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차 창작/고스트 메신저

[투림]어디에나 존재하는 흔한 설화

 

옛날, 마을 뒷산 깊은 계곡에 이무기가 한 마리 살았다. 천년간 물 속에서 지내며 수행을 쌓은 이무기는 용이 되어 승천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천년째 되는 날이 지나도 이무기의 승천길은 열리지 않았다. 이무기는 난폭해져 비구름을 흩뿌리고 논밭을 망치는 등 사람들을 괴롭히며 난동을 부렸다.

 

비구름이 모이지 않으니 비가 내리지 않고 가뭄이 심하게 들어 사람들은 몹시 고통받았다. 이에 마을 촌장의 아들이 나서 하소연을 하니 이무가가 자신이 승천할 방법을 알아낸다면 비를 내려주겠다 하였다.

 

촌장의 아들은 이무기가 승천하지 못한 이유를 찾아 전국팔도를 헤매다 어느 도인을 만나 비로소 답을 얻었다. 이무기는 천 년간 두 개의 여의주를 지니고 수련을 하는데, 이 중 하나를 버려야 능히  용이 되어 승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촌장의 아들은 이무기에게 그 사실을 전했고, 큰 깨달음을 얻은 이무기는 여의주를 그에게 넘기고  승천했다. 이무기가 승천하면서 내린 비는 삼일으로 밤낮 땅을 적셨으며 이후 아무리 가문 여름에라도 마을 논밭이 갈라지는 일이 없었다.

 

=

 

“진짜 기억 안나?”

“안 나. 그게 언제적 이야긴데.”

 

계곡 깊은 곳의 절벽. 뻥하니 뚫린 동굴 안쪽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남자의 손끝에서 과일 껍질이 툭툭 벗겨져나간다. 나무를 깍아 만든 우묵한 접시에는 그런 식으로 손질된 과일이 이미 한 가득이었다. 보통 때 같으면 그 빛깔과 향기가 아까워서라도 사양 않고 입에 넣었을 테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다. 아마 지금부터 꺼낼 이야기 때문이겠지. 소년은 마른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럼 여의주가 부서진 것도 모르겠네.”

 

반쯤 깎인 과일이 용의 손 안에서 으스러졌다.

 

“부서져? 그게? 왜?”

“나 태어나기 전에.”

“맙소사.”

 

터진 과일의 즙이 팔을 타고 흐른다. 그것도 모르고 제 머리를 헤집어대던 용은 뒤늦게 손가락에 묻은 과일즙을 알아차리고 성가신 표정을 지으며 손을 털었다. 부지불식간에 드러난 용의 손톱이  탁하게 빛났다.

 

“그때 마을에 심한 역병이 돌았어.”

“역병… 그것 때문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또 돌아.”

 

고즈넉한 밤은 더웠고 어딘가의 수풀에서 찌르륵 우는 벌레 소리가 선명했다. 하얀 달빛이 동굴로 한가득 밀려와 용 한 마리와 사람 하나의 몸을 적시다가 두터운 구름에 밀려나갔다. 어둠 속에서 용의 푸른 안광이 빛난다. 소년은 깊이, 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숨결조차 닿지 않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치솟는 열을 견디지 못하고 헛소리를 하다 이제는 숨만 가냘프게 쉬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일렁거렸다.

 

“…찾아온 이유가 그거냐?”

“아저씬 용이잖아, 여기서 계속 살았잖아…. 어떻게든 좀 해봐!”

“아무리 용이라도 사람들에게 관여하는덴 한계가 있어.”

“웃기지 마! 우리가 아니었으면 아직까지 땅에 처박힌 뱀이었을 주제에!!”

 

맞부딪치는 목소리가 동굴 안을 짜랑짜랑하게 흔든다. 제 몸에 가득 찬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일어선 소년은 용을 노려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다 이내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악과 오기로 굳어있던 무릎이 억눌린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마구 굽어졌다.

 

“아냐, 아니에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사과드릴게요. 이렇게 빌게요, 제발 부탁이니까 우리 할아버지 좀 살려주세요….”

“꼬마야.”

“쓰러진 지가 며칠 짼데 아직도 못 일어나세요, 이러다간 진짜 돌아가실 지도 몰라요, 엄마도 아빠도 다 돌아가셨는데 할아버지까지 돌아가시면 전 정말 못 살아요 제발 한 번만 도와주세요, 제발 제발 딱 한 번만!”

“강림아!”

 

용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간신히 닿은 옷자락을 감히 움켜쥐며 애원하는 소년을 부른다. 우연찮게도 서로가 같은 이름이었기에 둘만 있을 때에는 굳이 소리 내어 부르지 않았던 이름이 다른 누구에게서 듣는 것보다 어색한 울림으로 퍼져나갔다. 소년은 차가운 동굴 바닥에 이마를 댄 채 꼼짝하지 않는다. 그 아래에서 간절한 애원의 말이 끝없이 샘솟았다. 용은 엎드린 소년의 몸을 감싸안다시피 하며 몸을 숙이곤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인간의 운명에 용이 관여할 순 없어.”

“…….”

“그게 규칙이야. 정말 미안하다. …난”

 

말허리를 잘라내듯, 칼이 허리춤을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고통과 타들어가는 아픔에 반사적으로 소년의 몸을 내친 용은 자신이 한 짓을 채 깨닫기도 전에 바닥에 점점히 흩어지는 피와 맑은 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단도를 보았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러간 소년이 고개를 든다. 가벼운 찰과상이 가득한 얼굴에, 감정이 꽉 들어차 터질 것 같은 눈동자가 한 쌍. 용은 무슨 말을 하려다 그대로 고꾸라지는 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닥을 기었다. 이제껏 살아온 수 천년의 세월이 무색하게도 바람 앞의 버들처럼 속절없이 몸이 떨렸다. 지네의 가루를 발랐구나. 상처자국에서부터 스며든 깨달음은 천천히 그의 몸을 태웠다.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소년이 용의 손등을 베어내고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깨끗한 천에 쉼없이 묻혔다. 아니, 아냐, 그건 안돼. 소년을 말리려던 손짓은 사라지는 그림자조차 붙잡지 못했다. 구름을 헤치고 드러난 달이 쓰러진 용과 도망치는 소년을 공평하게 비추었다.

 

=

 

누구든지 그 피를 먹은 자는 씻은 듯이 병이 낫고 모든 상처가 나아 기운을 되찾으며 오랜 영생을 얻는다고 한다. 수없이 그 말을 되뇌이며 날카로운 수풀과 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제 몸의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노인이 누워있는 아랫목으로 들어갔다. 머릿맡에 놓여있던 물그릇을 들어 천을 약간 적신 뒤 짜낸 핏물을 할아버지의 입가에 조심조심 부어넣자 과연 몇 방울 만에 거친 호흡이 가라앉고 허옇게 떠있던 얼굴이 따뜻한 생기를 머금었다. 소년은 제 손 끝에 닿는 할아버지의 부드러운 숨결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노인이 잠든 모습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이제 됐구나. 이제 된 거야.

 

꽉 조여져있던 긴장의 끈이 탁 풀어지면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몸이 바닥에서 붕 뜬 듯 한 부유감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풀썩 쓰러진 소년은 이부자리에 편안히 잠들어있는 노인의 옆얼굴을 응시하며 주름지고 작은 손을 꼭 붙잡았다. 이제 끝났다. 전부 끝났다. 내일부터는 다시 평소처럼 할아버지를 깨우고 식사를 하고 마당과 가게를 청소하는 나날이 시작될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 지긋지긋한 역병의 손톱으로부터 벗어났으니까….

 

그런데 할아버지의 손이 왜 이렇게 뜨겁지?

 

그 순간 소년은 따뜻한 생기를 품고 있던 노인의 얼굴이 혈색이 넘치다 못해 이제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야말로 눈 깜박할 사이였다. 영문을 모르고 벌떡 몸을 일으킨 소년의 눈앞에서 노인은 연신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왜소한 몸을 비틀었다. 그리 덥지도 않은데도 온몸에 손톱만한 땀이 맺혀 뚝뚝 흘러내렸다. 소년은 허둥지둥 제 옷으로 땀을 닦아내며 끝없이 되뇌었다. 말도 안 돼. 이럴 리 없어.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는 괜찮았다고! 전부 다 끝났었단 말야! 하지만 소년이 아무리 그렇게 외쳐봤자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불이 푹 젖도록 땀을 흘리다 하얗게 눈을 까뒤집은 노인은 끝내 새까만 피를 한 웅큼 토해내고 숨을 멈췄다. 피부는 이제 붉다 못해 시커먼 지경이었다.

 

“할아버지?”

 

코끝에 젖은 손가락을 가져다대도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쥐어본 손목은 힘없이 축 늘어졌다.

 

“할아버지.”

 

어깨를 잡고 흔든다. 검은 피가 노인의 뺨과 목을 타고 흘러내려 하얀 이불을 적셨다. 어둠처럼 새까만 절망의 색.

 

“할아버지… 할아버지…!!”

 

짓눌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년의 뒤에서 요란하게 문이 열린다. 상처 난 허리께와 이글거리는  고통을 억누른 채 어지러운 시선으로 방 안을 둘러본 용은 자신이 한 발 늦었다는 것을 알고 탄식했다. 소년은 차마 울음을 터뜨릴 기력도 없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살아갈 기력조차 송두리째 잃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깊은 슬픔은 나이를 불문하고 사람을 미치게 하는 법이니까. 용은 행여나 미쳐가고 있을지도 모를 소년의 이름을 부르며 그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 작은 몸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용의 피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아.”

하지만 아까까진 괜찮으셨어.

“….”

살아서 숨을 쉬고 계셨단 말야.

“알아.”

그런데 왜 돌아가신 거야?

 

용은 굳이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는 제 옷으로 노인의 얼굴에 흥건한 피를 닦아낸 뒤 흉하게 벌어진 입을 다물리고 희번득한 눈을 감겨주었다. 혼백이 빠져나간 몸은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사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용은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치룬다는 건 알았지만 그 절차에 대해선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소년에게 물어보는 것은 퍽 잔인한 일이 될 터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얼룩진 이불을 노인의 머리 끝까지 덮어주고 뒤를 돌아본 용은 자신의 소맷부리를 붙잡는 소년을 보았다. 소년이 손등을 베어 피를 가져간 쪽의 손이었다. 그가 어설프게 감은 천이 스르륵 풀려 바닥에 떨어졌다. 상처는, 아물었던가?

 

소년의 이빨이 상처를 짓씹는다. 터져나온 피가 소년의 혀와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용은 당황하여 소년을 떼어놓았지만 소년은 이미 목을 꿀꺽여 피를 삼켜버린 다음이었다. 얼이 빠진 용 앞에서 소년이 낮게 중얼거렸다. 난 할아버지 혼자 못 보내. 그렇다고 그런 짓을 하면 어쩌겠단 거야! 용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년의 몸이 허물어졌다. 허리께의 상처도 잊고 소년의 몸을 안아 올린 용은 제 품에서 무섭게 끓어오르는 열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다 죽은 노인조차 팽개치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지고의 약이자 극상의 독이나 다름없는 용의 피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혼란한 머리와 피 묻은 옷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의원을 찾아다니던 용은 새벽 늦게 돌아다니던 주정뱅이를 붙잡고 의원이 있는 곳을 물었다. 주정뱅이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언덕배기 아래쪽을 손가락질 했다. 거기서 한 집 한 집 문패를 확인하며 마침내 찾아낸 의원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품에 안은 작은 몸을 추스르며 세차게 문간을 두드리던 용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걸어 나온 노인에게 다짜고짜 소년을 들이밀며 간청했다. 제발 이 아이를 살려주시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그의 품에 안긴 소년을 몇 번 살펴보더니 버럭 역정을 냈다.

 

“그 아해의 어디가 아프다는 거요!! 암만 봐도 그냥 자고 있구만!“

 

의원의 말에 굳어버린 것처럼 서있던 용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자신이 안고 있던 소년을 보았다. 작은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열기에 먹힐 듯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소년은 흡사 낮잠이라도 자는 것 마냥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설마 그 사이에 운명을 달리한 것인가? 하지만 죽은 자가 이토록 생생하게 숨을 내쉴 수 있을 리가 없다. 아이의 뺨을 쓸어보던 용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소년의 얼굴에 남아있던 타박상은 어느새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용의 피를 마시고 살아남았으니, 이제 아이는 그와 같이 영원을 살아가게 되리라. ​

 

천년을 이어질 저주의 시작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