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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메이커 판타지]기사와 주인의 이중주


진眞 성기사.

그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하다. 모든 성기사들 사이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고 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르른 자들을 일컫는 말. 허나 그 말이 신의 영광에 감싸여 있었던 것도 머나먼 과거의 일. 천년전쟁이 끝나고 바스러진 대륙들이 꾸덕꾸덕 달라붙기 시작한 지금에 와선 성기사의 이름따위 검을 든 자들의 치졸한 간판으로 추락했다. 옛 영광은 투박한 금화보다 찬란하지 못하고 명예란 한 덩이 빵보다 형편없는 것. 그런 와중에도 꿋꿋이 옛 가치를 지키려한 자들은 존재했다. 이를테면 만돌리안 왕국의 전 성기사단장 셴즈가 그러했다. 

그는 한탄했다. 검을 찬 이들이 외치는 정의가 빠르게 변질되어가는 것에.
그는 절망했다. 길거리의 비탄이 사람들의 선의와 선량함을 빠르게 좀먹어가는 것에.
그는 헤매였다. 모든 것이 먼지처럼 무의미해진 대륙을.
그는 생각했다. 허물어져버린 톱니바퀴를 짜맞출 방법을.
그는 깨달았다. 역병과 식량난으로 죽어가는 마을에서 희미하게 숨이 붙어있는 아이를 발견한 순간.
그는 가르쳤다. 아이가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메마른 바람에도 비틀려 죽어버리지 않도록. 
그는 노력했다. 자기 자신조차 믿으려하지 않는 소녀에게 덕목과 명예를 불어넣어 되살리기 위해서.

그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아이는 16세 생일이 되던 날 제 하나뿐인 아버지이자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이를 땅에 묻고 터덜터덜 길을 나섰다. 그 길 끝에는 남자가 죄책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등지고 말았던 국가가 있었다. 물론 순탄치는 않았다. 문지기들은 생전 처음보는 아이가 내민 기사단장의 증표를 두고 절도를 의심했다. 전 기사단장이 자신을 먹이고 길러주며 기사의 정신을 가르쳐주었다는 말에는 지나가던 기사들이 웃었다. 그 중 하나가 반 장닌 삼아 대련을 시켜주지 않았더라면 소녀는 그대로 대륙을 방랑하는 처지가 되었으리라. 허나 기사의 붉은 술을 뜯어낸 뒤에도 문제는 여전히 존재했다. 전쟁에서 입은 상처가 곪아 숨을 거둔 왕을 대신하여 자리를 물려받은 왕의 동생은 남루한 행색의 방문객을 붉은 카펫 위의 얼룩 취급하며 손짓 한번으로 쫓아내려 했다. 전왕에 이어 현왕을 보필하고 있던  마들렌 왕비의 제제가 아니었더라면 허드렛일꾼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였다. 왕비는 왕실이 영광에 차있을 때 홀 안에 늠름하게 서있던 경비대장을 기억했다. 전쟁이 끝난 뒤 제 손으로 죽인 이들에 대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왕을 등진 그의 등도 기억했다. 만약 여기서 저 아이를 쫓아내면 이번에야말로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어진다. 그리 생각한 그녀는 어렵사리 아이의 신병을 제 셋째 아이의 호위기사로 두는데 성공했다. 기사가 된 아이는 오래도록 왕실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1년이 지나고 기사는 진眞 성기사가 되었다. 뛰어난 무훈이나 업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왕의 명령이 있었다.

[모든 기사는 세례를 받고 일정한 시험을 거치면 성기사의 칭호를 얻는다.]
[성기사에 적을 두고도 왕족을 수호하는 자들에게 진眞의 호칭을 내리겠다.]

그것뿐이었다. 기사는 당연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스승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냈거나 사악한 존재를 물리친 이들에게 신의 은총처럼 진眞의 호칭이 내려온다고 말했다. 그런데 왕의 행동은 어떤가? 마치 상인들이 물건에 가격표를 매기듯 명예를 남발하지 않는가? 기사는 의문을 품었다. 그 의문의 끝에 단순히 나라의 국력을 부풀리고 싶어하는 왕의 유치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은 셋째 왕자였다.

"숙부님은 바보야. 겉으로만 부풀리면 타인들이 속을거라고 생각하거든."
"폐하를 그렇게 부르시는건 아니됩니다. 왕자님."
"그런 식으로 예의차리는 너도 바보같아. 셴즈도 멍청이야. 어머니도 그래. 전부 바보멍청이라고."
"전하."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아. 제발 물러가."

기사는, 아니 이제는 진眞 성기사의 칭호를 얻은 자는 조용히 물러나왔다. 때는 봄이었고 잦은 봄비 사이로 파릇한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왕이 국가 내의 모든 기사들을 모아 전람 경기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정한 것은 새싹이 곧은 줄기를 세우기도 전의 일이었다.

"숙부님이 드디어 미쳤구나. 우리의 위대한 성기사들은 성경 구절만 외울 줄 아는 머저리들이야. 전람경기라고? 그래, 아주 좋은 볼거리가 되겠지. 상대의 칼질 한 방에 머리와 팔다리가 뚝뚝 떨어져 나갈테니."
"왕자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잘난척 하지마. 네 머리도 떨어질거야."
"셴즈 스승님은 절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머저리."

셋째 왕자는 짝 소리나게 기사의 뺨을 때렸다.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자는 몇 번이고 화풀이처럼 손을 휘두르다 선언했다.

"나도 따라간다."
"왕자님, 외람되오나"나도 따라간다고 했다. 거스를 셈이야?"
"…아닙니다."
"좋아."

왕자는 총총이 앞서나갔다. 기사는 그 뒤를 따라걸으며 자신이 전람경기에 나가 돌아오지 못할 경우 붉은 왕족의 방에 홀로 남겨질 왕자를 생각했다. 바로 조금 전에 왕자가 떠올렸을지도 모를 고독과 슬픔을 상상했다. 왕자는 그런 걸 겪기에는 아직 끔찍하도록 어리다… 그러나 어리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이 기사가 꿋꿋이 거절하지 못한 이유였다. 자신과 비슷한 듯 하지만 조금 더 강하신 분. 아름다우신 분.

그러나 만약 그분이 먼저 숨을 거두시면?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기사는 삐걱대는 몸을 채찍질하며 짧은 숨을 들이쉬었다. 머리 위로 뚤힌 거대한 동공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높이는 제법 높다. 떨어지면서 자세가 뒤틀려 착지하자마자 목이 부러져 죽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기사는 계산 대신 후들거리는 팔 안의 감촉을 확인했다. 한 사람분의 머리와, 몸과, 팔다리에 배어있는 온기와 숨결. 그래, 왕자님은 무사하셔. 나는… 나도 물론 무사하지. 숨만 붙어있다면 대체 무엇이 문제겠어?

왕자는 기절한 모양인지 말이 없다. 마음같아선 편하게 눕혀드리고 싶지만 언제 어디서 유적 뱀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선 너무 무모한 시도였다. 대신 기사는 땅 위의 기사들을 생각했다. 자신과 같이 성기사의 이름을 얻고, 더러는 진眞의 칭호를 붙인 채 진군하던 자들은 과연 얼마나 살아남았을까? 

어쩌면 살아남지 못했는지도 모르지.

다리가 욱씬거렸다. 기사는 왕자를 품에 앉은 채 천천히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허리춤의 칼을 미리 뽑아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적 뱀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지만 그 '느껴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유적 뱀의 특기이자 장기가 아닌가.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던 기사는 저 어둠 너머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유적 뱀의 시선? 순간 몸을 긴장시키며 검을 틀어쥔 기사였지만, 그 빛이 생물의 눈이 아니라 단순히 위에서 새어들어온 햇빛이라는 걸 아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들처럼 유적 아래로 떨어진 사람이 있는걸까? 기사는 왕자의 몸을 안아든 채 천천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적 안쪽은 습기찬데다 어둡다. 몇 번이고 미끄러질 위기를 넘기며 빛을 향해 다가가던 기사는 거대한 동공과 함께 제 눈 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곳에 있던 것은 기사의 몸보다 두배는 커보이는 갑옷 조각상이었다. 누가 대체 어떻게 조각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그 조각상의 위용에 기사는 압도당했다. 분명 살아있을 리가 없는 장갑병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이곳은 안전하다는 확신도 함께 들었다. 기사는 그때까지 자신이 안고있던 왕자를 망토로 둘러 동굴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은 뒤 다시 한번 찬찬히 조각상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점토같아 보이는 동상의 표면을 쓸어보자 자잘한 흙먼지가 잔뜩 일어난다.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거듭 표면을 쓸어보던 기사는 자신이 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제 손바닥 아래에서 단단한 금속이 되어가고 있음을 깨닫고 깜짝 놀라 손을 뗐다. 하지만 물결치듯 퍼져나가기 시작한 변화는 금새 조각상 전체를 뒤덮었고, 기사가 채 물러날 틈도 없이 온전한 동상의 형태를 갖추게 된 갑옷이 대량의 증기를 토해내며 단단해보이는 뚜껑을 열어젖혔다. 열린 뚜껑 사이에서는 기사가 잘 알 수 없는 언어가 쉴새없이 흘러나왔다.

"너 무슨 짓을 한거야?!"
"왕자님! 기침하셨습니까!"
"지금 그딴 인사를 나눌 상황이야?! 저게 뭔줄 알고 함부로 건드려! 저건--"

이제는 완전히 내부를 드러내고 있는 거대갑옷을 손가락질하며 목소리를 높이던 왕자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다. 조용해진 동공 안에 공중으로 피어오른 증기들이 산산히 흐트러지는 소리만 버석거렸다. 기사는 왕자가 겁에 질렸음을 알았다. 언제나 강한 모습만 보이려하는 왕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엇다. 뒤집어 말하자면, 그만큼 공포스런 상황이 일어났다는 뜻도 된다. 기사는 왕자의 몸을 제 몸으로 가린 채 신중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왕자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건, 고대의 병기인데…."

활짝 열린 갑옷 안에 햇살이 비쳐든다. 큼직한 덩치에 비해 빠듯해 보이는 공간에는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이, 하나. 그녀와 비슷해보이는 청년의 모습은.

"왜 너랑 똑같이 생겼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전하. 

기사는 자신이 똑바로 목소리를 내서 말했는지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가 가슴에 구멍을 내어 제가 해야할 언어를 허공으로 봅아내버리는 긋한 현기증에 머리가 어찔거렸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마냥 있을 수만은 없었다. 기사는 갑옷 속의 사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 부리나케 달라붙은 왕자는 기사의 행동이 어이없다 못해 기가차는 모양이었다. 

"뭐하는거야! 미쳤어!?"
"미치지 않았습니다, 전하."
"근데 왜 굳이 확인하러가는거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확인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기분이 듭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닥쳐! 그딴거 허락할 것 같아?! 명령이다! 날 여기서 당장 데리고 나가!"

이제까지의 기사였다면 당연히 호기심을 누르고 셋째 왕자를 피신시켜야 옳았다. 하지만 기사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다가가, 왕자가 자신을 억지로 멈춰세우려는 것조차 강제로 밀어내다시피 하며 마침내 갑옷 속 청년에게 도달했다. 무척이나 짧은 머리마저 똑같은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거울 속 자신이 잠들어있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셋째 왕자는 거의 울부짖다시피하며 그녀의 손을 물어뜯었다. 물론 아팠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 기사는 제 분신을 마주하고, 천천히 갑옷 안으로 상체를 집어넣어 이마를 맞댔다. 차갑고, 서늘한 감촉이 이어지고 고개를 뒤로 뺐을 때, 기사는 눈을 뜨고 자신을 응시하는 남자를 보았다. 그녀의 녹색 눈과 달리 선명할 정도로 붉은 눈이었다. 그리고, 찬연한 목소리.

"Master, I'm glad to see you in here."
"아… 에?"
"고대어야.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이 자식은 널 '주인'이라고 부르고 있어."
"저를? 하지만 방금 이 남자를 두고 고대병기라 하지 않으셨나요?"
"병기야. 고대인들이 직접살인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살인병기. 그리고 넌 내가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이걸 깨웠지. 이제 어쩔 셈이야?"
"……."

그건 간단하지만 너무나 무거운 질문이었다. 기사는 등 뒤의 왕자를 응시하다 저를 주인이라 부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희미한 미소를 띄고 있는 그 얼굴은 얼핏 매력적으로 보이면서도 한없이 공포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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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ktlanはとある王国の真聖騎士。各国間で催す展覧試合に参加するよう命じられた。落盤で迷い込んだ遺跡の深奥で各坐した鋼の巨人とその装甲の内で眠る青年を見つけ…
Miktlan은 어느 왕국의 진 성기사. 각국간에 열리는 전람대회에 출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낙반으로 인해 흘러들고만 유적의 깊은 안쪽에서 주저앉은 강철거인과 그 안에 잠든 청년을 발견하고…

즐거웠습니다. 좋은 이벤트를 마련해주신 헤라이온 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