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커뮤니티 로그/EOE(2016)

요리하는 사람


처음에는 무슨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습니다. 어두운 밤에 문을 두드리기에 불쌍히 여겨 들여보내 주었는데, 배가 고프다 어떻다 우물우물하더니 얼마 남지 않은 식량을 죄다 먹어버렸으니까요. 아침에 일어나 곳간을 살피러 갔는데, 가을에 심을 씨감자까지 죄다 없어졌을 때의 그 허망함이란! 다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 남자를 당장 끌어내어 매질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새벽부터 문 앞에 꿇어앉아 머리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겁 먹은 짐승마냥 웅크리고 앉아, 제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 청하는 꼴이라니. 갈퀴를 들고 식식대던 남편도 그 등을 일곱 번인가 후려치고는 그만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정말이지 꼼짝도 않더군요.

그가 말했습니다.

"사실 저는 악마의 저주를 받아, 주위에 음식이 있으면 모조리 먹어치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야말로 입에 넣고 씹어 먹을 수만 있다면 뿌리든 이파리든 무엇 하나 남기지 않지요."
"그런데도 우리 집을 기웃거린거요? 이 가난하기 짝이 없는 집을!"
"죄송합니다. 제 얘기를 조금만 더 들어주세요."

그는 남편의 성난 목소리에 몸을 더 둥글게 웅크렸으나 목소리는 기어들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신세를 비관한 남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하다 기적처럼 훌륭한 신부님을 만났으나, 그 신성한 축성으로도 끝내 저주를 깨끗이 물리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신부는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몸과 마음이 악마의 힘에 잠식당하지 않도록 타인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가는 일 뿐이라 신신당부했다는군요. 하지만 얼마 전 신부님이 숨을 거두자 오랫 시간 몸에 배인 방랑자의 버릇이 도졌고, 장례식이 끝나는대로 교회를 떠나 내키는 대로 걸었다가 이 꼴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는 제 잘못입니다.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만약 허락만 해주신다면, 이 집에서 봉사하는 것으로 제가 저지른 만행을 사과하고 악마의 편으로 기울어진 제 저울을 바로잡고 싶습니다."

남편은 마뜩찮은 표정이었습니다.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남자가 씨알을 먹어치운 걸로도 모자라 이젠 아예 넉넉잖은 살림에 눌러붙겠다 하고 있으니 당연하지요. 옹송그린 그 몸은 밭을 갈거나 나무를 팰 수 있을 정도로 건장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걸 알았는지 남자가 황급히 덧붙였습니다.

"급료니 뭐니 그런건 필요없습니다. 신의 경전을 가진 저는 여러분께 봉사하는 것만이 삶의 보람이자 양식입니다. 제 한 몸이 으스러진다 한들, 무엇 하나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무언가 자신 있는 일은 있나요?"

남자가 조심조심 고개를 들었습니다. 밤에 들일 때는 잘 몰랐으나, 아침을 맞이하여 환한 하늘 아래에서 보니 퍽 어린 얼굴이었습니다. 그는 매를 맞느라 흐트러진 옷을 추스리지도 않고 말했습니다.

"요리를 할 줄 압니다."

무슨 그런 어이없는 말이 다 있는지. 자기가 식량을 다 거덜내놓고는 무슨 요리를 하겠다는 겁니까. 헌데 그 얼굴에 깃든 묘한 자신감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저는 떨떠름한 얼굴을 한 남편 대신에 한 걸음 앞으로 나갔습니다.

"우리 집 식량은 자네가 다 먹어치워놓고, 무슨 요리를 하겠다는거죠?"
"재료라면 제가 구해오겠습니다. 저에게는 모아놓은 푼돈과, 먹을 것을 구분하는 눈이 있습니다."
"그럼 어디 그 돈을 내놔보게."
 
푼돈치고는 꽤 무거운 주머니였습니다. 순간 남편이 눈을 빛내며 갈퀴를 세게 쥐는 모습이 보였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 돈은 우리가 쓰겠네. 자네가 여기 있어도 좋은지 어떤지는  오늘 아침 식사를 보고 결정하지."
"감사합니다."

그 다음에 있었던 일은 그냥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마을로 내려가 끼니를 떼울 만한 식료품 몇 개를 산 뒤 돌아왔을 때 아이 둘은 그제사 일어났는지 식탁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남자는 무슨 이야기 같은 것을 들려주는 듯 하더니, 제가 온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재료를 넘겨받고 요리를 시작했지요. 저는 그가 뭔가 수상한 것을 섞지 않는가 싶어 부엌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습니다만….

세상에, 그 냄새라니.

정신이 들고보니 입 안에는 빵과 스프의 감촉만이 남아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손가락을 빠는 것도 잊어버리고 입을 다시고 있었죠. 남자는 모자를 벗은 채 우리를 바라보며,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것 마냥 "어떻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후로는 부엌 근처의 작은 방이 그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빵과 수프같은 간단한 메뉴를 만든던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고 깊은 맛을 내는 요리를 선보였습니다. 우리 집에는 그런 재료를 살 돈이 없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마을에서 구한 그 흔한 재료로 어떻게 이런걸 만들 수 있나 싶었지요. 때때로 그는 숲이나 강가에서 재료를 찾았다며 특식을 만들어 주기도 했는데, 하나같이 감탄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맛이 낫습니다. 아이들은 작은 꽃같은 튀밥을 아삭거리며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곤 했지요.

그는 완전히 우리 집의 일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고단한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식탁을 생각하면 흥이 났지요. 게다가 요리라는 한 가지 일과가 떨어져나가니, 저는 그야말로 홀가분한 기분이었습니다. 남편은 이런 기분을 잘 모를 테지만, 어쨌건 급료도 받지않는 떠돌이가 맛난 것을 해주니 퍽 만족스러워하는 눈치였습니다.

"이토록 훌륭한 솜씨라면 왕실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아요. 어째서 방랑같은걸 하나요?"
"그런 곳은 숨이 막혀서 싫습니다. 저는 이 집처럼 소박하고, 사람들의 숨결이 어린 곳이 좋아요."
"암은, 그래야지! 덕분에 우리는 좋은 밥 먹고, 자네는 봉사하고 살면서 보람을 느끼고! 이게 누이좋고 매부좋다는 거지!"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누는데 남자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습니다. 한숨을 쉬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슬그머니 속을 찔러보니, 금새 그 이유가 드러났지요.

"실은 이 근처에서 대단히 희귀한 짐승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곧장 잡으려 했는데,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그만."
"우리집 요리사 양반이 사냥감을 놓치다니! 그것 참 유감이로군. 대체 어떤 놈이었길래?"
"아밀스턴 양*이라는 동물입니다. 귀가 밝고 의심이 많아, 조금만 수상한 기운을 느끼면 도망쳐 버리지요. 하지만 그만큼 맛이 좋아 사냥할 가치가 있습니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봐도 놓친 것이 아쉽군요."

저 또한 아쉬웠습니다. 맛을 확실히 보장하는 요리사가 눈 앞에서 아까운 재료를 놓쳐다며 한숨을 쉬고 있는 걸 보니 방금 채운 배가 푹 꺼져 꼬르륵 거리는 기분이었습니다. 남편도 같은 심정이었는지 입맛을 다셨습니다.

"거, 지금이라도 나랑 같이 가볼까? 요리사 양반은 몰라도 내가 왕년에 사슴잡이는 좀 했거든."
"정말이신가요? 바깥 어르신이 함께 가주신다면 마음 든든합니다. 아밀스턴 양은 의심이 많은 반면 의외로 쉽게 속기도 하거든요. 가보죠!"

둘은 그렇게 떠나는가 싶더니 자정이 깊을 무렵에야 돌아왔습니다. 아밀스턴 양이라는 것은 처음 듣는 이름만큼이나 희귀하게 생겼더군요. 척 봐서는 저게 양인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원래라면 아침식사에 먹어야 하겠지만, 우리가 하도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본 모양인지 그가 특별히 야식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밀스턴 양의 다리살 구이는 퍽 부드러웠습니다. 거기에 쫄깃하니 씹는 식감이 어우러져 머리 속에서 불꽃이 터지는듯 하였지요. 먹으면 사라지는 것이 아깝고, 그렇다고 먹지 말자니 이 맛이 없어지는게 아까운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아밀스턴 양은 먹을 부위가 아주 많으니 아쉬워 할 필요 없다고 우리를 위로해주었습니다.

그날부터 우리의 주식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밀스턴 양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양고기와는 다른 맛이 일품이었지요. 각종 부위에서 발라낸 살들은 그의 손길을 거쳐 모조리 우리의 뱃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한번은 아이들이 서로의 음식을 뺏어먹으려다 싸움이 나는 바람에 그가 서둘러 아밀스턴 양고기를  더 구해와야 했지요. 덕분에 저도 아이들의 몫으로 양보했던 안구 조림을 맛 볼 수 있었습니다.

사냥이 손에 익었는지 그는 혼자서도 거뜬히 아밀스턴 양을 잡아왔습니다. 아이들은 먹다 지쳐 조용해졌지요. 저는 안구조림이 마음에 들어 몇 번이고 청하곤 했습니다만, 다른 살과 달리 안구는 갯수가 제한 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조금 자제하게 되었습니다. 꼭 안구가 아니더라도 맛이 좋은 다른 부위는 아주 많았으니까요.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안구 조림이 먹고 싶습니다. 입안에 넣고 굴렸을 때의 그 탱글한 감촉과, 이를 세워 콱 깨물었을때 입 안에 확 퍼지는 서늘하고도 달착지근한 맛. 그리고 그 유들유들한 목넘김까지. 조금 전에 조르고 졸라 하나를 입에 넣었으나, 도리어 맛에 대한 기억만 강렬하게 되살아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제 말을 듣고는 조금 난감한 듯 웃었습니다.

"이 부근의 아밀스턴 양은 전부 잡았는지라, 안구 조림은 이게 마지막이 될 거랍니다. 그래도 괜찮으신가요?"

괜찮아요. 나는 지금 당장 안구 조림을 먹고 싶어요.

"그렇다면야, 해드려야죠."

그는 어깨를 으쓱이곤 칼을 들어 남은 눈을 뽑아냈습니다.
시야가 어두워진 만큼, 맛은 예민하게 느껴졌습니다.

=

"이봐, 이웃 마을에서 일가족 네 명이 죄다 살이 발려 죽었다는 이야기, 진짜야?
"정말이야. 그냥 살만 바른게 아니라, 소화기관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지. 아주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그걸 건드려보니 툭 터지면서 내용물이 사방팔방으로 쏟아져나오는데 글쎄…."
"뭐? 농담이야?"
"나도 농담으로 넘기고 싶어. 헌데 내 직접 봤단 말이지! 그 흐물흐물하게 녹은 살점들…. 덕분에 요새 살이 쭉 빠졌어."
"맙소사, 나까지 속이 울렁거리는군."
"어떤 미치광이인지 모르겠지만 아주 잔혹한 놈일거야. 세상에 누가 제정신으로 그걸 먹어치우겠어? 아주 같은 협박을 다 해댔겠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구만. 나라면 접시에 코를 박고 죽는 한이 있어도 못 먹어."



"…어머, 여보. 이제 돌아왔어요? 이번에는 꽤 오래 걸렸네요. 세상에, 얼굴 핼쓱한 것 좀 봐."
"이런 저런 일이 있었거든.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어."
"저런. 주방에 말해서 수프를 좀 끓여오게 할게요. 먹고 기운내요."
"됐어. 어차피 못 먹을텐데."
"일단 냄새만이라도 맡아봐요. 금방 식욕이 돌걸요?"
"…당신, 왠지 생기가 도는걸."
"후후, 실은 이번에 아주 실력이 좋은 요리사 하나를 거두게 됐거든요. 조금 사연이 독특한 아이인데…


분명 당신도 마음에 들어할 거에요."

================================

*아밀스턴 양 : 
요네자와 호노부 작 <덧없는 양들의 축연>에서.
(스텐리 엘린의 <특별요리>는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