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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고스트 메신저

[투림]목욕탕에 갑시다

수도가 끊어졌다. 공사로 인한 단수였다. 일단 마실 물은 있었지만 당장 몸을 씻을 물이 없는 건 문제였다. 하루라면 그냥 참았겠지만 공교롭게도 오늘따라 바보령과 함께 령을 퇴치한다고 종일 뛰어다닌 탓에 피부에 땀이 흥건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씻을 방법이 아주 없는건 아니지만….

"돈이 들어."
강림도령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비싸?"
"오천원 정도."
"…그냥 가지?"
"아씨, 아깝단말야!"

하루 뒤엔 나올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말하며 버둥대는 꼬강이었지만 문제는 내일이 월요일이라는 점이었다. 평일 아침부터 하루 묵은 땀내를 풍기면서 간다? 안그래도 귀신 보는 아이라고 주목받는 와중에 안될 말이었다. 그치만 오천원이라니! 오천원이라니! 그거면 하루 식비는 나오는데!

"애가 왜 이리 궁상맞냐."
"돈도 못 벌어오는 아저씨가 할 말은 아니지?"
"야, 니 의뢰 도와주는건 나다?"
"의뢰 받아오는건 나거든요."

되바라진 꼬맹이 같으니. 투덜대던 강림도령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디보자, 다른 방법이 있던가? 

"강물로 씻을래?"
"잡혀가라고? 그전에 찝찝해."
"옛날엔 다들 그렇게 했어."
"지금이 조선시대인줄 알아?"

대체 얼마나 상식이 없는거야? 투덜대며 뒤로 벌렁 누워버린 강림은 머리를 움켜쥐며 버둥거리다 벌떡 일어났다. 그 눈에는 비장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아저씨도 가자."
"엉?"
"돈 아낀다고 생각하면 그게 낫겠어! 카운터 지나간 다음 실체화해서 씻으면 오천원에 두 사람!"
"뭔 아줌마같은 발상을 하고 앉았냐!! 그리고 변신하는거 완전 아파!! 내가 고작 너 씻기자고 그걸 할 것 같냐?"


=


했다.

"아… 삭신 쑤셔…."
"엄살부리긴."
"진짜 아프거든." 

쓱 돌아봐도 사람이 많다. 공사로 단수된게 한두집이 아닌 모양이다. 목욕탕 안쪽을 돌아다니며 빈 캐비닛을 찾던 꼬마 강림은 뚱뚱한 중년 옆자리에 어렵사리 비어있는 자리를 하나 발견하고 손짓했다.

"아저씨! 여기!"
"누가 아저씨야."

머리를 꽉 쥐어주고, 한 캐비닛에 두사람 몫의 옷을 개켜넣는다. (자리가 모자랐던 탓이다) 바보령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열쇠를 발목에 차고 안으로 들어간 강림은 저기 입구에서 어정쩡하게 서있는 강림도령을 발견하고 한숨을 쉬었다. 저 바보가 진짜.

"뭐해? 구경났어?"
"아니, 난 이런데는 처음이라."
"어련하시겠어요."

손을 잡고, 적당한데 자리를 잡고 앉아 의자와 세숫대야를 확보한다. 몸에 물을 끼얹고 비누칠(바보령은 비누를 너무 세게 쥐어서 옆자리로 두번이나 날려보냈다), 몸을 씻은 다음 머리를 감고(바보령의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샴푸가 뭐야? 린스는 뭔데? 비누로 하면 안돼? 알게뭐냐 싶어서 강림은 그냥 비누를 줘버렸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바보령은 삼심초 있나 싶더니 냉탕에 들어갔다. 너무 덥다나.) 밖에 나와서 때를 민다.(바보령은 냉탕에서 헤엄치기 시작했다.) 얼추 작업을 끝내고 등만 남긴  강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저씨."
"왜?"

"나와서 등 좀 밀어줘."

이번에도 등밀기가 뭐냐고 물어올 줄 알았건만 순순히 밖으로 나온 바보령은 때밀이 수건의 착용법을 물어본걸 제외하고는 의외로 능숙하게 등을 밀었다. 왠일로 이건 아네? 신기해서 던진 질문에 대답이 돌아온다.

"옛날에 많이 해줬거든."

차마 언제, 누구에게 해줬냐고 물을 순 없었다.


=


"기운 빠져."
"백날 냉탕에 있으니까 그렇지."


얼른 몸닦고 가자. 집에서 챙겨온 거니까 바구니에 넣지마. 발목에 매단 열쇠로 케비넷을 열고 한장씩 꺼내온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다. 그 상태로 옷만 꿰어입은 강림이 젖은 머리를 말릴 생각도 않고 돌아가려는걸 잡아채 어디 구석에 앉혀놓은 뒤, 강림은 전기세라도 줄일 생각으로 구석에 묶여있는 드라이기의 전원을 켰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뜨거운 바람이 나왔다.

"어, 너 옆반 무당 아냐?"

목소리는 드라이기 소리보다, 요란한 야구중계 소리보다 크다. 강림은 뜨거운 바람을 여기저기  뿌리며 옆쪽을 보았다. 생판 모르는 남자애다. 하긴 늘 이런 식이었지.

"맞네! 야, 무당도 이런데 오냐? 여기도 유령있고 막 그래?"

단수되서 어쩔 수 없이 온거고 그런건 신경도 안 썼거든. 확 발 밑에 누가 있다고 할까. 그런걸 생각하며 스위치를 끈 강림의 뒤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렸다.

"넌 누군데 말버릇이 그 모양이냐?"
"어, 아저씨?"

아까 구석에 처박혀있더니 언제 일어난거야? 하는 말은 하지 않기로 한다.

"뭐, 뭐야. 누구세요?"
"나? 이 꼬맹이…" "친척이야" "형인데."

양심이 있으면 손발 좀 맞추시죠. 날보고 아저씨라고 하는 사람 너 밖에 없다. 무언의 대화가 오가고 소년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뭐야, 너 고아됐다며?"

손에 꽉 힘이 들어간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 여기를 향하다, 들러붙는다. 기분나빠. 대답할 가치도 없어. 나가죽으라지. 강림은 드라이기를 올려두고 나가려 했다.

"야, 꼬마."

나가고 있는데.

"내 동생한테 말 함부로 하지 마라."

신발을 신는다. 풀린 끈이 잘 묶이지 않았다. 묶는 방법이 기억나지 않아 멍청히 굳어버린 손 뒤로 발소리가 다가왔다. 신발을 내려놓고, 구겨신으며 탁탁 정리한 다음 이쪽을 본다.


"끈 풀렸냐?"
"어."
"줘봐."

묶는데 십분은 걸렸다. 아저씨 진짜 바보구나. 핀잔을 주면 너도 모르는건 마찬가지잖아, 하며 얼추 매어준다. 확인해보면 댕기모양이다. 재주도 좋지.

"일단 신을 수 있으면 된 거지?"
"니예니예."
"아오, 그딴건 또 어디서 배워온거야…."

뭐, 됐고. 이거 마실래? 하면서 꺼내든 것은 사각의 딸기우유. 뭐야, 무슨 돈으로 샀어? 라며 도끼눈을 뜨자 강림도령이 눈을 찌푸렸다.

"그 정도 돈은 있어." 
"그럼 목욕탕비도 내. 절반 2500원."
"귀여운 구석은 엿 바꿔먹었냐."

됐으니까 마시기나 하라는 바보령이지만, 하필 고르고 골라 딸기우유라는게 맘에 안든다. 커피 우유나 뭐 그런걸 들고있으면 바꿔달라고 할 심산으로 강림도령을 쳐다본 강림은 그가 이미 따서 마시고 있는 사과 주스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애냐."
"뭐가 어때서?"
"됐어, 난 바꿀래."
"야."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가 야구중계에 빠진 때밀이에게 말을 걸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가져가라고 고갯짓을 한다. 목표는, 다행히도 딸기우유와 같은 가격이었다.

"커피 우유라."
"뭐. 왜. 뭐."
"잠 못 잘걸."
"남이사."

빨대를 쪽쪽 거리며 돌아와보니 아홉시였다. 숙제와 가방과 가게를 정리하고 올라온 강림은 어느새 저승사자 차림새를 하고있는 강림도령을 발견했다.


"가는 거야?"
"그래. 알람은 맞춰놨지?"
"누가 앤 줄 알아?"
"그럼 됐고."

나 간다. 그렇게 말하고 바보령은 쏜살같이 사라졌다. 창 밖을 내다 봐도 보이는 것이라곤 네온과 자동차 불빛 뿐이다. 스르륵 내려와 침대에 파묻히는 몸이 산뜻했다. 일단 목욕탕에 간게 돈낭비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래도, 아, 진짜.

"누가 누구 동생이란거야!"

강림이 버둥대며 토해낸 목소리에 령충들만 쫑긋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