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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퍼스트 위시(2016)

Amber.

1. 강해진다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있을거야.

사망자가 어떻게 죽었는지 파악하는 것보다 산 사람을 추스르고 제도를 정비하는게 더 급한 시국이었다. 달라가브의 파편과 운석이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카넬리안과 헤어졌고, 상처를 추스른 뒤에야 그녀가 근처에서 죽은 걸 발견했다는 앰버와 코랄의 증언은 별 무리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대로 말해도 됐을텐데."
"안돼. 나중에 가서 네가 카넬리안 중위님을 죽인거다, 같은 소리가 나오면 싫잖아."
"…왜 그런 말이 나오지?"

동생은 가끔 이런 부분에서 얼빠진 것처럼 군다. 앰버는 한숨을 내쉬곤 코랄의 머리를 헤집었다. 아직 부상이 다 회복되지 않은 팔이 조금 저렸지만, 그렇다고 아주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됐으니까 그냥 이렇게 해. 카넬리안 씨도 괜히 자기때문에 네가 욕 먹는 거 싫어하실거야." 
"으음… 누나가 그러라면야, 그렇게 할게."

그치만 머리는 헝크러뜨리지마. 코랄은 그렇게 말하곤 묶은 머리를 풀어 다시금 단정하게 묶었다. 하여간 제7재해라는 큰 사건이 지나갔는데도 저 성격은 어딜 가지 않는다. 픽 웃음을 흘리던 앰버는 이내 허탈한 감정을 느끼며 벽에 등을 기댔다.

"…사망자, 아직도 나온다며."
"응. 부상자도 많아."

고향으로 돌아간 시신이나 가매장지로 보낸 신원불명의 시신을 제외하고도 인근 무덤은 속속들이 채워지고 있다. 개중에는 아예 시신도 찾지 못하고 일부만이 돌아와 유족들이 화장을 선택한 경우도 많았다. 충돌에 휘말렸다고는 하나 비교적 사지가 멀쩡한 상태로 발견되어 일찌감치 땅에 묻힌 카넬리안은 차라리 운이 좋은 경우가 되어가고 있었다.

"넌더리가 난다, 정말~ 이런 허탈함을 또 느끼게 될 줄은 몰랐어."
"앰버가 일으킨 일도 아니잖아."
"맞아, 처음부터 내가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

까마득한 하늘에 떠있던 위성 달라가브가 조각나며 떨어져내렸다. 땅 위의 비술사에 불과한 자신이 거기서 무엇을 더 할 수 있었겠는가. 심지어 코랄이 자신을 치료하고 안정을 취해줄 때까지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통탄스런 일이었다.

"더 강해져야겠어."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지켜줄 수 있을 만큼!"

옛날, 뛰어난 비술사 중에선 소환수 카벙클을 다루는 데에 그치지 않고 야만신들의 에테르를 제어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만약 자신이 좀 더 실력을 키워나간다면, 그 무서운 파괴의 힘으로 타인을 보호해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앰버가 긴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코랄은 그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머리는 한참 전에 가지런해진 뒤였다.

"누나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될 수 있을거야."
"하하, 고맙기도 해라."

장난 삼아 머리를 또 헤집자, 코랄이 한숨을 쉬었다. 앰버는 부러 낄낄 웃으며 어디선가 울컥 쏟아져나올 것 같은 감정을 억눌렀다. 

한 사람이 빈 자리가 자꾸만 시큰거렸다.

2. 지키고 싶은 누군가가 있으면 사람은 강해지는걸.

재해의 흔적이 얼마나 거대하게 남아있던 시간은 아랑곳하지 않고 흘러간다. 시신과 불탄 재목을 덜어내느라 분주하던 자리가 오랜 수리를 거쳐 번듯한 모습을 갖추고, 상처에서 회복된 사람들이 다시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앰버도 자신을 소환사라고 자처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으나, 여전히 야만신의 에테르를 응용한 소환방법은 찾아내지 못한 채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제7재해 이후로 야만신은 소환되지 않았으며, 재해 이전의 목격 정보는 연구에 적합한 자료가 아니었다. 그나마 도움이 될 것 같은 연구는 도중에 끊겨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꼭 그렇게 야만신의 힘을 다루는 데에 집챡할 필요가 있을까요? 앰버씨는 지금도 충분한 실력을 갖추셨는 걸요."
"제7재해가 일어나기 전에도 나는 내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가 한참 모자란다는 걸 알았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그렇지 않으면 또 무력하게 잃어버리고 말거야."

테이블에는 따뜻한 차가 김을 피워올리고 있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있던 푸른 피부의 미코테가 조심조심 앰버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야만신의 힘은 위험하댜는 것, 냐도 아는걸."
"후후, 그 정도는 구분해요. 그치만 명색이 흑와단의 소환사인데 야만신 앞에서 고개만 돌리고 있을 순 없잖아요. 대처방법을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연구는 계속할 거에요. 설령 야만신의 에테라이트를 쐬더라도 사랑의 힘으로 극복해내서 돌아올게요!"
"…앰버씨의 그런 씩씩한 점을 좋아하지만요."

사랑이라니, 조금 쑥쓰럽네요. 그렇게 말하는 미코테의 왼손 약지에는 자신과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있다. 앰버는 가만히 미소지으며 그 손을 마주잡았다. 그 따뜻한 온기가.

온기가.

"앰버."

어디에 있지.

"앰버."

고개를 들면 조금 지저분한 얼굴의 코랄이 있다. 뭐야, 평소답지 않게 왜 그래. 그렇게 놀려주고 싶은데 목이 뻑뻑하다. 한겨울날 찬 공기를 맞는 바람에 목이 부어버렸을 때와 비슷한 느낌.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 아닌데. 겨울이, 아니지?

"앰버, 정신차려."

잡힌 어깨가 흔들린다. 그러고보니 자신은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모양이었다. 주위에는 흑와단 사람들이 모여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가다가 넘어지기라도 했나, 아니면 선 채로 선잠이라도 꾸었던 걸까. 이상하게 머리가 멍했다. 방금 전까지 로니아씨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은데.

"로니아, 씨, 는?"

고장난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것처럼 서로 높낮이가 다른 소리가 뒤엉켜 굴러 나온다. 코랄은 분명 제 말을 들었음이 분명한데도 가만히 침묵할 뿐이었다. 뭐야, 뭔데. 왜 아무 말도 안하는데. 네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어디에 있는지 말해 줄 수 있잖아. 나 지금 그 사람이 만나고 싶어. 그 사람을 지금 당장 만나지 않으면 불안해서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아.

"코랄, 그만 됐다. 앰버를 데려가서 쉬게 해."
"네."

뭐야, 왜 아무 말도 안하는건데. 왜 자꾸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거야. 내가 이상한 말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그냥 만나고 싶을 뿐인데.

"돌아가자, 앰버."
"싫어, 싫어! 로니아씨를 만나기 전에는 여기서 움직이지 않을거야!! 그냥 만나게 해주면 되잖아!"
"만날 수 없어."
"왜!"
"──……."

분명 뭔가를 들은 것 같은데, 사방에 모래가 꽉 들어찬 것 마냥 갑자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기묘한 어지럼증 속에서,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금방이라도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 안개가 끼듯 흐릿하게 뭉개지는 세상 속에서 왼손 약지를 꽉 움켜쥐고 있던 앰버는 제 폐부에 가득 차오르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긴 절규를 내질렀다.

야만신의 신도.
그런 단어가 오랫동안 귓가를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3. 그러나 네 강함은 어딘가 이상하다.

정신이 들자 창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침대에 몸을 묻은 채 한참 소리를 듣고있던 앰버는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를 듣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언제나처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코랄이 앰버의 모습을 보고 살짝 웃었다.

"일어나있었네. 기분은 좀 어때?"
"……."
"앰버가 좋아하던 소설의 후속작이 나왔어. 여기 둘게."
"코랄."
"응?"
"……."

바깥 날씨는 꽤 험상궂은지 빗줄기가 유리창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빗소리 가득한 침묵 속에서 앰버를 바라보던 코랄은 하룻동안 같은 자리에 놓여있던 물병과 컵을 새 것으로 교환하고 그 옆에 소설 한 권을 놓았다.

"쉬고있어, 다시 올게."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문 너머로 사라진다. 앰버는 한참동안 코랄이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다 제 머리를 힘껏 움켜쥐었다. 꽉 다문 잇새 사이로 신음소리가 저절로 새어나왔다.

코랄 탓이 아니야. 코랄 탓이 아니야. 코랄 탓이 아니야! 야만신의 에테르는 모두를 신도로 만들어 버리잖아! 하지만 그럼 왜 혼자 멀쩡하게 돌아온거지? 왜 로니아씨는 함께 돌아와주지 않은거야? 그럼 코랄도 신도가 되는게 나았겠어?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 게 아니야! 그치만 원망스러워! 전부, 전부!!

왜 그 사람이 아닌거야!!

…아슬아슬하게, 책을 내던지지 않았다. 앰버는 제 양팔을 끌어안다시피 하여 몸을 움츠리곤 딱 달라붙은 무릎 위에 제 머리를 떨궜다. 난폭해진 호흡이 지치지도 않고 흘러넘쳤다.

계속,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어.

어렵사리 침대에서 일으킨 몸이 무겁다. 텅 빈 방에 서있는 감각이 이상해 잠시 우두커니 서있던 앰버는 싸늘한 기운을 뿌리치려 상의를 걸쳤다. 비가 내리는 탓일까, 아니면 이제부터 할 일에 대해 몸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나중에 차라도 같이 끓여마시면 괜찮아질 것이다. 허나 아무리 끌어올리려 해봐도 마음은 기울어진 잔 속의 찻물이 한 쪽으로 몰리는 것 마냥 불안정할 뿐이었다. 앰버는 제 가슴께를 움켜쥐고 몇 번 숨을 몰아쉬다 걸음을 내디뎠다.

"…아뇨, 힘들지 않아요. 이전에는 이것보다 더한 일도 해봤으니까요."

코랄의 목소리다. 앰버는 제 발걸음이 바닥에 묵직하게 눌어붙는 것을 느끼며 제자리에 멈춰섰다. 고작 다섯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왜인지 굉장히 멀게 느껴졌다.

"누나는 모릅니다. 만약 알고 있다면, 조금은 기쁠텐데."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면 요정 에오스와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지. 앰버는 괜히 제 기억 속을 더듬으며 느릿느릿 한 걸음을 내딛었다. 코랄이 자신을 위해 했지만, 나는 알지 못하는 일. 하지만 알아차릴 수도 있는 일. 그런게 있었던가?

"누군가를 위해서 사람을 죽인 건 그게 처음이니까요."

발이.

"네, 죽였습니다. 대놓고 죽이면 이래저래 귀찮아질테니 머리를 좀 썼죠. 다행히 울다하는 약을 쉬이 구할 수 있는 장소였고, 의심도 얼마 사지 않았습니다."

녹슨 태엽을 억지로 감아버리듯 기억이 역류한다. 그리다니아를 떠나 혈육의 흔적을 억지로 갖다붙이다시피하면서 찾아갔던 울다하. 노인은 명백히 아이들을 환영하지 않는 눈치였고, 실제로도 그리 친절한 대접은 받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날인가, 코랄과 둘만 남았을 때 반쯤 분풀이 삼아 누가 저 사람 좀 죽여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아뇨, 그건 다릅니다. 야만신과 만나는건 저도 상정하지 못했어요. 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선 저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저야 어쨌던 누나는 그를 꽤 맘에 들어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신도가 된 마당에야 어쩔 도리가 없지요. 죽는 수 밖에."

굳은 발이 그대로 미끄러진다. 몸이 벽에 부딪쳐 바닥으로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와 동시에 목소리가 멈췄다. 책이 덮이고, 이쪽으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소리. 이윽고 앰버를 발견한 코랄이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말을, 듣지 못했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내가 미쳐서 환청을 들은 걸까. 앰버는 너무나 평온한 코랄의 얼굴을 마주보다 손을 마주잡았다. 겨우 일으킨 몸은 침실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보다 훨씬 무거웠다. 싸늘하게 얼어붙는 듯한 오금으로 제 무게를 간신히 버티는 그녀 앞에서 저주같은 말이 이어졌다.

"아까 한 말 들었어?"

몇 음절의 말이 심장에 살얼음처럼 차갑게 달라붙는다. 조심조심 고개를 들어 확인한 얼굴은 언젠가 함께 얘기를 나눴을 때처럼 평온하기만 했다.

"……울다하, 에서."
"역시 들었구나. 으음, 내 입으로 다 말한 것처럼 되버렸네."

자신과 같은 얼굴이 쑥쓰럽다는 듯 웃었다. 손은 여전히 잡혀있다. 앰버는 반사적으로 그 손을 잡아빼내곤 뒷걸음질쳤다. 벽이 부딪친다. 계속 움직인다. 허공을 더듬는 손에 의자가 부딪쳐 넘어진다. 그걸 밀어내며 움직인다. 허리에 뭔가 눌리는 감각을 따라 마치 벽을 긁듯이, 움직인다.

"누나, 옷 더러워져."

등에 뭔가가 부딪친다. 더 나아갈 수 없다. 그래도 마구잡이로 등 뒤를 더듬던 앰버는 익숙한 손잡이을 알아차렸다. 부엌의 안쪽. 조리도구를 정리하여 넣어놓은 서랍의 둥근 손잡이.

"앰버."

저편에서, 붉은 기 도는 산호색 눈과 호박빛 눈이 미동도 하지 않는다. 자신과 같은 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앰버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서랍 손잡이를 쥐었다. 땀투성이 손바닥에 손잡이가 찰싹 달라붙었다.

"…농담이지? 내가 나오는 소릴 듣고, 뭔가, 뭔가 골려주고 싶어서, 그런 소릴 한거지? 내가 온갖 소릴 다했으니까! 그걸, 그걸 복수하고 싶어서, 그런거지?"
"나는 누나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 따위 안 해. 그냥 누나가 원하는게 있으면 도와주려고 했을 뿐이지."
"나를 도우려고 사람을 죽여?"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뭘.

"뭘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는거야…!!"

뭔가가 안에서 덩어리진다. 덩어리지고 부풀어올라, 충혈을 일으키며 곪아 썩어간다. 부글거리며 끓어올라 가슴께까지 치밀어오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목구멍까지 치솟아온 감정이 심장고동보다 더 잘게 몸을 떨었다.

"사람을 죽인 거잖아!"
"응, 죽였어."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누나가 죽이고 싶어 했는걸."
"사람은 그런 식으로 죽어선 안되는 거야!"
"응, 그래서 몰래 죽였어. 아무도 모르니까 안심해."
"……."
"차라도 마실래?"

지금.
내 눈 앞에 뭐가 있는거지.

"너… 사람이 죽는 걸, 뭐라고 생각하는거야."
"사람이 죽는 일."

그 이상의 말이 덧붙는 일은 없었다. 앰버는 멍하니 앞을 응시하다, 이내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메마른 입 안쪽에서 자신이 방금 전까지 품고있던 온갖 생각들이 파삭파삭하게 깨져, 한 웅큼의 절망을 안고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코랄. 왜 너만 살아남은거야?"
"하이델린의 가호가 있었으니까."
"그게 왜 너에게 있는거야."
"그건."

서랍을 잡아당겨 열자 내부에 담겨있던 조리기구들이 덜걱이는 소리를 낸다. 앰버와 같은 얼굴을 한 자는 제 말이 잘린 것에 대해 딱히 당혹한 기색도 없이, 그 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너 같은 괴물은 그런거 가질 자격도 없어."

서랍 첫 번째 칸에는 식칼이 들어있다.
앰버는 닥치는대로 한 자루의 손잡이를 잡고.



비명처럼 숨이 터져나왔다. 사방에서 들이치는 비에 젖은 옷이 온 몸에 달라붙었다. 독한 꿈에서 마구잡이로 깨어난 것 같은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한 손에서 묵직한 뭔가가 빠져나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인 그녀는 붉게 물들었으나 이제는 빗물에 씻겨나가고 있는 한 자루 식칼의 모습을 발견하고 젖은 눈꺼풀을 깜박였다.

코 끝에, 쇠비린내가 감긴다. 고개를 들면 자신이 뛰쳐나온 방향에 활짝 열린 문이 보였다. 안에서는 퍽 따스해보이는 빛이 스며나오고 있지만.

들어가면, 괴물이 있다.

그녀는 그대로 반대방향으로 뛰었다. 맨발로 비 내리는 어둠 속을 달리며, 그저 자신이 잃어버린 사랑스런 이의 모습만을 떠올렸다. 그 외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생각할 기력이 나지 않았다.

4. 이제는 붙잡을 수 없는 기억들이 흘러간다.

"앰버, 여기에 숨어라!"
"서둘러! 여긴 공간이 좁아서 너 밖에 숨을 수 없어!"

코랄을 먼저 숨겨달라고 해야 했을까.

"앰버, 굳이 네가 이곳을 떠날 필요는 없단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지 않으련?"
"너는 허락을 받았잖니. 하지만 그 아이는 정령이 거부한 아이야. 함께 하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게 분명해."

그걸 받아들였어야 했을까.

"진짜 싫다! 누가 저 사람 좀 죽여주지 않으려나!"
"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데?"
"일단 내가 하늘을 나는 기분이 될 거야!!"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던 걸까.

"앰버,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코랄을 잘 이끌어다오. 그 녀석은 좀체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단 말이지."

그 말에 어떻게 답해야 좋았을까.

"나와 누나를 살리고 나니 카넬리안씨는 죽어있었어." 

그때 코랄이 어떤 일을 했는지 솔직하게 말해야 옳았던 걸까?

"코랄 씨는… 앰버 씨와 쌍둥이지만 뭔가 댜른 느낌이 드네요. 무섭댜고 해야할까, 어딘가 동떨어져 있다고 해야할까…."

그걸 웃어넘겨선 안됐던 건가?

"너 같은 괴물은."

그 말을.

겹겹이 쌓인 후회들이 볼품없이 녹아내린다. 앰버는 제 손끝에 걸리지도 않는 것을 잡으려 간헐적으로 손끝을 꿈틀거리다, 이내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나무에 핀 꽃이 바람에 지듯이, 의식이 흩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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