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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EOE(2016)

샤네트씨 댁 미코테는 노래하지 않아

 

남자는 다정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천성이 그러했다. 남의 아픔을 자신의 것처럼 공감하고, 주위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보고 듣고 느끼는 것. 누군가는 그의 행동에 감사하거나 칭찬을 하기도 했으나 어떤 자는 비웃고 조롱하기도 했다. 다정한 만큼 부드러운 마음에 생채기가 남아 눈물이 흘러내리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남자는 용케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어느 미코테를 위해 멍에 잘 듣는 약을 구해온 참이었고, 상대방이 감사의 말은 커녕 싸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미코테가 물고 있는 담배에서 흐늘흐늘 흐린 연기가 기어 나왔다.

 

“성가시기는.”

“그래도 이걸 붙여야 빨리 낫지 않을까요?”

 

미코테는 언짢은 듯 귀를 탈탈 흔드는가 싶더니 나꿔채다시피 약을 가져갔다. 거울을 보지도 않고 멍이 든 자리에 약을 붙이는 손길이 퍽 익숙해보였다. 남자는 그 모양새를 잠자코 지켜보다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번엔 누구랑 싸우신건가요?”

“누가 싸움꾼인줄 알아? 그냥 술 취해서 헛소리하는 주정뱅이한테 시비 걸렸어.”

“저런, 어쩌다가?”

“몰라. 하염없이 모험을 찬양하는 게 짜증나서 몇 마디 해줬더니 자기가 혼자 흥분해서 덤벼들던데.”

 

그렇다면 시비를 먼저 걸린 쪽은 그 이름 모를 취객 쪽이 아닐까요? 남자는 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목구멍으로 튀어 오르기 전에 반으로 접어 멀리 치워버렸다. 그 자리를 대신해 남은 말이 쓴웃음과 함께 스며 나왔다.

 

“모험을 정말 싫어하시네요.”

“당연하지.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그런 거에 매달리지 않을걸.”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저도 모험가인데요.”

“알아. 그러니까 당신도 제정신이 아니겠지.”

 

담배를 입에 문 채, 어디 하고 싶은게 있으면 한 번 해보라는 식으로 벽에 등을 기대는 모습이 뻔뻔하다. 미코테의 새카만 귓가에 달린 파란 귀걸이가 흔들렸다.

 

“상처받았어요.”

“듣기 싫으면 모험가 그만두던가.”

 

호흡 몇 번에 다 타들어가버린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제 신발로 불이 덜 꺼진 담배를 밟아 끄던 미코테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반지는 내일 오전 중으로 마무리 될 거야.”

“벌써요? 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간밤에 추가 작업 했어. 오늘 밤에도 할 거야.”

 

그러니 어떻게 청혼할지나 생각해둬. 미코테는 그 말을 남기곤 뭐라 말을 건넬 타이밍도 주지 않고 공예가 길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졸지에 흐릿한 담배 냄새 남은 그늘 아래 홀로 남겨진 남자는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붉어진 얼굴을 양손으로 마구 문질러댔다.

 

=

 

녹색 패리도트와 노란색 황수정을 박아 넣은 반지 한 쌍이 작은 상자 속에서 반짝인다. 반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가 싶던 남자에게 느닷없이 손이 잡혀 마구잡이로 악수를 당해버린 미코테의 꼬리가 찌푸린 표정에 비해 퍽 느긋하게 흔들렸다. 겨우 일말의 냉정함을 되찾은 남자는 자신의 숨결에 반지가 녹을까봐 두렵기라도 한 것 마냥 입가를 단단히 가린 채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코테가 슬쩍 탁자를 두드렸다.

 

“죽은 거 아니지?”

“…죽을 리가 없잖아요.”

 

이제 제일 중요한 일이 남았는데. 남자는 그렇게 말하곤 벅차오르는 마음과 긴장이 뒤범벅된 얼굴을 연신 쓰다듬었다. 보석공예가 길드에서 한 쌍의 반지를 주문해 가져가는 사람이 곧잘 짓곤 하는 표정이었다. 미코테는 무의식적으로 제 품을 뒤적여 담배를 꺼내려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손을 거뒀다. 아무것도 모를 남자는 반지에 박혀 빛나는 보석을 응시하다 안에서 북받쳐 오른 뭔가를 참지 못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모험가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각자의 여행길에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 연유가 놓여있게 마련이었다. 남자의 경우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고백하면서도 변변히 전해줄 것이 없어 꽃반지를 만들어주었던 날의 추억이 그랬다. 늘 웃음을 잃지 않았으나 남자의 떨리는 손길과 목소리만큼은 웃어넘기지 않고 똑바로 받아들여준 사람이었다. 굳은 살이 박혀있고 따뜻한 손에 언제 시들지 모를 꽃반지를 끼워주며, 남자는 제 마음에서 흘러내린 감정들이 눈가로 치솟는 것을 막으려 연신 눈을 깜박였다. 그 한순간을 다시금 아름다운 것으로 장식하고 싶다는 마음이 그의 시작점이었다.

 

제 마음에 꽉 찬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무엇 하나 번듯한 것을 주지 못한 마음은 늘상 절룩거리며 뒤를 쫓아왔다. 남자는 이제야 그 마음을 안아들어 함께 돌아갈 수 있겠다고 읊조리며 잠깐 울었다. 어딘지 먼 곳을 보는 눈으로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미코테가 턱을 괴었다.

 

“그전에 계산부터 해주면 고맙겠는데.”

 

산통 깨는 말이었으나 남자는 쑥스러운 듯 웃기만 했다.

 

그대로 반지를 품에 안고 떠나는가 싶던 남자는 해가 저물어갈 무렵 다시 돌아왔다. 울다하를 떠나기 전 작별인사도 할 겸 마지막으로 식사라도 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그 말을 들은 미코테는 남자의 제안을 거절하기는 커녕 소란스러워지기 일쑤인 모험가 길드나 술집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며 나나모 관문 쪽으로 잽싸게 사라져버렸다. 덕분에 음식을 포장하여 달 관문 바깥까지 배달하는 처지가 된 남자는 사사모의 여든 계단 근처 바위에 앉아있는 미코테를 보고 어깨를 추슬렀다. 발자국 소리를 들은 미코테가 고개만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괜찮으신가요?”

“누가 시비 걸진 않으니까.”

 

달빛은 짙고, 저 멀리서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던 거대 거북은 이쪽을 돌아보는가 싶더니 눈을 꿈뻑이며 주저앉는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의뢰를 한답시고 죄 없는 거북이를 사냥한 적이 있었지. 남자는 뒤늦게 아파오는 양심에 쓴웃음을 지으며 미코테의 근처에 자리 잡았다. 아직 따뜻한 요리를 늘어놓는 동안 미코테가 귀를 까딱거렸다.

 

“진짜로 왔네. 그냥 갈 줄 알았는데.”

“그건 좀 섭섭하잖아요. 밤을 새가면서까지 반지를 만들어주신 분인데.”

 

남자가 포장해온 음식들을 늘어놓는다. 그동안 뭔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연신 입을 벙싯거리던 미코테는 이내 짧게 혀를 차곤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아직 술을 마실 수 없는 나이인 상대를 배려하여 사온 오렌지 주스까지 모두 바닥났을 무렵, 나나모의 여든 여덟 계단참에는 남자가 풀어놓은 이야기가 하나 둘 쌓여가기 시작했다. 산적 꼬치의 나무 막대기를 질겅이며 서글픈 어긋남이나 마주잡은 손의 온기 따위로 끝나는 이야기를 듣는 미코테의 푸른 보석 귀걸이가 조용히 빛났다.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제 7재해에서 사라진 빛의 전사들의 발치에까지 도달했다. 달라가브의 파편 속에서 사라져, 읽을 수도 떠올릴 수도 없는 이들.

 

“거봐, 모험 따위 해봤자 의미가 없어.”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지키기 위해 싸웠어요. 그걸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건 너무 잔혹하지 않나요?”

“어쩌면 다 환상일지도 모르지. 그들이 정말로 존재했다는 걸 어떻게 알아?”

“그건… 좀 억지스럽네요. 한 두 명이라면 모를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같은 환상을 볼 수 있을 리 없어요.”

“하지만 누구도 똑바로 기억하지 못하잖아. 얼굴, 이름, 목소리, 무엇 하나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데 그들이 존재했느니 마니 하는 게 무슨 소용이야?”

 

사사모의 여든 계단에는 늘 불이 밝혀져 있다. 은 장터의 등대는 느리게 제자리를 돌며 불빛을 흩뿌렸다. 이미 다 먹어버린 음식의 잔해 위로 쏟아진 하얀 달빛은 자그마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제7재해 때에는, 쏟아지는 달라가브의 붉은 빛이 이 에오르제아를 모조리 집어삼켰다. 남자는 그 절망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으나. 그때의 참사를 입에 담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빛의 전사들은 모두 누군가의 가족이었어요. 그들의 가족은 재해 이후로 텅 비어버린 기억의 가장자리를 더듬으며 사라져버린 이를 추모해왔지요. 저는 그게 헛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들은 분명히 존재했고, 우리에게 이 세계를 남겨주었어요.”

“글쎄, 난 재해 이후 태생이라서.”

 

미코테의 말은 여전히 남자의 말과 잘 섞여들지 않는다. 다른 누구와도 그럴 것이다. 남자는 분노보다는 약간 서글픈 기분을 느끼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사실 저도 빛의 전사를 기억하지는 못한답니다. 하지만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제7재해 이후로 자신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가족이 있어요. 그녀도 그 사람의 얼굴이나 이름을 떠올리진 못하지만, 그 사람이 오랫동안 보내온 편지는 고스란히 남아있답니다. 저도 몇 번 읽어본 적이 있어요.”

 

남자는 천천히 기억 속에 남아있는 문장을 읊었다. 동화적 과장이 들어가 있는 게 분명한 라노시아 지방의 거대 도도새에 대한 이야기였다. 편지에 동봉된 도도새의 깃털로 만들어진 작은 깃펜은 지금도 그녀의 책상 위에 놓여있다고 한다. 길지 않은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미코테는 바다를 닮은 새파란 눈을 가늘게 뜬 채 침묵했다.

 

“믿지 못한다는 기분도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부 없는 걸로 치부하진 말아주세요. 우리가 이 에오르제아에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거니까요.”

 

주저앉아 있던 거북이 안 좋은 꿈이라도 꾸었는지 긴 숨을 토한다.

미코테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짜증나.”

 

어울리지 않는 말이 흙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

 

“적당히 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따라붙지 마.”

 

“엉겨 붙지 마.”

 

“나는 네가 아니야.”

 

“너처럼, 괴물 같은 인간은 될 수 없어.”

 

“너는 끔찍해.”

 

“너 같은 삶도 끔찍해.”

 

“그런 식으로 살아간다니 상상할 수 없어.”

 

“나는 너처럼 살지 않아.”

 

“그따위로 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사라져.”

 

“나에게 남지 마.”

 

“나를 삼키지 마.”

 

“나는.”

 

“이따위 풍경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

 

눈을 떴는데도 아직 사방이 어둡다. 미코테는 나직한 욕설을 뱉으며 벽과 침대 사이에 처박힌 몸을 빼냈다. 낮에는 끓을 듯이 덥다가도 밤만 되면 차갑게 식어버리는 계절인지라 들이마시는 공기에 제법 한기가 돌았다. 녹슨 가위로 억지로 잘라낸 것 마냥 엉망으로 끝난 꿈 덕분에 다시 잠을 청할 기분도 들지 않아,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채 멍하니 창문 바깥을 쳐다보았다. 별이 흐드러진 하늘에 홀로 하얗게 빛나는 달이 얼핏 붉은 색으로 뒤덮이는가 싶더니 불꽃처럼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욕설과 동시에 내리쳐진 침대 가장자리가 삐걱이는 소리를 내고 일렁임은 쏜살같이 도망치고 말았다. 퍽 단단한 목재를 내리친 덕에 손가락이 욱씬거렸다. 미코테는 아픈 손을 일부러 강하게 쥐었다 피기를 반복하며 침대 맞은편에 놓인 낡은 작업대로 다가갔다. 그 위에 놓인 편지는 저녁 무렵 그가 읽다 내던진 모양새 그대로 침묵하고 있었다. 얇은 종이를 손에 들자, 그동안 쏟아지지도 흐트러지지도 않고 참을성 있게 수신인의 손길을 기다리던 글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다시 한 번 망막을 파고들었다.

 

…결혼기념일 목걸이…

…꼭 당신에게…

…믿을 수 있는…

…아내인 샬럿 씨도…

…부탁 드립니다…

 

…추신.

모험가는 아직도 싫어하십니까?

 

“그래,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싫어.”

 

구태여 소리 내어 대답한 미코테는 이전보다는 좀 더 침착하게 편지를 내려놓았다. 편지 봉투 바깥에 깔끔하게 적힌 자신의 이름이 보였다.

 

「샤파이안」

 

눈 색이 사파이어를 닮았다며 붙여진 이름이다. 당연히 미코테 어느 종족의 규칙과도 맞물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길거리에 버려져 있던 삶이니 뿌리를 찾으려 해도 쉬이 찾을 수 없었으리라. 그런 주제에 자신의 몫이 아닌 기억들은 무겁게 덩어리져 머리를 짓눌렀다. 마치 너는 처음부터 이걸 위해 태어났고, 그래서 그 외의 다른 것들은 전부 잘라 내버렸다는 것처럼.

 

썩 품위 있지 못한 언어들은 밤의 고요 속으로 솜씨 좋게 녹아들었다. 검은 머리 푸른 눈의 미코테는 채에 걸린 돌멩이 마냥 어둠 속에 홀로 걸러져 있다가 흐릿한 숨을 내쉬며 작업대 앞에 앉았다. 불빛을 키고, 얼마 남지 않은 담배에 불을 붙여 빨아들이는 동안 거스러미처럼 일어나있던 감정들이 천천히 제자리에 누웠다. 조금은 진정된 마음으로 백지 하나를 꺼내 선을 긋던 그는 마치 어제 일을 회상하듯 자연스레 작은 녹색 눈의 아이를 떠올리다 펜을 꽉 쥐었다.

 

알 게 뭐야. 나는 모르는 사람이야.

나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종이 위에 목걸이의 몇 가지 형태가 그려진다.

그동안 노래 같은 것은 한 자락도 걸려본 적 없는 입술에 선명한 잇자국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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