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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고스트 메신저

[투림] 신부님과 강림

소년은 언제나 아침 햇살이 땅에 내려앉기 전에 교회 앞뜰을 청소했다. 아무도 오지 않아 흙먼지와 잡초만 가득하던 앞뜰이 그나마 교회답게 꾸며진 것은 소년의 공이 컸다. 소년이 그렇게 부지런을 떠는 동안 소년의 맞은편 방 침대에서는 부스스 일어난 신부가 옷을 걸쳤다. 이따금 단추를 잘못 끼우기도 했고, 안쪽의 소매가 흉하게 삐져나오기도 했다. 그걸 일일이 타박하며 옷차림을 정돈해주는 것도 소년의 역할이었다. 우리 마을의 하나뿐인 신부가 이런 모자란 아저씨라니. 소년이 투덜거리면 신부도 질세라 맞받아쳤다. 그 모자란 아저씨 덕분에 살아남은 아가가 누구더라? 그럼 소년은 신부의 정겅이를 있는 힘껏 걷어차고 도망쳤다. 신부는 저릿한 다리를 문지르며 소년의 뒷모습을 향해 이를 갈곤 했다.


소년은 시장에서 갓 구운 빵과 오래 된 빵을 구별하고 신선한 야채를 골라내는 방법을 알았다. 뭣도 모르고 상하기 직전의 음식을 덥썩덥썩 사오기 일쑤인 신부를 대신해 소년이 장을 보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소년이 처음 장을 보고 돌아온 날, 신부는 따뜻하고 말랑한 빵을 받아들고 굉장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빵이란건 다 딱딱한 줄로만 알았는데. 소년은 타박했다. 맨날 끼니는 내팽겨치고 성경이나 읽어대니 그렇지! 퇴마랑 성경 읽기 말고는 할 줄 아는게 없어? 신부는 잠깐 생각하다 대답했다. 닭은 잡을 수 있어.


닭의 목을 잘라 피를 빼낸 뒤 털을 뽑고 가죽을 벗겨 몸통을 여러 번 잘라 정리한다. 그가 닭을 쫓다 엉덩방아라도 찧는 모습을 볼 요량으로 뒷뜰을 훔쳐보던 소년은 자신의 예상이나 그 허술해보이는 외모와 달리 모든 과정을 일사불란하게 끝마치는 신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도망쳤다. 다만 식탁에 오른 닭고기의 양은 초라하도록 적었다. 닭을 잡는다더니 병아리를 잡았어? 소년의 물음에 신부는 어설픈 헛기침 소리를 냈다. 원래 한 마리로 일주일은 버텼어. 난 성장긴데? 이걸 먹고 어떻게 버티라고? 또 신부가 발끈할 것을 기대하며 빈정거리던 소년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 몫의 접시를 들고 식당을 나가버리는 신부의 모습에 당황했다. 뭐야, 내가 그렇게까지 심한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소년의 고함이 사그라들기도 전에 돌아온 신부는 좀전보다 묵직한 고기덩이가 얹힌 접시를 내려놓았다. 겸연쩍어진 소년 앞에서 신부가 빵을 씹어삼켰다.


이따금 손님이 찾아오기도 했다. 대부분은 간단한 기도나 고해성사, 별 것 아닌 잡담을 하고 돌아갔지만 드물게 이 자에게 악령이 씌였으니  어떻게 해결해달라며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마다 신부는 성수와 은십자가를 포함한 장비를 갖추고 '손님'과 함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이따금 찾아온 이를 따라 교회를 비우는 일도 있었다. 소년은 어디에도 동행할 수 없었다. 악령을 퇴치하는 자리에 끼기엔 수련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내 몸 보신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다고! 처음 몇 번은 그렇게 호기롭게 외치며 억지로 따라갔던 소년이었지만 아차 하는 사이에 악령에게 몸을 뺏기고 일주일을 내리 앓은 뒤론 약간의 자제심을 갖추게 되었다. 그때 파리한 안색으로 소년의 곁을 지키고 있던 신부는 힘겹게 눈을 뜬 소년의 머리를 쥐어박았더랬다.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손님도 있었다. 척 보기에도 위엄있는 마차를 타고 찾아오는 은발의 신부는 검은 신부와 달리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올 때마다 신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소년을 교회 바깥으로 쫓아냈다. 이를테면 마을의 모든 신도들을 찾아가 문제는 없는지 살펴보고 오라거나 교회의 촛대 숫자가 부족하니 옆 마을 교회에 가서 빌려오라는 식의 심부름이었다. 당연히 시간은 아주 오래 걸렸고 소년이 겨우 돌아오면 은발의 신부는 벌써 떠나고 없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신부는 명백히 새파란 안색으로 가만히 앉아있곤 했다. 그 사람이랑 무슨 얘기를 했어? 소년이 물으면 신부는 입술 끝을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꼬마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를 했지. 소년은 당연히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또 한번의 방문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럴 듯한 핑계를 대고 바깥으로 쫓겨난 소년은 곧이곧대로 말을 듣는 대신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숲 언저리에 숨어 안뜰을 엿보았다. 마차가 멈추고 돌길을 걸어온 은발의 신부가 그를 마중하러 나온 신부와 몇 마디 말을 나눈 뒤 교회 안쪽으로 들어갔다. 틈을 놓치지 않고 교회로 돌아온 소년은 그들이 어디로 들어갔을지 가늠해보다 멀리서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를 들었다. 달궈진 돌에 물을 끼얹을 때 들릴 법한 소란스런 소리도 들렸다. 영문을 알 수 없어 신발조차 벗어던진 맨발로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교회 안쪽으로 탐색하던 소년은 어느 낡은 문짝 사이에서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성수를 흠뻑 뒤집어 쓴 신부를 목격했다. 


 내장을 긁어내듯 성경을 외며 고통스러워 하는 신부의 목소리는 언제 끊어질 지 알 수 없는 거미줄처럼 위태로웠다. 작은 병에 담긴 물을 그의 머리외 몸에 뿌리며 기도문을 읋던 은발의 신부는 신부의 목소리가 잦아들 때마다 다른 손에 쥐고 있던 짧은 채찍을 가차없이 휘둘렀다. 고통스런 신음이 터질 때마다 뻗어나는 가지들 사이로 배어나온 붉은 핏줄기가 피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것보다 소년의 뇌리에 더 깊이 파고든 것은 신부의 왼손이었다. 기이하게 부풀어올라 얼룩덜룩한 갈색 피부에 투명한 물이 닿을 때마다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 모든 일에 죄를 저지르지 아니하고 하느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신부가 비명처럼 외칠 때마다 팔뚝에 돋아난 푸른 눈알이 꿈틀거렸다. 만약 거기에 입이 달려있었더라면 온갖 저주를 퍼부었을지도 모를 난폭한 움직임이었다. 소년이 꼼짝도 못하는 사이 시간은 끔찍하게도 흘러갔고 성수와 성경구절을 이겨내지 못한 푸른 눈알은 하나 둘 씩 기운을 잃고 툭툭 굴러 떨어졌다. 눈알이 닿자마자 슛슛 소리를 내며 녹아버린 돌바닥에선 지옥에서 갓 퍼온 듯한 악취가 솟았다. 소년은 치솟는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몸을 진정시키는 데에는 구토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소년이 간신히 돌아욌을 때 은발의 신부는 이미 떠난 상태였다. 소년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낼 생각도 않고 교회로 걸어 들어갔다. 신부는 피곤한 얼굴로 평소와 똑같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소년의 기척을 눈치챈 그가 고개를 들었다. 소년은 물었다.


그 신부랑 뭘 했어? 


대답은 한결같았다.


꼬마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이야기를 했지.


하지만 소년은 이제 알고 있었다. 악마가 아니고서야 그런 흉칙한 흔적은 남지 않는다. 신부도 소년처럼 악마를 불러냈던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어쩌면 죽은 누군가를 살려내기 위해서. 그리고 악마가 들러붙었겠지. 흔한 이야기다. 어쩌면 소년 자신의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흔해 빠진 이야기였다.


소년은 가만히 그의 몸을 부축했다. 파리한 얼굴과 검은 신부복에서 좀전의 피비린내가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