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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고스트 메신저

[투림]새벽을 도둑맞은 사람

-극장판 스포일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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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건의 마지막 날이 지나고 강림은 혼자가 되었다. 사라진 영력, 사라진 가족, 사라져서 사라진 것들이 주변에 가득했고 천애고아가 된 강림은 할아버지와 생전 친하게 지냈던 근처 골동품 가게 주인의 손을 통해 모든 재산을 정산받은 뒤 통장을 하나 개설했다. 통장에 찍힌 검은 숫자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홀로 웅크리고 있는 나날. 산책을 하다 들렀다기엔 너무 이른 시간에 가게 문간에서 서성이고 있던 골동품 가게 내외는 등교를 하기 위해 내려오던 강림을 발견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너 우리 집에서 일 해보지 않을래? 그 물음에 시급도 따지지 않고 좋다고 대답한 것은 비단 텅 빈 가게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부가 바다 여행을 제안한 것은 그들이 함께한지도 삼년이 지나고 여름의 열기가 공기를 데우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물론 네가 내키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거절해도 된단다. 한없이 조심스런 부부 앞에서 강림은 대답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저 바다 완전 가고 싶어요. 그 정도 연기는 어렵지도 않았다.


끈끈한 공기와 뜨거운 백사장. 철벅이는 모래밭. 반바지에 낡은 셔츠를 입고 구명조끼만 낀 채 바닷물을 헤엄치던 강림은 더위에 지친 부인을 부축하며 백사장으로 돌아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다 천천히 바다 안쪽으로 흘러들어갔다. 더운 여름이었고 사람들이 각자의 물놀이에 정신이 팔려 강림의 물장구에는 아랑곳않고 맘껏 깔깔대고 있었다.  파도가 넘실대는 대로 몸을 맡기고 떠가던 강림은 이글대는 해가 적당히 꼴보기 싫어졌을 무렵 입고있던 구명조끼의 끈을 풀고 물 속으로 푹 가라앉았다.


고요한 바다. 유일한 소음은 제 안에서 두근거리는 산소뿐이다. 그것도 이제 곧 없어지겠지. 강림은 스스로 숨을 토했다. 부글부글한 공기방울이 번뜩이는 수면 위로 빨려올라갔다. 바깥은 그렇게 뜨거웠는데 물은 점점 차가워진다. 차오르는 습기에 꿀럭꿀럭 괴로워하면서도 독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던 강림은 문득 제 손목을 잡고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을 느끼고 저항했다. 그만둬. 하지마. 나는 이제 그만 죽어버리고 싶단말야.


그러지 마라. 꼬맹아.


목소리는 눈을 찌르는 햇빛과 폐부를 찌르는 온기가 되었다. 소금기가 달라붙은 눈꺼풀을 깜박이던 강림은 제 몸을 껴안고 울부짖는 부인과 남편의 살갗 너머로 사라지는 짙은 남색 그림자를 보았다. 피와 살과 뼈와 근육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남자가 사라지자마자 주변의 목소리가 왁자하게 끓어오른다. 강림은 핏기 섞인 숨을 토하며 저릿저릿한 눈을 감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밤이었다.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부부는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밤바다를 산책하고 싶다는 강림의 부탁에 잠시 망설이다 자신들도 함께 가겠다는 조건을 걸고 허했다. 가벼운 슬리퍼는 바닷물을 채 뱉어내지 못해 무거웠고 달라붙은 모래가 피부를 긁었지만 강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둑한 해변을 걷는 내내 부인은 무언가를 말했고 이따금 남편이 웃으며 강림의 손을 잡아주었다. 단단하고 따뜻한 온기. 강림은 어렴풋한 죄책감을 느꼈다. 다정하고 좋은 이들을 덤덤한 눈으로 응시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 저 애정의 뒷면에 있을 무언가를 멋대로 상상하며 통장을 옷감 안쪽에 넣어두고 다니는 자신에 대해서. 그들의 심장에 죄책감이라는 칼을 꽂아넣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좀 전의 자살행위에 대해서.


 소년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부부가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넘긴다. 바다에 빠진 소년을 용케 구해낸 청년은 인사조차 받지 않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젊은 사람인데 참 용감하기도 하지. 그런데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나질 않아. 어디서 우연히라도 만나면 답례를 해주고 싶은데... 


그제서 너무나 오랫만에 마주친 그림자를 떠올린다. 그 저승사자. 분명 여기는 담당구역이 아니었을텐데 대체 어떻게 온걸까. 생각하던 강림은 자신이 그를 '바보령'이라 불렀었다는걸 기억해냈다. 그에게 애착인지 집착인지 알 수 없는 기이한 감정을 품었던 일도 떠올렸다. 마치 오래된 앨범 페이지를 넘기는 듯한 회상이었다. 그날 이후로, 그 이별 이후로 강림은 더 이상 그를 향해 간절하고 격렬한 연정을 느끼지 못했다. 새벽녘마다 애끓는 마음에 뒤척이던 것도 이미 옛날 일이었다. 그건 아마 영력을 빼앗긴 것과 같은 맥락이었으리라. 저승과 이승의 불가침성. 두 세계의 균형. 오래된 규칙. 어쩌고 저쩌고. 고리타분한 이야기들.


바다는 까맣다. 강림은 눈에 힘을 주고 수면 아래에서, 모래사장 건너편에서 너풀거릴지도 모를 그의 옷자락을 찾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검은 파도와 하얀 거품, 발밑에서 버석이는 모래 뿐이다. 그렇게 자신을 억지로 잡아뜯어놓고선 이제와 무슨 심보로 따라붙은 거냐고 말이라도 쏘아붙이고 싶었건만. 


강림은 뻑뻑한 눈꺼풀을 비볐다.

그는 오늘 새벽도 뒤척일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