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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세포신곡

[논커플링]4월 4일, 에노모토 노아.

하츠토리 하지메 탄신기념 릴레이 합작 「영속신전재래 지고천」참가글.

합작 주소 : https://www.notion.so/02ebe8340c25473ea8ac25dc71410cd4


네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네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요한계시록 6:7-8

 

*

 

개기일식이 뭔지 알아?

 

맞아. 달이 태양을 가리는 현상이지. 하지만 그런 과학적인 답변 말고 좀 더 인간적인 관점에서 대답해봐. 개기일식은 뭘까? 태양빛이 한창 차올라야 할 한낮에 어두컴컴한 암흑이 찾아오는 것은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그래, 재앙이지.

여길 봐.

 

산불로 전부 불타올라 새까매진 산이 보여? 불쌍해라. 다시 무성해지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하지만 내 알 바는 아니지. 다음은 새빨개진 바다. 아하하, 진짜 웃기네. 빨간 물감을 바른 붓을 잔뜩 행군 물통 같아. 저래서야 물고기를 먹는다거나 조개를 기른다던가 하는 건 무리겠지? 그리고 저기에 처박혀 있는 게 인공위성 파편이야. 인간이 만든 고철덩어리인 주제에 별인 척 빛나다니 당연히 추락해야 마땅하지. 응? 덕분에 수원이 오염? 그러니까 그딴 거 알게 뭐냐고.

 

아~ 저기 엄청 몰려있는 바보들이 있네. 뭐라고 했더라? 「재림메시아숭배교」? 완전 촌스러. 게다가 하는 짓도 품위가 없네. 그냥 여기저기 몰려가서 소리 지르고 난동 부리는 게 전부잖아. 그래도 이렇게나 숫자가 많으니까 쉬이 밀리지는 않겠지. 지금도 여기저기서 감화되는 녀석들이 있는 모양이고. 그야 이렇게 세상이 엉망진창인데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사람이란 건 믿을 구석이 없으면 형편없이 휘둘리는 법이니까.

 

하늘을 봐. 태양이 점점 먹혀들어가는 게 보이지? 하지만 저건 달이 지구보다 앞선 위치에서 태양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야. 그 분께서 태양을 거두고자 하셨기에 거두어지고 있는 거지. 너희가 방금 그 분에게 빛나는 불꽃을 돌려드렸잖아? 그러므로 저 암흑은 이제 절대 걷히지 않을 거야. 이 은혜로운 그늘 아래에서 인간들은 서로 물어뜯고… 다투고… 절망하다… 멸망하는 거지.

 

불쾌하다는 얼굴이네. 그야 그렇겠지. 너는 지금 인류가 멸망하는 모습을 그대로 목격하고 있는 거니까. 구세주께서 묵시록에 남긴 내용 그대로.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글쎄,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해둘까. 불만스러운 표정 짓지 마. 그 외엔 달리 이유가 없으니까. 따라서 나는 너희들은 여기서 막아야 해. 그분이 원하는 대로 되도록. 그 분께서 바라는 일이 전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러니까 뭘 해야 할지 알겠지?

하루키 군.

 

*

 

“하루키 형!”

 

외침에 퍼뜩 고개를 든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늦은 뒤에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묵직한 충격이 온몸을 뒤덮었다. 그대로 힘에 떠밀려 뒤쪽으로 날아가는 와중, 누군가가 제 몸을 단단하게 붙잡는 느낌이 있었다.

 

“정신 챙겨, 아토 하루키!”

“애, 애니 씨?”

“젠장, 끝도 없군! 저 물빛 머리는 대체 뭐냐?”

 

그대로 몸을 꽉 붙들린 채 이리저리 휘둘린다. 어딘가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하나하나 피하고 있는 것인지 머리 위나 등 뒤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는 묵직한 일격이 느껴졌다. 잘못해서 직격당하기라도 했다간 뼈나 근육이 뭉개지는 건 시간문제다. 하루키의 등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오는 것과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뛰어들었다.

 

“가드 전개할게요! 다들 뒤로 빠지세요!”

“시나노!”

 

키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유백색의 막이 펼쳐진다. 애니에게 짐짝처럼 들린 상태로 전장에서 후퇴한 하루키는 자신의 몸이 방어막 뒤로 빠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엇비슷한 타이밍에 츠바이크가 다른 누군가를 허리춤에 매달아든 채로 바닥을 길게 긁으며 뒤로 물러났다. 가장 마지막으로 안에 뛰어든 것은 이소이 레이지였다.

 

“다들 괜찮아요!?”

“네, 저는 무사합니다. 꽤 기분 나쁜 환각을 봐서 입맛이 안 좋지만요.”

“사네미츠 자식은 완전 넋이 나간 얼굴인데?”

“끔찍한 환각이라도 본 게 아닐까요? 덕분에 저항이 줄어서 편했습니다.”

“어, 세오도아 씨는?”

“난 여기~.”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려보면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시나노의 뒤쪽에 슬그머니 숨어있는 세오도아가 있다. 아토 하루키를 정중하게 내려두던 애니가 그 모습을 보고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뭐하냐?”

“아무리 나라도 저런 공격은 무리야. 죽은 시체 덩어리를 골렘처럼 휘두른다니, 맞으면 뼈랑 근육이랑 혈관이 성대하게 복합골절을 일으킬걸.”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방어막에 가로막힌 건너편을 향한다. 그곳에서는 인간의 사지와 머리통을 닮았으나 결정적으로 그 형태가 일그러진 덩어리들이 한데 뭉치다시피 하며 방어막을 마구잡이로 두드리고 짓눌러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덩어리들은 마치 어떤 명령을 들은 듯 움직임을 딱 멈추더니 천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진영의 뒤편에서부터 나타난 거대한 손가락들이 군단을 감싸듯이 손깍지를 끼더니, 이내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으며 단단히 맞물린다. 그리하여 거대한 벽이 생겨났다.

 

정적.

 

“…죄송한데 저 상황 파악이 안 되고 있어요.”

“걱정 마라. 다들 너랑 똑같을 테니까. 일단 시나노는 가드 해제해.”

“넵!”

 

유백색의 막이 사라진다. 흐아, 한때는 정말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시나노의 얼굴은 제법 밝다. 아무래도 쟈부치를 상대하면서 크게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토 하루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눈에 띄는 외상은 보이지 않는다. 사네미츠는 아직도 좀 멍해 보이지만, 내버려두면 알아서 정신을 차리겠지.

 

“일단 확인해야 할 게 있어요.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본 사람이 있나요?”

“노아였어.”

 

흘러나온 목소리는 뜻밖에도 사네미츠의 것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하는 사이, 츠바이크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이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맞아… 노아였어. 청황색 말에 탄 채로, 이쪽을 보지는 않았지만, 그건 에노모토 부부의….”

“네, 저도 싸우면서 확인했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끈질겼던 그 여자에요.”

“아는 인물이라면 이야기는 빠르겠군. 그 녀석 정확한 능력이 뭐냐?”

“저희가 연구소 사건 당시에 겪은 것만 나열하면 정신 간섭, 환각, 시체 조종 세 가지입니다.”

“골고루 하네. 복수전공자냐?”

 

애니가 짧게 혀를 찬다. 하루키는 단단히 맞물린 벽으로 시선을 흘끗거렸으나, 건너편에서는 그 흔한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에노모토 노아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일단 상황을 조금 정리해볼까요. 어쩐지 다들 머리가 혼란스러우신 듯 하고, 시나노 씨는 이제 막 올라와서 상황 파악도 안 되셨을 테니까요.”

 

시나노가 찬성하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일행들에게서 딱히 거절의 의사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시선은 자연스레 이야기를 꺼낸 츠바이크에게로 모였다. 그는 이런 상황이 그리 거북하지도 않은지 가볍게 어깨를 풀며 입을 열었다.

 

“일단 시나노 씨가 첫 번째 남자와 맞붙은 뒤, 저희는 예배당에서 이어지는 계단을 통해 곧장 위로 올라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무언가가 일어났어요. 지고세포의 능력에 의한 정신간섭. 저는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츠바이크의 손끝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린다. 아토 하루키는 자신이 언젠가 맛보았던 환각의 일부를 떠올리고는 마른 침을 삼켰다. 여기 있는 전원이, 그런 것을 본 것일까?

 

“일단 저와 애니는 최대한 빨리 정신을 차렸습니다만, 그때는 이미 예배당 한복판에 그 인물이 청황색 말을 타고 앉아 있었습니다.”

“…에노모토 노아….”

“네, 자료에 존재하던 지고천 연구소의 간부. 어디서 숨겨둔 쌍둥이가 튀어나온 게 아니라면 본인이 확실하겠죠. 그렇게 말해도 제가 본 건 뒷모습뿐이지만.”

“뒷모습?”

“네. 저희가 있던 위치를 등지듯이,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거든요.”

 

이쪽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일부러 등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어느 쪽인지 판단하기도 전에 일행이 올라온 계단 방향에서 인간의 형태를 띈 덩어리들이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일단 빨리 정신을 차린 사람들끼리 덩어리 인간들을 날려 보내고 넋이 나간 일행들을 보호하며 연결통로로 향하던 와중에 시나노가 합류했고, 모두가 힘을 합쳐 3층 연결 복도로 나온 시점에서 시체덩어리로 이뤄진 손가락들이 입구를 막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도 마찬가지로 손가락들에 의해 막혀있네요.”

“파내고 위로 올라가는 건 어떻슴까?”

“불가능해. 도구도 없고, 무엇보다 강도가 엄청나다고.”

“제가 두들겨 부수면요?”

“팔 나간다, 임마.”

 

일단 위협요인은 없기 때문인지 대화는 온화하다. 하지만 여기서 언제까지고 허송세월을 할 수 없다는 점은 명백했다. 초조함이 몸속을 배회한다. 저도 모르게 입가를 문지르던 하루키는 자신이 들었던 환각의 어떤 내용을 기억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면… 에노모토 노아가 저에게 재앙을 보여줬습니다.”

“혹시 일식이 일어나는 풍경인가요?”

”네.“

“저와 애니도 같은 걸 봤습니다. 그럼 다른 사람들도….”

“비슷했슴다. 근데 좀 이상했어요. 에노모토의 전문 분야는 건조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좀 더 음습하고 교활한 방향이었을 텐데.”

“개과천선한 거 아냐?”

 

세오도아의 한 마디는 형식적인 웃음조차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애니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젠장, 일단 그 녀석을 마저 날려버려야 다음으로 이어지는 문이 열릴 것 같은데 물량공세를 쓰고 있단 말이지. 무식하긴 하지만 제한된 공간에선 효과 좋은 전략이야. 게다가 남의 정신도 쏙 빼놓을 수 있다니, 이거 최고로 성가시구만.”

“…꼭 쓰러뜨려야 하는 건가?”

 

그렇게 말한 것은 아까부터 조용한 편이던 이소이 사네미츠다. 애니와 레이지의 미간이 좁아지는 것과 동시에 츠바이크가 그 뒷덜미를 붙잡고는 앞뒤로 흔들었다. 정중하지만 힘이 실린 동작이었다.

 

“이런 얼빠진 소리를 하는 사람이 대체 누군가 했더니 제 작가님이군요. 저랑은 달리 좋은 꿈을 꾼 모양이죠?”

“그, 그건… 아니지만, 뭐랄까, 위화감이 느껴져. 살의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할까…. 물론 설득력이 없다는 건 알지만….”

“저도 거기엔 동의해요.”

 

하루키가 한숨처럼 뱉은 말에 바닥을 헤매던 사네미츠의 시선이 들린다. 아토 하루키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며 자신이 들었던 말들을 하나씩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본래… 아니, 연구소 사건 당시의 에노모토라면 좀 더 직접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주무르려 했을 거예요. 예를 들어 우리가 이 연구소 사건을 인지하지 못하고 평온한 일상을 보낸다던가, 이 사태로 희생된 사람들이 전부 우리를 비난한다던가요.”

“구질구질하구만.”

“하지만 그러지 않았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철저히 몰아붙이지도 않아요. 묘하게 소극적이라고 해야할까요.”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다는 건가요?”

“추측이긴 하지만.”

 

입술이 천천히 말라간다. 하루키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는 입을 열었다.

 

“에노모토 노아는 우리가 자신을 쓰러뜨려 주길 바라는 건지도 몰라.”

“그 집착과 끈질김의 덩어리 같은 존재가요?”

“응. 오히려 생전 그대로의 존재이기에 더더욱 그러는지도.”

 

그야말로 선문답 같은 대화다. 사람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진다. 아토 하루키는 머릿속에서 이러 저리 덧칠되는 말의 색채들 사이에서 하나의 조감도를 그리며 구체적인 결론을 이끌어냈다.

 

“지금 우리는 호스트들을 한 명씩 만나고 있죠. 어쩌면 그 호스트들을 한 명씩 쓰러뜨릴 때마다, 이 세상에 재앙이 하나씩 더해지는 건지도 몰라요.”

“쓰러뜨릴수록, 말인가요.”

“네.”

 

에노모토 노아가 말했다. 너희가 방금 그 분에게 빛나는 불꽃을 돌려드렸잖아? 불꽃이라 하면 떠오르는 이가 있다. 지고천 연구소 사건에서, 그리고 바로 방금 전에 자신들을 맞이했던 한 명의 호스트. 쟈부치 요우蛇淵 陽. 그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그의 이름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방금 그를 어떻게 했는가?

 

“그, 그럼 저 때문에 뭔가가 일어난 건가요?”

 

큰일났다~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시나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다. 자세히 상의할 사이도 없이 일행과 떨어져 한바탕 전투를 치루고 왔는데 알고 보니 그 때문에 바깥 세상에 난리가 났다고 하면 누구라도 경악하겠지. 하지만 이건 시나노의 탓이 아니다. 굳이 꼽는다면 그렇게 이루어져있는 시스템 쪽이 문제지. 하루키가 그렇게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시나노 군 탓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때는 우리 모두가 쟈부치 요우라는 인물을 쓰러뜨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말하자면 공동책임이랄까? 하지만 에노모토 노아에게서는 우리를 반드시 죽이려는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점이 걸린다는 거지, 사네미츠?”

“……응.”

“그럼 결론은 간단하네.”

 

세오도아 리들이, 이 이상 없을 정도로 가볍게 말한다.

 

“에노모토 노아와 대화를 하자.”

 

…….

……………….

 

“진심인가요?”

“나도 그냥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야. 하루키의 말에 의하면 에노모토 노아는 지고천 연구소에서 꽤 평온하게 숨을 거둔 모양이잖아? 그럼 그때와 마찬가지로 대화를 하다보면 순순히 물러나 줄지도 몰라.”

“그건 낙관적인 추측 아닌가요? 그러다 찢겨죽으면 어쩔 생각인데요.”

“다시 부활하지 뭐.”

 

애니의 주먹이 세오도아의 명치를 가격했다.

세오도아는 쿠헥, 하는 소리를 내고는 침묵했다.

 

“우리 리더가 머저리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억지로라도 돌입할까요?”

“아니. 짜증나서 잠깐 주먹이 나가긴 했지만 헛소리로만 넘길 의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솔직히 내키지 않는군. 그러니까 공평하게 다수결로 정하자. 지금이라도 저 역겨운 시체 덩어리 군단을 뚫고 들어가서 에노모토 노아의 머리통을 날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애니와 츠바이크와 레이지가 손을 들었다.

손을 들지 않은 것은 사네미츠와 하루키, 세오도아와… 시나노였다.

 

“그러냐. 정해졌군.”

 

*

 

“노아, 거기 있어? 나야. 이야기가 하고 싶은데.”

 

고풍스럽게도 문을 틀어막은 손가락을 노크한다. 세오도아의 손길을 받은 손가락들은 조금 오래 침묵하는가 싶더니, 이내 구르릉… 낮은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틈바구니에서 흙 부스러기나 뼛조각이나 역겨운 무언가들이 떨어진다. 그리하여 완전히 드러난 길목에는 방금 전 그들을 향해 죽일 기세로 덤벼들었던 인간 덩어리들이 양 옆으로 한 줄씩 죽 늘어서 있었다.

 

“위압적이네요.”

“그래도 가는 길에 갑자기 머리를 날려버릴 것 같진 않지?”

 

하루키의 속삭임에 세오도아가 농담조로 답한다.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이 경쾌했다. 그 뒤를 머뭇머뭇 사네미츠가 뒤따른다. 다소 복잡한 심경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루키는 시나노와 함께 두 사람을 따라 나섰다. 인형 덩어리들은 방금 전까지의 위협이 거짓말이라는 것 마냥 얌전히 일행을 바라볼 뿐이었다. 텅 빈 시선이 네 명분의 발자국 소리를 따라갔다.

 

바닥은 단단해서 발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진다. 마침내 예배당으로 이어지는 계단 앞까지 도달한 아토 하루키는 강한 데쟈뷰를 느끼며 저 건너편에 서있는 사람 그림자를 응시했다. 앞서 츠바이크가 설명했듯이 청황색 말에 타고 있는 이는 분명한 물빛 머리카락이었다. 묵시록에서 청황색 말에 타고 있는 자는, 죽음이라고 하였던가.

 

세오도아는 아무렇지 않게 계단을 내려간다. 청황색 말은 투레질조차 하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은 그것 하나뿐이라는 듯이.

 

그리하여.

 

“안녕, 노아.”

 

세오도아가 에노모토 노아 앞에 도달했다.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라고 물을 때는 아니려나.”

…….

 

“혹시 지금 상황에 대해서 우리에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저 덩어리들이 길을 열어줬다는 건,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의사는 있다는 뜻이지?”

………….

 

“아니면,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

 

에노모토 노아는 청황색 말 위에서 오른편을 바라보는 자세로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지고천 연구소 사건이 있던 당시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하던 때와는 영 딴판인 모습이었다. 혹시 이게 그가 짠 고도의 함정이라면? 조금 전에는 떠올리지 못했던 가능성에 갑자기 피가 식는다. 하루키가 여차하면 오리진의 능력을 한계까지 퍼부어서라도 에노모토를 멀리 날려버릴 계산을 하던 순간이었다.

 

“나는.”

 

에노모토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츠토리 님의 존재를 증거해야 해.”

“그렇구나.”

“하츠토리 님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주인이자, 유일한 창조 원리야.”

“그건 몰랐네.”

“몰랐어?”

 

이쪽을 보지 않던 시선이 움직인다. 한쪽을 바라보던 고개가 천천히 움직이며 자신들을 바라보는 움직임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하루키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그러지 않았던 것은 눈치 빠르게도 자신의 앞으로 나선 시나노 덕분이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에노모토 노아는 시나노의 존재에 대해서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모습을 마주하고 있는 사네미츠는, 도저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는 모양이다.

 

“몰랐어.”

“그럼 이제 알게 되겠네.”

 

세오도아 리들과 에노모토 노아의 대화는 온화하게 이어진다. 마치 이웃집 오빠와 옆집 꼬마아이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세오도아 리들은 예전에, 아주 예전에 지고천 연구소에서 지낸 적이 있다고 했던가. 그때 에노모토 노아는 아주 어린 아이였을 것이다….

 

“있잖아, 세오도아.”

“응.”

“나를 죽여줘.”

“…….”

“죽어서, 하츠토리 님의 일부가 되게 해줘.”

“그런 규칙이니?”

“응.”

 

이 예배당에는 시계가 없다. 특히나 신성한 예배를 보는 공간에서 현재 시간을 정확하게 표시해봤자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토 하루키는 객관적인 지표 없는 이 공간에서 마치 천 년의 시간이 지난 듯한… 혹은 3초의 시간도 지나지 않은 듯한 감각을 느낀다. 기이하고 불합리한 시간 감각.

 

“만약 죽이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안 돼. 나는 하츠토리님의 도움이 되어야 하니까.”

“우리를 그냥 보내줄 수는 없고?”

“그럴 순 없어.”

“죽으면 아플 텐데.”

“하지만 이번에는.”

 

에노모토 노아의 눈동자가 하루키를 담는다.

 

“속지 않을 거거든.”

 

…….

…………….

 

“………노아.”

 

그때까지 아무 말도 않던 사네미츠가, 입을 연다.

 

“하츠토리는… 하지메는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거야?”

“글쎄.”

“너희들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야?”

“불렸기 때문이야.”

“누가 너희들을 불렀다는 거야?”

 

에노모토 노아는 금방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세오도아.”

“응?”

“나 말야,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했어.”

“응.”

“그런데 다들 죽어버리고 떠나고 없어지고 변해버리고.”

“그러게.”

“내 지옥은 아무도 없는 곳이었어.”

“…….”

“하지만 이제 괜찮아. 여기서는 모두가 영원할 테니까.”

 

차라리.

 

차라리 저 인형 덩어리들을 모조리 부수고 쳐들어왔어야 했을까.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었을까. 이런 표정으로, 이런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마주하느니 차라리 그 편이….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들은 돌이킬 수가 없어서 영원처럼 시간에 새겨진다. 세오도아 리들이 에노모토 노아에게 느리게 말을 건네는 모습이 마치 연속사진처럼 망막 위에 선명히 새겨졌다.

 

“노아, 아직 깨닫지 못했어?”

…….

 

“너는 말야.”

………….

 

“이미 죽었어.”

……………………….

 

아, 하고 에노모토 노아가 조금 크게 눈을 뜬다. 마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지났음을 깨달은 아이처럼, 아까부터 계속 애타게 찾아 돌아다녔던 물건이 제 주머니에 꽂혀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린 사람처럼.

 

“맞아, 그랬지…. 그럼 나, 하츠토리 님에게 가야 해. 직접 가야 해.”

 

에노모토 노아가, 청황색 말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려 한다. 그의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리면서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 예배당 바닥 위로 올라서고

 

퍼석.

 

마른 소리와 함께 어떤 덩어리가 자리에 모래처럼 무너져 내린다. 무심결에 상대의 몸을 잡아주려는 듯이 손을 내밀었던 세오도아의 옷자락에 그 파편들이 살짝 묻었다.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저 멀리에서 마른 모래가 무너지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인형들도 주인을 잃고 존재이유를 잃어버린 것이다.

 

아니면 돌아가야 할 존재에게로 돌아갔거나.

 

한동안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1층으로 돌아가 대기하고 있던 돌격조가 무거운 발소리를 내며 예배당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듬직하게 서있던 청황색 말은 어느새 꿈결처럼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끝났냐?”

 

애니가 묻는다.

세오도아는 손끝을 조금 문지르고는.

 

“끝났어.”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4월 5일, 이소이 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