는 이내 열에 들뜬 사람처럼 큭큭 웃기 시작했다. 여느 모로 보나 정상은 아닌 모습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가 목을 감싼 자세가 약간 서투른 탓에 웃음을 토할 때마다 조금씩이나마 숨을 들이마실 수 있다는 것일까. 그대로 아침까지 버텨낼 수 있다면 질식사로 목숨을 잃는 일은 없겠지만, 그런 아득한 시간을 버텨내기에는 정신적인 한계에 도달해있던 그룬왈드는 폐부를 얼음 칼로 갈기갈기 찢어내는 듯한 절망감을 참지 못하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싫, 어…….”

 

 

 어느 것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따스한 햇살 아래 다과와 차가 있던 정자와 어두운 비구름에 감싸인 방안에서의 질식은 너무나도 달랐으니까. 아니면 그 웃음은 처음부터 거짓이고 사실은 처음부터 어머니는 죽 자신을 미워하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그 웃음과 햇빛과 온기와 어머니가 있던 나날의 무엇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룬왈드는 자신의 목을 조르는 왕비의 손목을 있는 힘껏 움켜쥐며 히끅였다. 하지만 어른과 아이의 차이가 그런 걸로 메워질 리가 없다. 자신의 손에 짓눌려 거의 실신하기 직전의 그룬왈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왕비는 이윽고 낮게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괜찮아, 그룬왈드.”

 

 

 방금 전의 히스테릭한 소리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평온한 울림이 몸을 울린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고 재울 수 있는 여성 특유의 목소리에서 희미한 희망을 발견하고 필사적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그룬왈드의 시야 속에서 왕비의 텅 빈 유리구슬같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전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점성을 가지고 귓가로 흘러드는 목소리에 그룬왈드의 숨이 멈춘다. 눈꺼풀이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한 왕비의 얼굴에선 그 어떤 후회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그 시선을 마주하는 자신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쥐어뜯기고 다시 채워지는 기분이 들어, 그룬왈드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목을 조르는 손은 떨어지지 않는다. 아니, 목에서 어머니의 온기가 떠나지 않는 것인가. 습기를 머금어 축축하게 식어있는 공기 사이로 떠오른 생각은 자신을 뒤덮고 있는 어머니의 체온에 진득히 녹아내렸다.

 


 “너도 알고 있지?”

 

 

 빗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눈꼬리에 고여있던 눈물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르륵 흘러내려 귓가를 적셨다. 슬픈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정말이지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넘쳐흐르는 사랑과, 썩어들어갈 정도의 애정과, 굶주린 모정과,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러니까.”



 산소가 부족한 탓인지 의식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다만 들려오는 어머니의 나직한 웃음소리에, 그룬왈드는 흐느끼듯이 웃었다. 이다지도 다정한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기뻐하지 않을 자식은 없다. 그것이 맹목적인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아아, 진작부터 ‘사랑’받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회한 섞인 생각은 무의미하게 벌려진 입술의 허무함과 마지막까지 악을 쓰며 경련하는 심장의 움직임과 함께 검은 베일 사이로 끝없이 추락했다. 까무룩한 낮잠을 닮은 현기증이 어머니에게 매달려있던 손의 감각까지 집어삼키고….

 

 

 “왕자님!”

 

 

 멋없는 외침이 어둠 속에서 빙글빙글 맴돌던 의식을 강제로 끌어올린다.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올린 그룬왈드는 자신의 정면에서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있는 하인을 본 채 만 채 하며 괴로워 하는 개의 몸을 더욱 세게 껴안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미간을 찌푸렸을 감촉을 음미하기라도 하듯 이리저리 방향과 각도를 바꿔보던 그룬왈드는 이내 어느 쪽도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개의 몸을 내던졌고, 쿨럭이는 소리를 내며 바다에 쓰러진 개는 길게 빼문 혀를 추스르지도 못하며 비틀비틀 도망쳤다.

 

 

 “무슨, 무슨 짓을 하신건가요?”

 “…그냥.”

 

 

 굳이 하인에게 설명을 해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새파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하인을 등진 채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룬왈드는 침대에 풀썩 드러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그 감각도 아니다. 어머니가 자신의 목을 조였을 때 느꼈던 감각은 그런 물컹하고 기분 나쁜 것이 아니었다. 좀 더 섬세하고, 치밀하고, 농밀하며, 위압적이기까지 하던 ‘애정’.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마음이 떨릴 정도로 강렬한 ‘사랑’을 되새김질하던 그룬왈드는 깊은 상실감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그룬왈드의 목을 졸랐던 그 날 밤 왕비는 목을 매달고 자살했다. 그대로 모자 나란히 죽음의 신을 만나야 했겠지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룬왈드는 그만 의식을 되찾아버리고 말았다. 터무니없는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왕비가 사라진 지금, 가신과 왕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어머니를 미치게 만든 아이’라며 그룬왈드를 멀리할 뿐이니까. 이제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다. 그걸 안 이후로 무언가를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그룬왈드였지만. 그 어떤 죽음도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주었던 ‘애정‘만큼 가슴을 채워주지는 않았다. 도리어 텅 빈 구멍이 속수무책으로 벌어져갈 뿐이었다. 죽은 어머니가 저승에서 살아돌아오기라도 하지 않는 한, 구멍은 계속해서 커지리라.

 


 “…….”

 

 

 문득 떠올린다. 이제는 멀게만 느껴지는 봄날의 다과회에서 향긋한 냄새를 풍기던 색색의 과자들과 함께 마주보고 앉아있던 어머니와 자신. 다과를 먹는 자신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필경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겠지. 누구보다도 사랑해주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 안에 독을 바르고, 돌아가는 그의 손아귀에 그것을 몇 개씩 쥐어주며.



 어서, 죽어달라고.



 창 밖에서 여름 매미가 울부짖는 소리가 이어진다. 눈도 깜박이지 않으며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있던 그룬왈드는 불현듯 늙은 개의 최후를 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벌덕 몸을 일으켰다. 허리에 매단 검을 걸걱이며 걸어가는 그 눈동자에 여느 아이들과 같은 생기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