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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퍼스트 위시(2016)

Coral.

1. 그 사람만은 돌아오리라고 믿고있다.

"너는 무서워. 우릴 여기로 데려온 해적들보다 훨씬."
"어째서?"

동굴은 어둡다. 온 몸 구석에 푸른 멍이 남은 아이가 흐릿한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타다 남은 장작마냥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몸. 그 몸에 새겨진 상처에서 썩은 피냄새가 났다. 

"너는 웃지 않아. 울지도 않아. 화내지도 않아. 자신을 합리화하지도 않고 상대를 비난하지도 않고 소리 지르지도 자랑하지도 않고 그냥 남을 상처입히고, 죽이지."

아이가 몸을 웅크렸다. 횃불 그림자에 가려져, 이제는 모습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네가 울거나 웃었더라면, 이해할 수나 있을텐데."
"누굴 죽인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래서 더더욱 이해할 수 없어. 처음으로 누군가를 찌른 이후로 나는 늘 괴롭고 슬펐어. 다른 아이들도 분명 고통스러웠을거야. 하지만 넌… 아무렇지도 않았지."
"그게 이상해?"
"이상해."

쿨럭이는 기침소리.

"너는 이 동굴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거야. 하지만 어느 누구도 너를 받아들일 순 없겠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이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코랄은 침묵에 파묻힌 어둠을 응시하다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동굴 바깥에서 사람이 아닌 것의 소란스런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이건 빗소리다.

눈을 뜨자 바닥의 나뭇결이 보였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던 코랄은 복부에서 올라오는 묵직한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신음했다.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은 물론 옷까지 적셔 사방에 비린내가 가득했다. 멍한 머리를 채찍질하며 겨우 몸을 일으킨 뒤 자신이 덮어두었던 책을 펼치자, 흐릿한 에테르를 머금고 소환된 요정이 허공을 한 번 맴돌았다. 

요정이 흩뿌리는 치유의 힘이 상처에 집중된다. 바닥에 반쯤 주저앉은 상태로 조금씩 호흡을 고르던 코랄은 갈라진 상처가 아물고 내장의 통증이 가라앉았을 무렵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치유술이 피까지 지워주는 것은 아니기에 바닥과 옷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찢어진 옷은 버리기로 했다. 그전에 활짝 열린 현관문을 닫으려 걸어가던 코랄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뭔가를 발견하고 우산을 펼쳤다. 그의 배를 찌르고 그대로 뽑혀나갔던 칼은 오랫동안 빗물을 맞아 피를 씻어내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걸 주워 돌아온 뒤 문을 닫는다. 시계를 보자 앰버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뒤로 적잖은 시간이 지난 뒤였다. 코랄은 피가 많이 흐른 탓인지 어지러운 머리를 끌어안고 자신이 해야할 일을 했다.

칼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상처는 아물었으므로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다만 오른 손바닥의 베인 자국은 치유술을 받을 정도로 깊지 않아 따로 붕대를 감았다. 피투성이가 된 옷은 벗어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피얼룩이 진 바닥은 청소 세제를 뿌려 얼룩 하나 남지 않게 닦아낸다. 그동안 요정은 펼쳐진 책 근처의 의자 기둥에 앉아 날개를 까딱이고 있었다.

…….

"아뇨, 앰버가 제게 화를 낸 적은 많습니다. 이번은 좀 과하긴 했지만."

……….

"돌아올 겁니다. 감정이 진정되고 나면 으레 그렇게 했으니까요."

그러나 코랄의 예상과 달리 앰버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딘가에 신세를 지고 있는가 싶어 다른 이들에게 연락을 돌려보아도 그녀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코랄과 얼굴을 마주하고 사정을 들은 이들은 어딘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반드시 앰버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위로해주곤 했다.

…….

"거짓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저와 말다툼을 하다 나간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

"굳이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해명할 필요는 없지요. 누나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했다면 그건 그때부터 생각할 문제지만, 아마 이야기하지 않았을 겁니다."

………?

"알 수 있습니다. 쌍둥이니까."

…….

요정은 날개를 부산스레 떨고는 책 속으로 사라졌다. 코랄은 펼쳐져있던 책을 덮고는 제 손에 남은 붕대를 잠깐 쳐다보았다. 앰버가 사라진 지 삼일 째 되는 날이었다.

2. 그리고 모든 존재가 격하된다

할 수 없다.

받아들일 수 없다.

여지껏 아무리 맑은 물이 담겨있던 잔이라도 한 방울의 잉크가 떨어지면 그만큼 흐려진다. 아무리 새하얀 눈이어도 그 위에 피가 떨어지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한 얼룩이 남는다. 자신이 걷던 길에 시체와 피가 흩뿌려져 있음을 안다면 더 이상 태연히 걸어나갈 수 없다.

동생의 고백에 닿인 모든 것들은 그렇게 변색되고 뒤틀렸다. 머릿 속 깊은 곳에서 밀려나와 삼킬 수도, 뱉어낼 수도 없게 된 온갖 추억들이 입 안에서 속절없이 썩어들어갔다.

네가 밉다.
네가 무섭다.
네가 원망스러워.

이럴거면 왜 살아돌아왔던거야.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게 당연하다. 하지만 고백을 들은 순간 이미 마음은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로 시작하는 수많은 가정들이 머리 속을 뒤덮었다가 속절없이 쓸려나갔다.  

그 파도 속에서 기력은 사라져갔다. 빗물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하긴이 제 몸을 들쳐업고 재빠르게 움직였을 때조차 비명은 목 안에서 새어나올 줄 몰랐다. 오히려 이대로 얼른  모든 게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리고 소원이 이루어졌다.

초월하는 힘은 이걸로 자신의 사명을 다했다는 듯 사그라들었다. 남은 것은 코랄과 그가 소환한 요정과, 야만신을 향한 찬양문을 웅얼거리는 익숙한 뒷모습 뿐이었다. 

"……그래."

코랄은 상대가 누구였든지간에 그가 야만신의 신도가 되었음을 직시할 수 있는 성격이었으며 사람이 어디를 찔러야 죽는지도 과거의 경험으로 잘 알고있었다. 만약 사하긴 족이 흑와단에게서 몰래 빼앗은 무기가 근처에 보관되어있지 않았더라도 결과는 같았으리라.

과정 자체는 간단하게 끝났다. 바닥으로 흐른 피가 바위 틈새로 흘러가는 사이, 살인을 목도한 요정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

"야만신의 신도가 된 자는 어차피 죽습니다. 그때가 조금 앞당겨진 것 뿐이지요."

…….

"지금 데려가봐야 무의미해요. 야만신에게 홀린 자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

"이상하게 필사적이군요. 왜 그러죠?"

……….

"아이? 앰버에게?"

얼굴에 조금 놀라움이 깃들었으나 그것뿐이었다. 코랄은 제가 쓴 무기를 동굴 한 쪽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쇳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래요, 임신했었나.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네요."

………….

"그러는 당신은 마치 앰버의 가족 같군요. 그렇게까지 해야할 이유가 있나요?"

………………….

"옮길 때까지 버틸 정도로 얕은 상처를 내진 않았어요. 숨은 이미 끊어지고 있습니다. 조기 출산을 할 정도로 자란 것도 아니니 아이는 여기서 앰버와 함께 죽겠죠."

……….

"죄책감은 없습니다. 게다가 동물을 키우는 것은 여러모로 성가셔요."

 ………………………….

요정은 자취를 감췄다. 코랄은 빛의 입자가 흔들리는 허공을 응시하다 책을 덮어 제 허리춤에 끼워넣었다. 앰버에게선 천천히 생기가 사라져가고 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근시일내로 시신이 발견될 것이고, 혹여 썩더라도 그녀가 하고있는 반지가 다른 무엇보다 확실하게 신원을 보증해주리라. 유품은 시체가 발견되면 자연스레 자신에게 돌아올 터였다.

사하긴 족이 야만신을 소환했는가에 대한 상황 증거는 이걸로 맞춰졌다. 코랄은 적당한 타이밍을 가늠하여 동굴을 빠져나온 뒤 흩어져있던 탐사대와 합류했다.도중에 일부러 사하긴족의 눈에 띄어 추격받은 덕에, 수신 리바이어선을 따르는 해적과 사하긴족의 말을 엿들어 정보를 얻었다는 말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얼마 후 상사가 코랄을 불러내어 그녀의 죽음을 알렸을 때도 추궁은 없었다. 납치당해 끌려갔으나 야만신의 신도가 되지 않기 위해 저항했고, 그 결과 살해당해 사하긴의 본거지에 방치되었다. 흑와단측에선 그렇게 결론내린 모양이었다. 진실이 덮인 상황에서, 그가 요정을 소환할 수 없게 된 인과는 자연스레 앰버의 죽음 이후로 연결되었다. 코랄은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더 이상 쓸 일 없는 카넬리안의 치유서는 앰버의 시신과 함께 묻혔다. 까마득한 땅 아래로 가라앉은 건 그뿐만은 아니었다.

3. 지식은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장례식이 끝났다. 한 명이 세 명이 되었다가 다시 한 명으로 줄어버린 집은 자신이 가진 서고로 지난 세월을 증명한 채 침묵했다. 학자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흑와단을 그만두고 나온 코랄은 당분간 집 안에서 소환과 관련된 서적을 읽으면서 지냈다. 본래 비술사라는 뿌리를 공유하는 직업이었기에, 소환사의 지식을 흡수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가끔 책을 덮고 쉴 때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앰버를 죽인 것을 후회하거나 그녀가 죽은 순간을 곱씹지는 않았다. 그를 이해하길 거부하고 야만신의 신도를 선택한 그 순간부터 그녀는 코랄의 쌍둥이가 아닌 타인으로 격하되었다. 자신을 죽이려 한 타인을 역으로 살해하는 것은 코랄에겐 그리 기꺼운 일도 아니었다.

다만 기쁘지도 않았다. 어찌 됐건 해적들의 동굴에서 빠져나온 자신의 곁에 있겠다고 해준 가족이었으며 이 세상에서 그가 지배받아도 상관없다고 여긴 유일한 사람이었다. 만약 마지막 순간 그녀가 코랄을 믿고 있었더라면, 그는 역으로 사하긴족을 다 죽여버렸으리라.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신뢰는 끝났다. 세계는 이번에야말로 자신과 자신 아닌 것들로 구분되어 명확하게 잘려나갔다. 타인의 마음은 타인의 것. 다만 그것을 이해하는 척 구는 행동만은 버리지 않았다. 자신이 그 위장 덕분에 큰 문제 없이 살아온 것임을 이해하지 못할 코랄이 아니었다. 

대신 사람을 믿는 마음을 버렸다. 비술사가 수식의 정확성을 신용하되 거기에 친근함을 느끼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사람이란 누군가를 지배하거나 누군가에게서 지배받고, 혹은 누군가를 죽이거나 타인에게 살해당한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냥 살아가고 있을 뿐일테지.

며칠 뒤 코랄과 앰버의 소식을 알게 된 두 명의 방문객이 찾아왔다. 얼마간의 대화를 나눈 그들은 자유부대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말을 남긴 채 떠났고, 텅 빈 집에 남은 코랄은 규칙적인 시계소리를 들으며 짙은 녹색 크리스탈을 매만졌다.

과거 앰버가 자신의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 모았던 자료들은 코랄이 야만신의 에기를 소환하는 밑바탕을 이루었다. 에테르의 흐름에 따라 모습을 갖춘 소환수는 학자의 요정과 달리 자신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스스로 말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이상, 에오스와 같이 주인을 거부하고 소환에 응하지 않는 일은 없을 터다. 

하지만 소환사는 서재에서 책만 읽는다고 발전할 순 없는 직업이다. 하이델린의 가호 덕에 야만신의 에테르로부터 보호받는 입장이라면 더더욱 틀어박힐 이유가 없었다. 코랄은 앞으로 취해야 행동을 잠시 가늠해보다 결론을 내렸다.

그 선택을 비난할 이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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