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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고스트 메신저

[사라강림]가장 어울리는

-가장 처음으로 했던 고메 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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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라가 인간 하나를 저승사자로 들였다고 한다.

명계의 소문은 흐느작한 바람을 타고 서천 꽃밭까지 날아왔다.

 

그리고 사라는,

그건 또 왠 헛소리냐고 생각했다.

 

=

 

서천꽃밭에는 꽃이 피어난다. 그 꽃들은 일반 인간계에서는 볼 수 없는 무척 특이한 효력을 지닌 식물들로, 비단 그 효력뿐만 아니라 외형에서도 일반적인 인간계의 꽃들과는 다른 빛깔을 품고있었다. 만약 어떤 인간 한 명이 이곳으로 오게된다면 그는 우선 여기에 있는 모든 꽃들이 자신이 있는 세계의 색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꽃들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할 시간을 얻게 된다면 그 꽃잎들 하나하나에서 어스름한 새벽빛같은 눈부심이 이슬처럼 스며나오고 있다는 걸 깨닫을 것이다. 그 내부의 빛은 서천꽃밭에서 자라나는 꽃들에게서만 존재했고, 과거에는 그 신비로운 광채에 서린 효능을 얻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서천꽃밭으로 걸음을 옮긴 인간들도 있었다. 그들 중 대다수는 도중에 걸음을 돌리거나 목숨을 잃었고, 그들 중 일부는 겨우 도착한 서천꽃밭에서 만난 사라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꽃을 내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럼 사라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ㅡ고개를 들고, 똑바로 나를 봐라.

 

그것은 단순히 사라 자신의 나르시즘에서 기인한 말은 아니었다. 사람이란 누군가를 바라보게 되면 그 상대방도 사람을 바라보게 되는 법이었고, 사라는 방문객이 조심스럽게 자신을 올려다 볼 때마다 자신의 서천꽃밭을 찾아온 인간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 안에 몸을 웅크리고있는 빛을 찾았다. 그것은 서천꽃밭의 꽃잎에 서려있는 이슬과는 또다른 빛이었다. 인간의 깊은 내부에 잠들어있는 올곧은 감정은 시련을 거쳐 한 꺼풀씩 겉으로 드러나고, 마침내 서천꽃밭에 다다랐을 무렵에는 완연히 피어나 마치 불꽃처럼 강렬한 빛을 발한다는 것을ㅡ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숨기려 한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게 아니었고, 만들어내려고 한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아름다운 빛을 지닌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미치는 것을 확인하면, 사라는 히죽이 웃음지으며 방문객에게 숨살이 꽃과 살살이 꽃, 뼈살이 꽃으로 이루어진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인간이면서도 이곳에 발을 디딘 자들에 대한 포상이자 서천꽃밭의 꽃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빛을 지닌 자들에 대한 호의의 표시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방문객들의 수는 점점 뜸해지더니 어느덧 끊어지기에 이르렀고, 그것으로 서천꽃밭과는 또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과 마주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 사라는 탐미주의자로써 아쉬움을 느끼는 대신에 그런 빛조차 가지게 되지 못하게 된 인간들에게 환멸감을 품었다. 그래, 인간이란 건 결국 이 정도의 수준이다. 그에 비하면 서천꽃밭의 꽃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씨앗이 심겨지고 알맞은 관리만 받는다면 건강하게 자라나 아름다운 꽃잎을 피워낸다. 기껏 아름다운 빛을 피울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빛을 갈고닦기는 커녕 언제나 현실의 물욕에 눈이 멀어있기 일쑤인 어리석은 인간들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흐름이 뜸해지는 것과 비례하여 서천꽃밭에 대한 자부심과 인간에 대한 모멸감을 나날이 키워가고 있던 사라의 귀에, 인간 출신 저승사자의 소문이 달갑게 와닿을 리가 없었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언제나 완벽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서천꽃밭의 한구석에 이름도 모를 잡초 한 줌이 섞여들었다는 소식만큼이나 껄쩍지근했다. 하지만 여기가 다른 어디도 아닌 명계이니만큼, 그 이름 모를 잡초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염라청에 잠시 다녀오는 사이에 자신의 서천꽃밭 한쪽에 우두커니 서있는 낯선 그림자를 발견한 사라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 등을 향해 날카로운 검을 들이밀었다. 이번 대의 염라가 취임한 지 좀 시간이 지났을 때였지만 아직 저승이 완전히 전산화되기 이전의 일이었고, 따라서 사라의 허리춤에도 두 자루의 권총 대신 한 자루의 검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 검에 겨누어진 낯선 잡초는 -그는 오랫만에 서천꽃밭에 나타난 이를 이렇게 부르는 데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등 뒤의 살기를 눈치챘는지 느리게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눈은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가려져있어 윤곽만이 겨우 보일 정도 였다.

 

"…너는 누구지?"

"이 몸이 가꾸는 서천꽃밭에 들어온 걸로도 모자라 감히 이 몸에게 너라고 하다니, 간이 단단히 부었군 그래."

"………."

"너에 대한 소문은 들어 알고있지. 염라대왕의 맘에 들어 인간이면서 저승사자가 된 녀석이라기에 어떤 놈일까 생각했는데…."

 

사라는 그 부분에서 잠시 말을 끊고 잡초의 목에 겨누고있던 칼을 더욱 가깝게 겨누었다. 무기가 없는 빈 손 상태인 그는 아무런 저항없이 칼의 움직임에 따라 고개를 쳐들었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면서 그 사이에 가려져있던 그의 두 눈동자가 드러나며 사라의 모습을 비추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던 사라는 그 안쪽에 깃들어있는 빛을 발견하고 호오, 하고 히죽이 입술을 비틀어올렸다. 거의 몇 백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보지 못했던 인간의 빛. 그것이 지금 같잖게 생각했던 잡초의 눈동자 안에서 한들한들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단순히 운이 좋아서 저승사자로 뽑혔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사라는 자신의 미소가 비친 그의 눈동자가 불쾌하다는 듯이 일그러지는 가운데 그를 겨누고 있던 검을 치웠다. 검은 그의 담백한 기분전환만큼이나 가벼운 소리를 내며 검집으로 빨려들어갔다.

 

"뭐, 인사는 이쯤 해둘까. 나는 이 서천꽃밭을 관리하는 서천화랑부 소속 사라다. 네놈 이름은 뭐지? 염라대왕님이 고른 인간이라는 점과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될 동료라는 점을 감안해 특별히 네가 직접 자신을 나에게 소개할 수 있는 영광된 기회를 안겨주도록 하마. 기뻐하며 소개하도록."

"인사도 그렇고, 정말이지 악취미적인 놈이로군. …나는 강림이다."

"호오, 강림이라… 그럼 앞으로는 강림도령이라 불리겠군. 하지만 걱정마라. 이 몸께서는 특별히 강림이라고 불러주도록 하지. 어떠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 몸에게 그렇게 불린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워서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겠지?"

"…소름이 끼치는군. 네가 정말로 이 꽃밭의 관리인이냐?"

"오오,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감동한 모양이군. 그래, 이토록 완벽한 내가 관리하는 서천꽃밭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진건가?"

"……………."

 

강림은 기도 안 찬다는 시선으로 사라를 바라보다가 꽃밭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푸르게 자라난 풀 사이로 푸른 꽃, 흰 꽃, 붉은 꽃, 검은 꽃들이 중앙에 화사하게 피어난 노란색 꽃을 감싸안듯이 동서남북으로 자라나고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초록색 천 위에 색색의 실로 자수를 놓은 듯한 풍경이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꽃밭을 쓰다듬으면 그 흐름에 따라 흔들리는 꽃잎에서 살짝 떨어져나온 빛의 이슬들이 파르르 몸을 떨며 허공으로 퍼져나갔다. 꽃밭 전체가 빛을 뿜어내는 그 모습은 꽃밭의 관리인인 사라조차 압도적인 무언가를 느낄 정도로 장엄했다. 강림의 약간 뒤에서 그런 장렬한 아름다움을 뿌듯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사라는 문득 강림의 반응을 지켜보려는 마음에 그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반대편에서 빛의 조각들을 머금고 불어온 바람이 그들의 얼굴을 스치우고 지나갔다.

 

"………."

"…뭐냐, 옆에서 빤히 쳐다보고."

"후후, 어떠냐. 이 몸의 꽃밭은 역시 아름답지?"

"………네놈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잠깐의 사이를 두고, 강림은 광활한 서천꽃밭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는, 확실히 아름답군."

 

또 한번의 바람이 불었다.

꽃밭에서 퍼져나온 빛들은 허공에서 춤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람에 뒤섞인 강림의 목소리를 듣던 사라는,

인간 출신 저승사자라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그런 일이 있었지. 기억나나, 강림?"

 

사라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강림은 대답하는 대신에 한팔을 옆으로 뻗으며 살짝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 뒷모습에 가려진 작은 소년은 눈을 휘둥그레하게 뜬 채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사라의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강림의 몸에 가려질 정도로 조그만 소년이 지금 강림을 인간계에 묶어두고 있는 장본인이라는 사실에 사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소년을 노려보자, 소년은 흠칫 몸을 떨더니 강림의 뒷쪽으로 한쪽 눈을 숨겼다. 지금 저 녀석에게 수레멸망악심꽃이라도 던져버리면 어떨까. 진지하게 생각해보던 사라는 곧 그 일이 지금 강림과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시선을 강림에게로 돌렸다. 잠깐 사이에 그의 미간에 새겨져있던 주름은 더 깊어져있었다.

 

"이런, 그렇게 인상쓰면 안되지. 친히 이 몸께서 네가 일으킨 말썽을 해결하러 와줬는데 말야."

"…그건 이미 내가 해결했어. 굳이 네가 내려올 필요는 없을텐데."

"무슨 소리지, 강림? 내가 알기론 넌 지금 인간계에 속박당한 상태고, 등 뒤의 꼬마에 의해 이리저리 이용당하는 처지라고 들었는데?"

"…그건… 달라. 아무튼 지금은 돌아가. 나는…."

 

무언가를 말하려던 강림의 입술은, 직후 등 뒤에서 들려온 꼬마아이의 비명에 움직임을 멈췄다. 강림은 서둘러 뒤를 돌아보려고 했지만 어느사이엔가 목덜미에 감겨든 녹색의 식물이 피부에 끈적하게 달라붙으며 그의 움직임을 옭아메고 있어 고개조차 마음대로 돌릴 수가 없었다. 피어난 꽃봉오리 사이로 고개를 내민 뱀의 혓바닥이 눈앞에서 어지러이 낼름거리는 가운데,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강림에게로 다가온 사라는 언젠가의 그때처럼 자신의 무기를 뽑아들어 강림의 턱을 겨누었다. 목덜미에는 조그마한 소름이 잔뜩 돋은 채 낭패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림의 시선 속에 자신이 비춰지고 있었고, 그리고 더 깊은 안쪽에는….

 

"강림."

 

사라는 강림의 턱을 겨눈 무기에 힘을 주었다.

 

"여기가 마음에 들었나?"

 

강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 꿈틀거리는 손가락 끝이 그의 무기인 블랙 샤크를 잡을 틈을 노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 그리고 단순히 이 목에 감겨있는 식물이 갑갑하니 끊어버리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부적절한 의미를 지니는 행동을 본 사라는 말없이 방아쇠를 쥐고있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이걸 당기면 제아무리 영혼뿐인 저승사자라고 하더라도 결코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쩌면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더라도, 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돌아가자고."

 

네게는 이런 지저분한 인간계보다,

아름다운 서천꽃밭쪽이 더 어울리잖아?

 

"응?"

 

바람이 불었다.

미치도록 서늘한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