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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언라이트(합작)

[극중극 합작]콥&워켄&브라우닝


http://rmarbf.tistory.com/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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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다. 천장에 매달린 조명은 동그랗게 빛났다. 자신과, 마룻바닥과, 쓰러진 누군가의 창백한 손만 비춰지는 세계. 거친 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리다 문득 손을 본다. 검붉게 물들어 끈적한 손. 자신이 저지른 죄의 증거. 살인의 증거. 거친 숨결은 흐느끼는 듯 하다가 처절한 웃음소리가 되어 흩날렸다.

 

“그래, 이런 거였나, 전부 이런 의미였어…!! 무엇 하나 나는 시나리오에서 벗어나지 못한거야!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시나리오라도 네놈들은….”

 

다 낡은 TV에서나 나올 법한 노이즈가 콥의 말을 삼켜간다. 천장의 조명은 깜박거리더니 완전히 나가버리고 말았다. 새까만 공간에 차오르는 노이즈 사이에서 언뜻언뜻 넘실대던 목소리는 미닫이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뚝 끊어졌다. 노이즈 또한 그랬다. 한동안 기분 나쁜 바람소리만이 이어지고…….

 

다시 환하게 불이 켜진다. 깔끔한 느낌의 거실에는 남자 한 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을 뿐이다. 열려있는 베란다 문 사이로 멀리서 울려 퍼지는 사람들의 비명과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쓰러져있던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의 먼지를 터는 그 모습은 조금 전까지 죽어있던 남자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이윽고 그는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여기는 E301. 루트 2601의 경로에 따라 통제 불가능한 변수를 처리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는 시나리오대로 사망했습니다. 이제부터 보충요인의 공급을 시작하겠습니다.”

 

남자는 전화를 끊은 뒤 다시 어딘가로 전화를 걸며 방을 나간다. 텅 빈 거실 바닥에 남은 핏자국만이 선명했다.

 

 

“오케이, 컷!”

 

 

감독의 목소리와 동시에 억눌려있던 소음이 왁자하게 터져 나온다. 이번에도 또 NG가 터지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하던 콥은 그제사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지금은 몇 시쯤 됐을까. 어두컴컴한 스튜디오는 시간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근처의 조명에 자신의 손목을 비춰보던 콥은 자신이 촬영 시작 전에 손목시계를 벗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내고 별 수 없이 누군가 시간을 알 법할 스탭을 찾았다. 때마침 저편에서 면식이 있는 작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콥씨,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다음 촬영 때도 잘 부탁해요!”

“작가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몇 시쯤 됐나요?”

“지금요? 어디 보자…. 저녁 아홉시네요!”

 

 

핸드폰의 새파란 불빛을 받으며 작가가 싱긋 웃는다. 물론 연예계서 저녁 아홉시에 촬영이 끝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감독의 변덕이나 배우들의 컨디션, 장면의 종류나 소품의 상태에 따라 촬영시간이 늘어나는 것쯤이야 이 업계에선 가을날 부는 바람만큼이나 흔한 일이니까. 문제는 그 ‘흔한’ 일이 하필이면 오늘 일어났다는 것이었지만… 그런 것을 애꿎은 작가에게 말해봤자 서로 곤란해질 뿐이다. 콥은 적당한 인사를 남기곤 서둘러 스튜디오를 빠져나와 대기실로 달려갔다. 약속시간에 늦긴 했지만 상황설명을 한 뒤 바로 달려간다면 아직 만회할 찬스는 있다. 급한 마음에 입고 있던 셔츠를 대충 푸르며 대기실로 뛰어든 콥은 소파에 모로 누워있는 아이를 발견하고 손을 멈췄다.

 

 

“볼랜드?”

“앗, 콥 형아! 촬영 끝났어?”

“그래. 근데 넌 왜 여기 있어?”

“나도 방금 촬영 끝났어. 아빠한테 전화하니까 형이랑 같이 오래.”

“늦게 끝났네. 많이 기다렸냐? 저녁은 먹었고?”

“별로 안 기다렸어! 좀 전에 형네 코디 누나가 맛난 거도 사줬는걸.”

“좋겠네. 형 잠깐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아이스크림 사주면.”

“알았다, 얌전하게 있으면 사줄게.”

“앗싸!”

 

 

소파에 누운 채로 기뻐하는 볼랜드를 번쩍 들어 올려 자리에 제대로 앉혀놓은 뒤, 콥은 탈의실에서 옷을 마저 갈아입으며 핸드폰에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화면에 소복히 쌓여있는 부재중 전화의 가장 윗쪽에 볼랜드를 부탁하는 문자가 턱하니 올라앉아있었다. 바지를 꿰어 입으며 뒤늦게나마 발신인을 향해 전화를 건 콥은 건너편의 목소리가 자신이 기대하던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당황해 목소리를 높였다.

 

 

“잠깐만, 왜 네가 받아?”

“브라우닝은 잠깐 자리 비웠어. 넌 지금 끝났냐? 보모씨.”

“보모……!! ……그래, 지금 끝났다.”

“최대한 빨리 오는 게 좋을걸. 존경하는 선배님에, 그 선배님의 아들이잖아?”

“알고 있어. 선배님에게 늦어서 죄송하다고 전해줘.”

“나 같으면 차라리 브라우닝이 돌아오기 전에 도착하겠다고 할 텐데. 아무튼 서둘러라.”

 

 

뭐라고 반론하거나 말을 붙이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통화가 끊어진다. 화면을 멀뚱히 쳐다보던 콥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마저 옷을 갈아입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 따지기에는 시간도 부족하거니와 별 의미도 없는 짓이었다.

 

 

=

 

 

결과적으로 콥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무렵 볼랜드는 이미 깊이 곯아떨어져 있었다. 본래 10시 무렵에 잠들던 아이다. 오늘의 촬영은 평소보다 힘겨웠는지도 몰랐다. 제법 묵직한 몸을 안아들고 자동개폐식 현관 앞으로 다가선 콥은 행여나 볼랜드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팔을 뻗어 버튼을 눌렀다. 호수를 누르고 호출 버튼을 누르자 들리는 목소리는 예상대로 자신의 핸드폰에서 들은 것과 똑같았다.

 

 

“늦었다.”

“알아.”

 

 

문은 무뚝뚝한 기계음과 동시에 열렸다. 종종걸음치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 콥은 제법 싸한 공기에 몸을 떨며 볼랜드를 안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초대받은 장소까지 올라가기 위해선 제법 묵직한 귀울음도 견뎌야했다. 연신 마른 침을 삼키며 엘리베이터를 내린 콥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선배님!”

“어서와 콥. 볼랜드는 잠들었나 보네?”

“아, 네. 죄송합니다. 제가 늦게 오는 바람에….”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뭘. 들어와. 워켄도 기다리고 있었어.”

 

 

브라우닝을 따라 들어간 집 안은 따뜻하고, 희미하게 베이컨 냄새가 났다. 찬 바람에 식어있던 피부를 뭉근하게 감싸는 온기에 몸을 푸르르 떠는 콥의 품 안에서 볼랜드가 몸을 꼬물거렸다. 깬건가, 싶지만 딱히 그 외에는 반응이 없다. 멀뚱히 볼랜드의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응시하던 콥은 자신의 품 안으로 파고드는 브라우닝의 팔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대로 껴안아진다…는 착각도 잠시, 잠결에도 용케 제 아비의 손길을 알아차리고 흡사 고양이처럼 매달리는 아이의 이마에 짧은 키스를 남기며 건넛편 방으로 사라지는 브라우닝을 멍하니 쳐다보던 콥은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헝크려뜨렸다. 그 뒤쪽에서 캔맥주 따는 소리가 났다.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거냐?”

“……워켄…….”

 

 

주방 근처의 테이블에 앉아있는 것은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동기였다. 촬영 때마다 늘상 착용하는 긴 가발 대신 평소의 숏컷 상태로 앉아있는 워켄의 주변에는 텅 빈 맥주캔이 가득했다.

 

 

“닥터가 이렇게 잔뜩 마셔도 되냐?”

“마피아 보스가 애를 보는데 뭐가 어때서?”

 

 

실없이 던진 농담 사이로 날아드는 캔맥주를 받아들고 비어있는 자리에 앉는다. 뒤이어 부엌으로 돌아온 브라우닝이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으며 캔맥주를 홀짝이고 있는 콥을 돌아보았다.

 

 

“혹시 버섯이나 베이컨에 알레르기 있어?”

“없습니다.”

“잘됐네. 이 시간쯤 되면 배고프겠지 싶어서 미리 만들어 둔 게 있거든.”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괜찮아. 매번 볼랜드가 신세지고 있는걸. 볼랜드와 페어가 된 게 콥이라서 다행이야.”

“그야 뭐… 아직 어리니까요. 어린애를 다루는 데는 익숙하고.”

“그래? 전에 네가 애새끼들은 엉덩이를 걷어 차버리고 싶다고 한 것 같은데.”

“야!!”

 

 

이 미친 놈아!! 간신히 뒷말을 눌러 참고 눈치를 살피던 콥 앞에서 뜻밖에도 브라우닝이 웃음을 터뜨렸다. 의외의 반응에 콥이 멍해진 사이 워켄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그가 콥의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면 콥은 그 쌍둥이와도 피붙이 사이였지? 그, 이블린이랑 브라우…던가?”

“알고 계셨나요?”

“전에 언라이트 촬영장에 갔을 때 들었네. 워켄의 가발을 트윈 테일로 묶어놓다가 들켰거든.”

“…돌아가면 확실하게 혼내겠습니다.”

“아냐, 벌써 내가 타일렀으니까 그럴 필요 없어. 그 나이대 아이들이 장난치는 건 그만큼 관심을 끌고 싶다는 뜻이거든.”

 

 

아뇨, 그 둘은 그냥 사람들이 곤란해 하는 얼굴을 보고 낄낄대는 걸 좋아할 뿐입니다…라고 말하기에는 브라우닝의 표정이 너무 평화로워서, 콥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캔맥주를 기울였다. 촬영에 열중해있느라 몰랐던 갈증 사이로 맥주가 스며드는 감각은 꽤나 시원스러운 것이라 단숨에 한 캔이 비었다. 안주로 나온 베이컨 버섯 볶음도 훌륭했다. 간간히 일 애기를 하며 이런저런 잡담을 나눈지 얼마나 되는 시간이 흘렀을까, 평소 술을 좋아하는 사람 답지 않게 맥주캔 하나를 홀짝이던 브라우닝이 약간 침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콥. 내가 자네에게 할 말이 있는데…….”

“할 말이요?”

“응, 그게… 말이지, 이런 식으로 묻는 건 자네에게도 실례겠네만… 자네는 볼랜드를 얼마만큼 좋아하나?”

 

 

콥은 얼어붙었다. 순간 악질적인 몰래 카메라가 떠올랐지만 어두운 표정으로 연신 마른 세수를 하고 있는 브라우닝이 농담이나 장난으로 그런 말을 건넸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의도란 말인가. 꼼짝도 못하고 시계 초침소리만 세고 있는 콥의 곁에서 큰 한숨소리가 들리더니 워켄이 대신 입을 열었다.

 

 

“브라우닝은 자신이 없어진 후에도 네가 볼랜드를 돌봐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거야.”

“없어진 후……라니? 선배님 어디 해외로 촬영가시나요?”

 

 

대답은 불길할 정도로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브라우닝은 아예 깍지 낀 손 아래에 얼굴을 숨긴 채 말이 없었다. 콥은 언젠가 자신과 함께 연기하던 배우가 자택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모두가 저런 얼굴과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브라우닝이 그때와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가?

 

 

“전에 브라우닝이 정기검진 받으러 갔던거 기억해?”

 

 

기억하고 있었다.

 

 

“진단 나왔어. 뇌종양이야. 그것도 악성. 2기 말기. 당장 수술 받고 항암치료 병행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 실제로 수술을 받아도 살 수 있을지는 모르고.”

“……무슨 그런 농담을….”

“농담 아냐. 브라우닝은, 죽을지도 모른다고.”

 

 

워켄의 손에서 맥주캔이 처참하게 일그러진다. 콥은 문득 이 모든 것이 우스꽝스러운 연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브라우닝을 돌아보았다가 조금 전까지 움츠러들어있던 그의 얼굴에 떠오른 서툰 미소를 보고 비명을 삼켰다. 자기 심장이 찢겨나가는데도 남을 안도시키려는 사람은 으레 저런 식으로 웃는다. 마치 그림자에 가려진 꽃처럼. 이제 곧 부서질 석고상처럼. 그걸 믿고 싶지 않아서, 콥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배.”

“아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서둘러서 입원하고 수술을 받으면 살아날 가능성도 분명 있다고 했으니. 하지만 말야,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만약의 일이 생기면, 아직 어린 볼랜드가 걱정이라….”

“…….”

“볼랜드는 자네를 형처럼 따라. 혼자……가 되더라도, 자네가 쭉 곁에 있어주면 분명….”

“어째서… 제가 그런 소릴 들어야 하는 겁니까.”

 

 

빠져나온 말은 의외로 냉정했다. 온몸의 혈관은 버석하게 말라붙어 잔바람에 몸을 떨었다. 제정신이냐, 콥. 워켄이 낮게 중얼거리는 것을 브라우닝이 한 손을 들어 막는다. 콥은 피비린내 번지도록 입술을 꽉 깨물고는 제 심장을 갈퀴로 긁어내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고작 저에게 그런 이야길 하시려고 저를 부르신 겁니까? 선배가 죽고, 볼랜드가 남겨질테니까 저더러 대신 신경 써달라는 그런 얘길 하시려구요? 정말 친절하시네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조만간 선배가 사라질 거라고 코앞에서 말해봤자 아무런 정리도 안 된다고요!!"

“콥.”

 

 

브라우닝의 목소리는 낮은 파도처럼 밀려와 간신히 쌓아올린 감정들을 모조리 무너뜨리고 사라졌다. 콥은 견디지 못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버렸다. 얼굴은 취기인지 뭔지 모를 것으로 뜨거웠다. 문득, 그 열기를 누군가의 심장에 발라 생명을 양도할 수 있다면 제 몸이 얼어붙어 깨진데도 상관없으리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지만.

 

 

“젠장, 저는…… 선배가 죽는단 소리 따위 듣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래도 자네가 알아줬으면 했네. 어차피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지. 나도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필요한 대비는 해두는 게 맞는 일일거야.”

“…….”

“받아들이기 힘들 거란 건 알고 있네. 하지만 자네가 내 죽음에 대해서 언론의 기사나 업계의 뒷소문으로 알게 되는 건 바라지 않았어. ……이해해줄 수 있나?”

“…잔인한 소릴 하시네요.”

 

 

여기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들 브라우닝의 병세는 변하지 않는다. 현실이라는 것은 아무리 보지 않고 부정하려 해도 결국엔 등 뒤까지 성큼 다가와 있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싫어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오그라붙은 마음을 칼로 찢어내서라도 바람이 통하게 하지 않으면 그보다 더 잔인한 후회가 쉴 새 없이 가슴을 난도질하는 법이다. 그걸 수없이 되씹고, 삼키고, 다시 되씹기를 몇 번이고 반복한 끝에 콥은 겨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마지막 낙엽을 떨군 나뭇가지의 흔들림만큼이나 미미한 동작이었지만 브라우닝에게는 그걸로 충분했을 것이다.

 

 

“고맙네. 그리고… 미안하네,”

“…….”

 

 

목소리를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슬그머니 새어나오는 눈물을 도로 돌려보내지도 못하고 뚝뚝 흘리며 한참을 훌쩍이던 콥은 어느샌가 자신의 눈 앞에 들이밀어진 갈색 봉투를 발견하고 흐릿한 눈을 들었다. 발신인은 꽤 복잡한 이름을 가진 병원이었다. 수신인은 데이빗 브라우닝. 물기에 젖어 제 기능을 못하는 머리로 둘 사이의 상관관계를 생각해내려던 콥이 결국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한 채 봉투를 내민 장본인을 바라보자 워켄이 덤덤히 말했다.

 

 

“이번에 브라우닝 앞으로 온 건감검진 결과표다. 네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해.”

“워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보게 해주세요.”

“……그래.”

 

 

브라우닝은 알겠다는 표정으로 손을 거뒀다. 갈색 봉투 안에는 그리 많은 종이가 들어있진 않았다. 진정은 했지만 여전히 참담한 마음으로 종이를 하나하나 넘겨보던 콥은 어느새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종이를 다 읽었다는 것을 알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결과지를 다시 한 번 읽기 시작했다. 만약을 위해서 문장 하나하나를 다시 꼼꼼하게 읽는다. 이번에도 종이는 금새 바닥을 드러냈다. 콥은 침묵했고, 브라우닝이나 워켄도 물론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침묵에는 분명 아까와는 다른 성질의 불온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선배.”

“응.”

“죄송하지만… 여기엔 뇌종양이라는 말이 없는데요.”

“응, 없어.”

“…….”

“…….”

“……선배, 설마.”

 

 

설마.

 

 

“절 속이신 겁니까?!”

 

“미안! 워켄이 콥은 의외로 눈물이 많은 성격이라길래!”

“워케에에엔!!! 이 빌어먹을 자식아! 네가 원인이냐!!”

“시끄러워. 그러게 누가 늦게 오랬냐? 그리고 속아 넘어간 사람도 잘못이야.”

“나보다 한참 선배인 사람의 연기를 꿰뚫어 보는 게 더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여지껏 팽팽히 당겨져있던 신경줄이 단숨에 끊어져버린 탓인지 머리까지 띵하니 아파온다. 관자놀이를 움켜쥔 채로 한동안 워켄과 말싸움을 벌이는 콥과 사양 없이 도발을 받아들여 거침없이 상대하는 워켄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듯 브라우닝이 꺼내온 것은 제법 비싸 보이는 술이었다. 각자의 앞에 놓인 유리잔에 호박색 액체가 찰랑찰랑 차올랐다.

 

 

“콥, 미안하네. 사과의 의미로는 모자라겠지만 한 잔 받아주겠지?”

“……선배가 주시는 잔인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워켄은 이 잔 마시면 콥에게 사과할거지?”

“이런 비싼 술을 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하는 건 너무한데, 브라우닝.”

“할거지?”

“……알겠습니다.”

 

 

공손히 잔을 받는 콥과 마지못해 승낙하는 워켄에 이어 자신의 잔을 채운 뒤, 브라우닝은 가볍게 잔을 들어 올리며 선창했다.

 

 

“콥의 기념비적인 레어1 촬영을 축하하며, 건배!”

 

 

유리잔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부딪친다. 워켄이 ‘더불어 네 의심을 모르는 성격에도 건배.’라고 덧붙이는 것이 짜증나긴 했지만, 콥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을 쭉 들이키는 쪽을 택했다. 술은 달큰한 향기와 달리 제법 도수가 높아 순식간에 목이 화끈거렸다. 흘끗 보니 워켄도 평정을 가장한 채 연신 얼굴을 흔드는 게 보인다. 셋 중에서 유일하게 술을 시원스레 마셔버린 사람은 브라우닝뿐이었다. 그러고보면 이 사람은 소문난 주당이었다….

 

 

“어라, 왜 그래? 술이 입에 안 맞아?”

“아… 아뇨. 도수가 조금 세서….”

“그래? 워켄은 다 마셔 버렸는데….”

“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도수를 못 이겨서 연신 얼굴을 흔들어대고 있었는데?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돌린 콥은 브라우닝의 말마따나 텅 비어버린 잔과 마치 이겼다는 듯 히죽 웃고있는 워켄을 발견하고 자기도 질세라 술을 단번에 비워버렸다. 어찔한 현기증은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서 의식을 흐물흐물하게 만들었다. 콥이 마지막으로 기억한 것은 거의 쓰러지다시피하는 자신의 손에서 황급히 잔을 받아드는 브라우닝의 손길이었다.

 

 

=

 

 

눈을 떴을 때는 어슴푸레한 전등이 켜진 낯선 방 안이었다. 아마도 손님맞이용 방이겠지. 따뜻하게 데워진 이불 속에서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콥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멍청히 손을 뻗어 옷자락을 붙잡았다. 누구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만한 도수를 한번에 마시고 멀쩡히 걸어다닐 사람은 아까도 말했듯이 셋 중 하나 뿐이니까.

 

 

“깼나? 좀 더 자두게. 워켄도 기절했어.”

 

 

웃음소리와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취기와 뒤섞여 뒤죽박죽이 된 머리로도 선명히 느껴지는 감촉들은 어쩐지 금방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콥은 냅다 브라우닝의 손을 꽉 쥐어버렸다. 자신보다 나이든 자의 손은 움찔거리긴 했지만 억지로 빠져나가려 하지도 않았다.

 

 

“……선배님.”

“왜 그러나?”

“정말로… 아무 문제도 없는 거죠. 괜찮으신거죠….”

 

 

만약에 정말로 선배님이 죽어버리면 저는.

 

 

이어져야했을 말들은 마음 속에서 흘러넘친 슬픔에 휩쓸려 송두리째 사라졌다. 브라우닝은 제 손 아래에서 번지는 물기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붙잡고 있는 콥의 양손을 천천히 어루만져 주었다.

 

 

“걱정말게. 적어도 볼랜드가 장가갈 때까진 죽어도 못 죽으니까.”

“그 다음에는요?”

“볼랜드가 손주를 보여줄 때까진 버텨야지.”

 

 

그때쯤이면 나는 은퇴했으려나. 가벼운 말투로 자신의 미래를 더듬는 브라우닝의 손을 여전히 꽉 붙잡은 채, 콥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말을 내뱉었다.

 

 

“제가 죽을 때까진 죽지 말아주세요.”

“……좀 힘겨운 부탁이긴 하지만, 노력해보지.”

 

 

그렇다고 자네가 젊은 나이에 죽어버리면 쫓아가서 혼내줄거야.

 

 

브라우닝의 속삭임에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보다 거품처럼 떠오른 의식이 닻처럼 가라앉아 버리는게 더 빨랐다. 까무룩 의식을 잃은 뒤에도 마치 제 어미를 붙잡듯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콥의 손을 가지런히 정리해준 뒤, 브라우닝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늦은 취기에 몸이 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