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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퍼스트 위시(2016)

Carnelian.

1. 일찍 찾아내지 못해서 미안하다.

림사 로민사는 멜위빈 총독의 이름 아래 수많은 해적들이 모여 번화를 이룩한 도시지만, 일부 해적단을 제외한 노략질 금지라는 그녀의 정책에 반발하여 라노시아 외부, 머나먼 섬지대에 본거지를 튼 해적들도 적지않게 존재한다. 흑와단의 임무 중에는 바다를 통해 움직이는 일반 상선과 유람선이 그들에게 공격 받지 않도록  경계를 지속하며, 경우에 따라 그들과 전투를 벌여 제압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간에 사람이 하는 일인 이상 완벽한 방비는 어렵다. 하늘에 구름이 끼고 바다는 험상궂던 날, 해적의 습격을 받은 여행선에 뒤늦게 도착한 흑와단은 갑판 여기저기 잔혹한 상처를 입고 쓰러진 시신들을 목도했다. 기적적으로 숨이 붙어있던 사람들은 해적들이 물건 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들까지 납치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부모가 숨진 자리에서 발견된 어느 소녀는 자신의 쌍둥이 동생이 눈 앞에서 끌려갔다며 숨이 넘어가도록 울고 있었다. 

흑와단이 다시 그 해적단을 찾아내는데 약 일 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때도 선객이 있었던 모양인지 동굴 안에는 피와 시체가 가득했다. 모두가 생존자를 찾아 동굴을 뒤지는 가운데, 카넬리안은 짐짝 상자 사이에서 아이 한 명을 발견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서로 색이 다른 눈동자.

동굴 속 유일한 생존자였던 아이는 흑와단 측에서 며칠 간의 보호를 받은 뒤 앞서 구조된 누나가 살고있는 그리다니아로 보내졌다.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을 일 년의 공백동안 겪은 일들이 그곳에서 치유되면 좋을텐데. 아이가 그리다니아의 보호자에게 무사히 인도되었다는 보고서를 처리하며, 카넬리안은 잠깐이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

2. 아무것도 알지 못해서 미안하다.

쌍둥이는 모래 냄새를 풍기며 쳐들어왔다. 쳐들어왔다, 고 표현한 이유는 말 그대로 흑와단 본부에 들어오자마자 카넬리안을 만나게 해달라고 막무가내로 소리친 탓이다. 덕분에 영문도 모르고 거울처럼 쏙 빼닮은 쌍둥이를 마주하게 된 그녀는 뜻밖의 이야기를 듣고 눈썹을 찌푸렸다.

"갈 곳이 없다니 무슨 소리야? 분명 그리다니아에 적지 않은 친척이 있던걸로 알고 있는데."
"그쪽에선 살 수 없어요. 정령이 저를 거부했으니까."

대답한 것은 앰버보다 좀 더 차분한 분위기의 소년으로, 굳이 어디서 본 얼굴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카넬리안은 천천히 커피잔을 내렸다. 들은 적은 있다. 그리다니아는 폐쇄적인 경향이 강해, 어떤 일이든 반드시 정령의 허가를 받는다고 한다. 이민같은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설마 쌍둥이 중 한쪽을 거부했을 줄이야.

"그럼 그 뒤로 어디서 살았지?"
"내가 아무리 부탁해도 정령의 결정은 번복할 수 없다며 다들 막무가내여서… 결국 둘이서 울다하에 있는 먼 친척집에 가서 살았어요."

그 울다하의 친척도 얼마 전 사고로 숨을 거두는 바람에 정말로 의지할 만한 곳이 없어져, 둘이서 아예 마음을 정하고 이쪽으로 왔다는 이야기였다. 그때까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넬리안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다니아 친척 쪽에서는 아무 연락 없었나?"
"나한테는 몇 번. 하지만 코랄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어요."

과연. 그래서 이쪽으로 왔다는 건가. 

"그렇다고 이렇게 무작정 오면 어쩌잔거냐? 연락도 없이."
"그치만…."
"됐어. 복잡한 얘기는 질색이다. 이거나 받아라."

그녀가 주머니에서 뒤져 던진 물건이 허공을 날아 소녀의 손바닥에 안착했다. 다소 낡았긴 했지만 금속빛으로 차갑게 빛나는 열쇠 하나. 아이들이 고개를 들자 종이쪽지에 뭔가를 적은 카넬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사는 집 열쇠다. 이건 주소. 안에 책이 많으니까 어질러 놓지말고 거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소녀는 순식간에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그 뒤를 잇듯이 감사인사를 했다.

며칠 뒤 그리다니아의 친척 측에서 폐를 끼쳐 미안하다는 사과와 쌍둥이의 보호를(특히 갈 곳이 없을 동생 쪽을) 부탁한다는 요지의 편지가 도착했다. 아이들을 외부로 밀어놓고도 묘하게 고상한 말투의 편지는 금새 서랍 깊은 곳에 쑤셔박혔다.

쌍둥이는 금새 비술을 익혔고 몇 년이 지나 성인이 된 뒤에는 흑와단에 정식으로 입단했다. 제7재해가 일어나기 2년 전의 일이었다.

3.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함께.

"학자가 되겠다고?"
"네."
"이유를 들어볼까."
"누나가 소환사는 단 것을 먹어야 잘 싸울 수 있다고 하던데, 저는 단 걸 싫어해서요."

카넬리안은 웃었다. 조금 전까지는 진지한 얼굴이었던 코랄도 그녀가 웃는 것을 보고는 스르르 웃음을 띄었다. 그 미소를 잠깐 지켜보던 카넬리안은 깊은 숨을 토해내곤 자신이 앉은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나도 네가 학자가 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유? 말할 수 있는 이유야 많았다. 너는 성실하다던가, 군학을 잘 이해할 것 같다던가, 너의 누나는 소환사를 목표로 하고 있으니 네가 학자가 된다면 균형이 잘 맞을거라던가. 하지만 카넬리안은 이런 겉핥기 같은 이유를 밀어내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너는 사람을 살릴 생각을 해야 해."

침묵.

"제가 누군가를 죽이려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멍청아, 그런 생각을 하겠냐."

그리 푹신한 편은 아닌 의자가 삐걱이는 소리를 낸다. 코랄은 아까 잠시나마 웃은게 거짓말같은 얼굴로 그녀를 마주보았다. 젠장, 이래서 복잡한 이야기는 질색인데. 카넬리안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은 생각을 강하게 억눌렀다.

"어떤 직업인지를 막론하고 사람을 치유하고 살리는 일에는 다른 직업보다 무거운 책임감이 실린다. 만약 누군가를 죽이인다면, 그건 그대로 네 어깨의 짐이 되겠지. 하지만 사람을 구하려 하는 한 그 마음은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아. 그래서 하는 말이다."

텅 비어있던 동굴.
피냄새로 가득한 어둠.
떨어진 뼛조각과 수많은 상처들.
짐짝 상자 사이에 숨어있던 상처투성이의 몸.

그것이 좀 더 면밀하게 움직이지 못한 자신들의 책임이며, 너는 거기에 휘말린 불운한 피해자라는 사실을 굳이 입에 담을 이유는 없었다. 아물어가는 상처를 헤집어보았자 피와 눈물 외에 뭐가 더 흐를까. 지금은 그저 아이에게 보여주고 느끼고 싶은 것만 말해도 충분할 때였다.

"적어도 학자의 고달픔은 내가 잘 알고있으니까 말이지. 나중에라도 힘들어지면 선배로서 고충을 들어주마."

코랄은 한참 뒤에야 웃었다. 카넬리안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껴안은 채 그 아이가 웃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에 놓여있었던 아이를 그렇잖아도 치열한 학자의 길로 이끈다. 이 선택이 후일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에오르제아의 열두 신이나 알 일이겠지. 인간이 앞일을 미리 알 수 없는 이상, 카넬리안은 자신이 내린 선택이 올바른 결과로 이어지길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아이의 곁에 자신과 쌍둥이가 있으니, 무언가 문제가 생기더라도 셋이서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하지만 여기서 뭔가 잘못될 경우 그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걸까. 코랄의 후회, 혹은 자신이나 앰버의 죽음 같은 여러가지 상황을 상정해보아도 마음 속의 묘한 술렁임은 가라앉지 않는다. 카넬리안은 그것을 자신의 나약함으로 몰아버리곤 다리를 꼬았다. 어울리지도 않게 무거운 이야기를 한 탓인지, 전장에서 한바탕 싸우고 난 뒤 보다 피로했다.

4. ……

땅이 불타오르고 있다. 입안에 고인 피를 대여섯 번은 토한 탓에 안그래도 붉은 제복에 시커먼 얼룩이 져있었다. 지금은 그나마 평온해진 숨을 들이쉬던 코랄은 제 앞에 모로 쓰러져있는 앰버의 상태를 살폈다. 이쪽도 부상 때문에 피를 많이 흘렸으나 약품과 치유술을 쓴 덕에 호흡은 안정되어있었다. 조금 휴식을 취한 뒤 옮기면 되겠지. 

바람은 불길이 섞여 뜨겁다. 진정되는가 싶던 마른 목에서는 또 다시 비릿한 기침이 터져나왔다.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뒤를 돌아 들여다 본 얼굴에는 아무런 생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손을 뻗어 여기저기 맥을 짚어봐도, 느껴지는 것은 물컹한 침묵과 부서진 뼛조각의 감촉 뿐.

"…죽었군요, 카넬리안씨."

그 말마저 불길에 그을린다. 코랄은 제 머리를 뒤덮는 어릿한 빈혈에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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