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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고스트 메신저

[투림]새벽을 도둑질한 저승사자

-새벽을 도둑맞은 사람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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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와의 접속을 끝내고 나온 사무실에는 선명한 빗소리가 가득했다. 자신이 들고있던 소울폰을 책상 위에 던져버리곤 낡은 블라인드를 손가락으로 끌어내린 강림은 빗물에 축축히 젖은 거리와 가로등이 켜진 도로를 빠르게 달려가는 몇몇 승용차를 보았다. 유리창은 표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로 가득했다. 그 모습을 한참 응시하다 블라인드를 잡고 있던 손가락을 놓자 차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얼굴을 비추던 바깥의 빛이 사라졌다.


"어둡군."


당연한 말을 뭐하러 하느냐고 핀잔을 던지는 목소리는 없었다. 강림은 습한 먼지를 들이마시며 자신이 소울폰을 던져 둔 자리로 돌아갔다. 방금 전 명계와의 통신으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오늘 그가 인도해야 할 영혼은 총 셋이었고 개중에는 한창 초등학교에 다닐 나이의 아이도 있었다. 죽는 데에는 순서도 규칙도 없다지. 속으로 그렇게 되뇌이면서도 강림은 자신의 중얼거림이 얄팍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걸 잘 알고 있었다. 정말로 그렇게 여기고 있다면 매일같이 사자의 명단에서 익숙한 이름이 보이지 않는걸 확인하고 안도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릴없이 켜져있는 모니터 불빛이 강림의 손가락을 극명하게 물들인다. 명암이 극단적으로 나뉘어 기괴해보이기까지 하는 손가락으로 느리게 책상을 두드리던 강림은 이내 소울 폰을 집어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새벽이 되기만 하면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바늘을 마주하고 앉아만 있느니 차라리 서류를 처리하거나 주위 순찰을 하는 편이 백배는 나았다. 바리는 그런 그의 태도 변화를 두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가도 성실해진건 좋지만 자신의 담당 구역을 너무 벗어나지는 말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게 담당 구역을 떠나 먼 바닷가로 떠났을 때의 일이던가. 강림은 사무실 문조차 잠그지 않은 채 좁은 복도를 나아갔다. 어느 차량에서 흘러나온 요란한 음악소리가 낡은 창문을 흔들고 사라져갔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거리는 서서히 변해갔다. 공사장은 고층 아파트가 되었고 오래된 구멍가게가 문을 닫고 그 자리에 24시간 동안 영업하는 편의점이 들어섰다. 폐유원지가 철거된 자리에는 엉뚱하게도 식물원이 들어섰다. 변한 것들에게서 예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교외 공원의 무성한 나무와 낡은 자판기,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초등학교, 골목을 따라 늘어선 골동품 상가. 강림은 그 근처를 지날 때마다 간판만 걸려있지 물건이라곤 하나도 없는 텅 빈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진열관 유리에 희미하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 너머로 아무도 앉아있지 않은 카운터가 보였다. 강림은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그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빗줄기는 아침햇살에 밀려 사라졌다. 젖은 담장 위를 걸어가던 어린 고양이가 허공을 물흐르듯 걸어가는 강림을 보더니 털을 세우며 경계태세를취했다. 아서라, 네가 뭘 어쩌겠다고? 내가 뭘 한것도 아닌데. 멈춰선 강림 도령의 말을 이해했는지 아니면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양이는 재빨리 담장 아래로 도망쳤다. 해가 높이 떠오를수록 햇살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날 데리러 온겐가?"


희끗희끗한 머리를 짧게 자른 노인은 말간 눈으로 강림을 응시했다. 붐비는 병원에서 홀로 독실을 쓰고있는 이였다. 재산이 많은 부자인 것인가, 아니면 그만큼 노인의 병이 중한 것인가. 사자의 명단은 그런 사정을 일일히 설명해주지 않았고 강림 도령 또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반쯤 세워진 침대에 몸을 기대고 있던 노인은 강림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이제 곧 어떤 아이가 나를 찾아올걸세. 염치없는 소리지만 그 아이가 떠날 때까지만 나를 데려가지 말아주게."


침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강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노인의 주름진 얼굴과 하얗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과 병원의 이름이 들어간 하얀 환자복은 이제 곧 부질없어질 터였다. 복도에선 사람들의 발소리가 바쁘게 지나갔다. 강림의 침묵을 부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노인은 한숨을 쉬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주름진 입술에서 강림은 잘 알 아 들을 수 없는 기도문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그 사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바깥 공기를 담뿍 묻히고 안으로 들어온 하늘빛 머리카락의 고등학생이 씩 웃었다. 할머니! 저 왔어요, 보고 싶었죠? 소년의 목소리는 변성기를 거친 탓에 어린 시절에 비하면 훨씬 낮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앳된 티가 남아있었다. 노인은 주름진 손을 뻗어 자신의 바로 옆에 풀썩 앉은 소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무렴, 보고싶었지. 우리 귀여운 강림이.


노인들하고 어울리지 말고 왠만하면 또래들하고 다니랬지.


언젠가 한 말이었을까, 아니면 떠오른 생각이었을까. 소년이 노인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명부에 적혀있던 시간이 다가왔지만 강림은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영력을 머금고 환하게 빛나던 옥빛 구슬과 산산히 부서져 나비떼처럼 흩날리던 감정의 편린이 칼날처럼 번뜩였다. 부드러운 영계의 노을 속에서 소년의 감정과 영력은 그렇게 처형되었고 푸른 잔상 하나는 얼핏 강림의 손끝을 맴돌다 힘없이 바스라졌다. 염라대왕의 깊은 눈이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은 면회시간이 다 지나도록 노인의 말동무를 해주다 병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힘겹게 눈을 뜬 강림은 네모난 창문 너머로 부드러운 황금빛 석양이 가득한 모습을 보고 가만히 이를 악물었다.


"착한 아이일세. 우리 동네에 봉사활동을 왔다가 한 번 만난 아이인데, 어쩌다 내가 입원한 걸 알고는 틈틈이 만나러 와주지. 내 친자식들도 저렇게 자주 오지 않는데 말이야."


강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아이에게 고맙다는 말과 작별인사는 온전히 건네주고 가고 싶었네. …기다려줘서 정말 고맙네."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그녀의 심장과 연결 되어있던 기계가 일정한 높이의 음을 길게 토해냈다. 그녀가 죽은 것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소년은 슬퍼하겠지.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과 추억들은 오늘 이 노을과 함께 소년의 삶에 소나기처럼 조용히 스며들 것이다. 


두 번째 사자를 사공에게 인도했을 무렵에는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아직 어리디 어린 세 번째 사자를 찾아냈을 때 아이는 뒷골목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소녀를 간신히 어르고 달래며 데리고 나와 또 다른 사공이 이끄는 배 위로 인도한 강림은 별도의 연락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묵직한 어깨를 주물렀다. 정해진 사자들은 무사히 저승으로 도달했고, 딱히 주위에 악령들이 날뛰는 기색도 없다. 이제는 사무실로 돌아가 다음 사자명단이나 긴급연락이 올 때까지 대기하면 그만이었다.


사무실에 돌아가는 동안 강림은 약간 길을 돌아 벚나무 몇 그루가 심어진 강변을 걸었다. 봄은 이미 지나고 여름이 가까운 탓에 나무에는 푸른 잎사귀가 가득했다. 이번 봄에는 특히 비가 많이 내렸던 탓에 벚꽃이 오래 피어있지도 못했다고 한다. 강변에 설치된 낮은 가로등 빛과 밤바람에 서벅이는 잎사귀 소리 사이로 한참을 걸어가던 강림은 강변 반대편에서 하늘빛 소년이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더위를 피해 밤마실을 나온 이들은 소란스러웠고 소년과 개 한 마리는 금새 시야에서 사라졌다. 강림은 한동안 그 자리에 붙박혀있다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은 그가 처음 나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두침침했다. 강림은 한숨을 토하며 제 옷깃의 단추를 몇 개 풀어버린 뒤 창백한 빛을 던지고 있는 컴퓨터 앞자리에 풀썩 앉았다. 낡은 의자가 삐걱였고 그 사이로 기포처럼 떠오른 염라대왕의 목소리가 목 뒤를 간질였다. 


(산 사람은 살아야죠.)

(자신이 속하지 않은 곳에 정을 붙여선 안됩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강림도령.)


강림은 뻑뻑한 눈꺼풀을 비볐다. 

그 아이에게서 빼앗은 까마득히 긴 새벽이 오늘도 잠자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