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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세포신곡

[논커플링]눈이 내리는 날에 당신의 관을 태우고

※막간까지 보신 후에 읽으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아토 하루키가 사망합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하루키가 죽었다. 어제, 어쩌면 오늘.

 

날짜가 명확하지 않은 것은 내가 소식을 들은 것이 비행기 안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로마 공항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경유하여 일본 도쿄로 향하는 긴 여로 속에서 시간은 불분명한 형체로 존재했다. 메세지는 레이지에게도 도착한 모양이다. 작게 숨을 들이키다가, 나를 돌아보는 기척.

 

"아버지." 

 

로스앤젤레스의 하늘에선 비가 내리는데 그걸 감안해도 상당히 가라앉은 어조였다. 그야 당연하다. 레이지는 지금 자기 아버지의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리고 그건 내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이기도 하다. 단단한 유리창을  공연히 거세게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렸다.

 

"장례식을."

"치뤄야겠구나."

 

목소리는 침착하다. 의외로 나는 냉정한 편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편이 좋다. 감정에 휩쓸리는 것 보다는 그게 낫다. 나는 짐가방을 담은 손을 움직이려다, 그 안에 하루키에게 주려던 여러가지가 담겨있음을 떠올렸다. 홍차, 와인, 그리고.

 

나의 책.

 

원래라면 하루키가 이탈리아로 건너왔을 것이다. 축하받아야 할 사람이 비행기 안에서 구겨져 있으면 얼마나 볼품없겠느냐 같은 소릴 하면서. 하지만 하루키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해야 옳겠다. 

 

하루키는 아팠다. 그것도 아주 많이.

 

오리진의 세포를 전부 물려받았을텐데, 그 지고세포는 완전한 세포였을텐데. 그러자 하루키가 말했다. 아마도… 천사가 저 멀리 사라진 탓이겠죠. 

 

응, 세오도아는 죽었어. 그가 원하던대로 피안을 맞이할 수 있었지. 나도 알아. 그래서 안도하고 있었어. 외면했던거야. 피날레 이후의 잔여물을.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얼마 되지 않는 반응일지도 몰라. 나는 그런 희망을 품었다. 레이지도 마찬가지였다. 화학과 생물에 깊은 관심을 두지 않던 아이가 며칠동안 도서관을 드나들었다. 식물은 접붙이기를 거듭하면 본래의 수목과는 다른 형태로 자라난대요. 형 몸 속의 세포도 그런 상태일거예요.

 

레이지의 말은 나름의 농담이었으리라. 하루키는 오랜 시간 설명을 반추해보고는 고마워, 라 답했다. 나는 입술만 꾹 깨물었다.

 

하루키는 갈수록 점차 쇠약해져갔다. 겨울 나뭇가지가 잎을 모두 떨어뜨리고 말라가는 것처럼. 하루키를 이루는 무언가가 확실하게 덜어내어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키를 염려했다. 애니와 츠바이크조차 안부를 물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루키는 대체로 고마워, 괜찮아, 걱정마, 밖에 말 못하는 사람처럼 굴었고 우리들은 그 언저리에서 무언가 뾰족한 수가 나오기를 바라며 한결같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보다 냉철했던 모양이다.

 

나고야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눈이 내렸다. 우릴 위해 장례식장에서 차를 몰고와 준 오토와 루이는 이미 눈가에 그늘이 짙었다. 우리는 말없이 시체를 운구하듯 짐을 차에 옮기고 몸을 실었다. 검은 밤, 묵색 도로를 가로등의 주홍빛이 은은히 불태우는 가운데 우리는 그 명도 속을 스쳐지나갔다. 불티 하나 튀어오르지 않았다.

 

장례식을 어떻게 치뤘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문득 정신이 들고 보니 하늘에선 굵은 눈송이가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아침에는 사람 허리까지 쌓일지도 모른대요. 장례식장의 직원이 다른 직원에게 속살거린다. 거기에 의식이 쏠려 등 뒤의 질문을 놓쳤다.

 

"사네미츠 씨는 울지 않으시는군요."

 

예의 바르게 두 번 말해준 오토와 루이의 눈동자는 지친 기색을 두르고도 명징했다. 나는 그에게 무엇 하나 숨길 수 없음을 알고 솔직하게 말했다. 왠지 하루키가 오래 전부터 죽어 있었던 듯한 기분이 들어…. 그는 나의 말을 듣고도 몰아세우거나 책망치 않았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 하루키는 유언을 남겼을까. 아마 남겼을 것이다. 눈 앞의 이 남자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나는 과연 하루키의 유언을 기대할 자격이 있는 인간일까?

 

가방 안에는 홍차와 책이 있다. 나는 그것을 오토와 루이에게 밀어붙이고 복도로 도망쳤다.

 

눈이 쌓여간다. 소복소복 쌓여간다. 숙소로 안내받은 장소는 빈말로도 훌륭한 장소는 아니었으나 지금 상황에선 이걸로도 감지덕지해야했다. 서로의 방에 들어가기 직전, 나는 오토와 루이에게 하루키에게 주려던 선물을 전했다고 통보했다. 레이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밤에는, 별로 잠들지 못했다. 사각의 창문에서는 가끔 찬 바람이 들어왔고 흐릿한 달빛 속에선 흩날리는 눈송이의 그림자가 춤췄다. 나는 한 밤 내내 춥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이 정도인데 하루키는 춥지 않을까. 안 그래도 몸이 약해졌는데 두터운 솜이불을 덮고있을까. 따뜻한 탕파를 안고 있을까.

 

아침이 되었다. 맹렬히 내린 눈은 그대로 우리를 가두는 감옥이 되었다. 낮이 되어야 겨우 교통이 뚫릴 것 같습니다. 데스크의 직원은 면목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고 모든 장례 일정이 딜레이 되었다. 나는 멍하니 의자에 앉아, 새까만 테이블의 광택 따위를 눈에 담았다.

 

그 옆에 누군가 앉는 기색이 있다. 오토와 루이였다.

 

"실례지만 책을 읽었습니다."

 

별 것 아닌 취재노트다. 그걸 밤새워 읽었다면 참 성실한 인물이다. 혹은 그도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거겠지. 나는 달빛 속에서 책장을 넘기는 그를 상상한다. 놀랍도록 자연스러웠다.

 

"하루키가 그러더군요. 아버지가 이번에 새로 쓴 책을 들고 올 거라고."

 

기억력이 좋은 아이다. 레이지가 핑계처럼 내세운 신작에 대한 정보는 깜박 잊어버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잊어버리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았겠지.

 

"하루키가 남긴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어깨가 굳었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미 오금이 저려 꼼짝할 수 없었다. 나는 무력하게 숨을 들이마시며 오토와 루이를 바라보았다. 유일하게 평정을 유지하는 그는 어떤 성채처럼 견고했고

 

"말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동시에 무력해보였다.

 

이유를 물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이소이 사네미츠고, 그 아이는 아토 하루키고, 이 사람은 오토와 루이다. 그걸로도 모든 것을 짐작하고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걸리는 것은 말끝이 과거형이라는 점이었다.

 

"당신의 책을 읽었을 때 한 소절이 눈에 띄더군요."

 

손에 책을 들지도 않고 그가 읇는다.

 

"『세상 모든 것은 순환한다. 씨앗이 자라나 꽃을 피우고 꽃이 진 자리에서 맺힌 열매가 누군가의 배를 채우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 씨앗을 남기듯 우리들의 그리운 사람도 이 세상을 순환한다.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는 존재다.』"

 

쓸 때는 쑥스럽던 문장도 그의 입술에서는 그럴 듯하게 들렸다.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는 존재다.』"

 

오토와 루이는 그렇게 말하곤 나를 바라보았다. 명징한 눈동자에 처음으로 슬픈 기운이 감돌았다.

 

"나는 그 말을 하루키에게서 들었습니다. 하루키는 할머니에게서 들은 것 같은 말이라고 얼버무렸지만…. 그건 당신이 한 말이었던 거군요."

 

나는, 먼 과거의 숨소리를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그 아이에게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나날이 어떤 영화의 장면처럼 흐릿하게 부감되어 떠올랐다. 그때는 아직 서로 피부가 맞닿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않았었다.

 

"하루키는 다시 만나자고 했습니다."

 

……….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때 그 순간부터 그 말은 내 진리입니다."

 

고개가 무겁다. 지금 당장이라도 목을 숙이고 아래만 바라보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던 것은 오토와 루이의 얼굴에 짙게 드리워진 고뇌의 그림자 때문이었다. 그는 바닷가에서 모래를 골라내듯 침묵하다가… 말을 잇는다.

 

"왜 자꾸 하루키를 피했나요."

"나는."

"하루키는 아버지에게 욕을 퍼부었지만,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말만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는 존재다』. 그건 그냥 형편 좋을 때나 하는 말이었습니까."

"나는"

"하루키는."

"……."

"이제 없어…."

 

눈이. 아직도 내린다고 한다. 나는 멍한 머리로 하루키의 경차가 눈에 폭 싸여 침묵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눈 앞에는 여전히 오토와 루이가 있다. 이 자리에 걸맞은 침묵과 비통함을 짊어진 채.

 

"…하루키의 유언을 말씀드리지요."

 

말은 몇 음절 되지 않았다. 오토와 루이는 금방 자리를 떴다.

 

레이지가 찾아올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이래저래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장례식장의 일을 조금씩 돕다 왔다는 아이에게서는 은은한 향 냄새가 느껴졌다. 나는 뭔가 멀쩡한 척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며, 오토와 루이와 대화한 이야기를 한다. 레이지는 놀란 기색이었다.

 

"뭐라고, 하던가요?"

 

간단한 질문이 내 머리를 꿰뚫는다. 얇고 날카로운 바늘이 눈물선을 짓뭉개는 바람에 아무런 감각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런데도 목구멍은 찢어지지 않아서 목소리가 나온다. 나는 어떤 사고능력을 상실한 채로 성대를 꿈틀거렸다.

 

"하루키가,"

"다음엔 늦지 말라고, 웃었대."

 

세상은

빙글빙글 

순환하고

우리는

뱅글뱅글

다시만나

언젠가

어디선가

다시만나

 

"그러니까 그때는 늦지 마. 아빠."

 

하루키는.

살아있었다.

 

내가 기행노트를 쓰고 정리하는 동안

편집된 페이지를 살피며 오탈자를 고치는 동안

사진과 삽화의 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하얀 간지에 싸인 책을 보며 생각에 잠긴 동안

비행기에 올라타며 짐가방을 챙기는 동안

 

살아서

살아서

 

계속

나를.

 

눈은 높게 쌓여있다. 나는 그 저온에 눈물샘이 얼어붙은 것처럼 느릿느릿 울었다. 흘러내린 것들이 금새 빰의 여기저기를 잡아당겼다. 분명 볼썽사나울 것이다.

 

"레이지, 나는."

"네."

"또 하루키를, 만나도, 되, 는 걸까."

"안 만난다고 하면 형이 또 엄청 화낼걸요."

"또, 태어나도 되는 걸까."

 

태어나서, 꽃을 보고, 라이를 만나고, 사랑하고, 꽃이 지고, 하루키가 태어나고, 열매가 맺히고, 레이지가 태어나고, 그리고, 그리고 너도 우리와 함께 태어나고.

 

"그런 걸, 기대해도 괜찮은 걸까."

 

레이지는 조금 괴로운 표정으로 웃고는

 

"형이 된대요."

 

그렇게 말했다.

 

장례식이 끝났다. 우리는 짐을 정리해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차로 데려다준 오토와 루이는 무언가를 건넸다. 아토 하루키가 쓴 일기장이었다. 이번에는 확실히 사양하려 했으나.

 

"당신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받았습니다."

 

오토와 루이는 하루키의 충직한 친구였다.

 

돌아왔다. 긴 여로는 그 자체로 독이라 피로를 푸는데 며칠은 걸렸다. 그동안 일기는 건드리지 않았다. 제대로 된 마음가짐으로 마주하고 싶어서였다. 레이지는 아버지가 읽는 것이 먼저여야 할 것 같다며 흔쾌히 양보해왔다. 하필 츠바이크도 이런 때에는 나를 배려해서 스케줄을 비워준다.

 

결국 집에 아무도 없는 어느 오후에, 나는 비장하게 일기장을 펼쳤다. 첫 장에 포스트잇이 붙어있다. 어딜 봐도 명백히 나에게 보내는 메세지였다. 읽어보면.

 

『툭 하면 혼자 삽질하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챙기느라 고생하는 동생에게』

 

"매번 삽질만 하진 않거든?"

 

항의해도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앏은 책장을 쥐고, 그대로 한 장을 넘겼다.

 

내 아들의 일기.

아토 하루키의 비망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