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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러라도 안 서러운 이세계로 감

뭔가가 이상하다.

 

퇴근 전에는 몰랐다. 출근길에 꾸벅꾸벅 졸다가 회사에 도착해서 오전 업무를 보고,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 회의 준비를 하고 회의가 끝난 뒤엔 회의록을 작성하느라 바빴던 탓이다. 그 사이 어떤 일이 일어났다. 어쩌면 이미 일어난 뒤였는데 내가 눈치채는 게 늦었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그 일을 알아차린 것은 오후 6시 24분이었다.

 

내 연성계 트위터 알림이 너무 많이 도착해서 숫자 뒤에 +마크가 붙어있었다.

 

나는 가장 먼저 『조리돌림』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사실 놀랍지는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니까. 그러나 나는 내심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출근하고 업무를 보면서도 트윗을 몇 십 개씩 쓰는 중증 트위터리안인 주제에 퇴근할 때까지 트위터 앱 아이콘 하나 눌러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미룰 수 없다. 어제 내가 쓴 트윗은 그 정도의 역풍을 맞아도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모래를 씹는 기분으로 알림창을 눌렀다. 가장 위쪽에 내 트윗을 인용알티한 트윗이 보였다.

 

가좍들아 이 분 연성 보고 가라. 

 

조금 의아했지만, 요즘 싸불 멘트는 이런 느낌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대로 아래쪽의 알림을 스크롤 했다. 이제 곧 전철이 들어온다는 안내방송과 함께 눅눅한 바람이 세차게 내 몸을 휘감았다. 그동안 내 동공은 수축했고 호흡은 멈췄으며 화면을 스크롤하는 손가락만이 빨라졌다. 내 알림창은 인용알티와 알림과 마음 알림의 홍수로 가득차 있었고.

 

이 분 연성 모르는 사람이랑 겸상 안 함.

 

뭔가가.

 

흐아악 이 연성 진짜 좋아 마지막에서 걍 전율했다ㅠㅠㅠ 역시 믿고 가는 내 캐해석의 바이블 존잘님 사스가데스ㅠㅠㅠ 

 

뭔가가.

 

언제나 해피 님 외 271명이 내 트윗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존잘님 연성을 보면 리트윗하는 계정 외 345명이 내 트윗을 리트윗했습니다.

미친 나 이거 왜 이제 봤냐? 인생 존나 개손해봄

으앙 존잘님 사랑해요ㅠㅠㅠㅠㅠㅠ 

 

뭔가가 이상하다!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앱이 오류를 일으켰나? 나는 황급히 프로필을 확인했지만 화면에 표시된 인장과 닉네임은 틀림없는 내 연성계였다. 그 순간 나는 더욱 무시무시한 것을 발견했다. 인장과 닉네임 아래에 표시되는 팔로잉 숫자와 팔로워 숫자. 그 중 앞의 숫자는 크게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뒤쪽의 팔로워 숫자는 명백히 이상했다.

 

팔로잉 32  팔로워 624

 

내가 피곤해서 헛것을 보나? 눈을 세게 비비고 다시 화면을 봤지만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팔로잉 32 팔로워 624. 하지만 오류가 분명했다. 트위터가 쓸데없는 기능을 만들다 없애고 다시 개발하기를 반복하다가 치명적인 네트워크 오류 어쩌고를 발생시키는 바람에 내부 데이터를 다 섞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나는.

 

[연성계] 솨뫄솨

 

글러. 현재 NMO 장르 주력. 주간연재파지만 단행본 정발본 이전 스포일러는 후세터 사용합니다! 자기소개는 매인트를 참조해주세요. FUB 프리.

 

나는 글러란 말이다!

 

*

 

글러. 그것은 동인계에서 주로 쓰이는 용어로, 글을 쓰다의 '글'과 영어권에서 ~하는 사람의 뜻을 지니는 단어 'er'을 결합한 호칭이다. 어원에서 알 수 있다시피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나 자캐를 글로 연성하여 활동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며, 이들은 문장과 단어를 조합하여 자신의 상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글을 쓰는 데에 특정한 기술이나 유틸리티가 필요한 것도 아니기에 입문하기도 쉽다. 

 

그러나 동인계에서 글러로 활동하는 것은 쉽게 권유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글 연성은 인기가 없기 때문이다.

 

좀 더 노력하면 모두 좋아해주지 않을까요? 라던가 모두가 제 연성을 좋아해줄 순 없잖아요, 같은 기특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글러로 지내다보면 알게 된다. 글 연성은 누군가가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의 차원을 넘어서 조명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글러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다.

 

나는 그걸 오래 전부터 체념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따금 참을 수 없는 감정이 불쑥불쑥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지난 주에는 그 감정을 참기 어려웠다. 나는 결국 현 동인의 인식에 대한 항의를 가득 메꿔넣은 글을 쓰고 다듬기를 며칠간 반복하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연성계에 문서 공유 링크를 공개했다. 그게 어젯밤의 일이다.

 

그리고 지금 트위터에 들어가보니 내 팔로워가 624명이 되어있다.

미친건가?

 

나는 얼이 빠진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핸드폰을 껐다 키고 트위터 어플을 삭제했다 다시 깔아도 팔로워 숫자는 그대로였다. 뿐만 아니라 내가 과거에 올린 NMO 장르 연성도 세 자리 단위의 알티와 마음을 달고 있었다. 가장 마지막에 리트윗 8 마음 8 정도밖에 받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결국 나는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트친인 A는 나와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이자 함께 NMO 장르를 파는 동료이기도 하다. (비록 나와는 파는 커플링의 방향성이 다르지만) 내가 메신저 프로그램을 통해 연락을 넣자 A는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했다. 하지만 내가 설명한 소리를 듣고는 한참동안 반응이 없었다. 나는 괜히 애가 닳아 애꿎은 책상만 두드려댔다. 마침내 A로부터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네가 알기론 글 연성은 취급이 바닥인데, 하루 아침에 글 연성이 인기짱이 된 게 이상하다고?」

「맞아! 도대체가 영문을 모르겠다니까? 나 혹시 모르는 데서 싸불 좌표 찍힌 거 아냐?」

「영문은 내가 모르겠다. 글 연성이 왜 취급이 바닥이야? 사람들 글 연성 좋아하잖아.」

「물론 좋아하겠지! 그치만 그림 연성이랑 글 연성이랑 놓고 보면 그림 연성이 더 인기 많잖아???」

「그런게 어딨냐? 연성이 다 사람 정성 들어간건데 취향이 다른 것도 아니고 글이냐 그림이냐로 다르게 좋아한다고? 그건 연성한 사람한테 엄청나게 실례지. 너 좀 이상한 소리 한다.」

「아니」

 

맞는 말인데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렇지. 연성은 사람이 한 일인데 그렇게 구분하는게 이상하지. 내가 버벅이는 사이 A의 메세지가 이어졌다.

 

「꿈을 너무 생생하게 꾼 거 아냐?」

「꿈이라니…」

 

하지만 꿈은 아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세상은 여전했고, 변한 점이 없었고….

다만 창작 플랫폼 한 곳이 웹툰 온리 사이트로 재출범한다는 공지를 올렸을 뿐.

 

「B게이트? 거기 소설 전문 플랫폼이잖아.」

「뭐라.」

 

후다닥 들어가보니 정말이었다. 그림 업로드를 제외한 모든 기능 요소를 하나씩 배제하는 바람에 온갖 좋지 못한 소리는 있는대로 들어먹던 B게이트는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1차 및 2차 웹소설이 체계적으로 업로드되는 사이트로 변해 있었다. 메인 구성도 이미지가 아니라 작품의 제목과 작가의 이름이 강조되는 타이포 디자인이다. 나는 그걸 쳐다보다가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이거 뭐야?

대체 뭐야?

나 드디어 머리가 돌아버린 건가?

 

문득 핸드폰이 눈에 들어온다. 평소의 버릇처럼 잠금을 해제하고 트위터를 킨 나는 15개의 알림을 발견했다. 알티와 마음 알림 사이사이에 내 연성을 본 사람들의 긍정적인 인용알티와 트친들의 감상 멘션이 섞여있었다. 글러라면 누구나 꿈에 그리던 상황이다. 그런데 이게 실제로 이루어지는 일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어제 올렸던 항의글이 없는 것도 그 생각에 박차를 더했다.

 

「영 믿을 수 없으면 말야.」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고개를 들어보니 A가 마지막으로 보낸 메세지가 눈에 띄었다.

 

「그냥 자는 사이에 이세계에 왔다고 생각하지 그래?」

 

농담일까. 아마도 농담으로 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런가, 나는 이세계로 온 건가. 항의글을 쓰고 잠든 것을 계기로 글러가 홀대받고 찬 밥 취급 당하고 온갖 서러운 꼴 다 보는 세상에서 그렇지 않은 세상으로 차원이동을 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어쩐지 믿을 수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많은 차원이동물에서 주인공들이 얼마나 사소한 트리거로 자신이 살지 않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던가.

 

「그런 걸로 상처입는 건 너무 슬프잖아.」

 

그 말 앞에서, 나는 조금 멍한 마음으로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어지지 않습니다.

제목 모티브는 정수월 작가님의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에서 빌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