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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EOE(2016)

기만자.

1. 울다하는 도시교역국가로, 상업과 광업, 섬유 산업이 발달했다. 두 얼굴을 가진 상업신 날달을 수호신으로 섬긴다.

여자는 그를 불러세웠다. 이따금 길에서 스쳐지나가는 남자가 튿어진 상의를 깁은 모양새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색색의 실과 바늘쌈, 쪽가위와 같은 재봉도구가 담긴 가방을 펼친 그녀가 성벽 한쪽에 기대앉아 너덜너덜한 옷을 깨끗하게 손질하는 동안 졸지에 상의를 빼앗긴 그는 머쓱함을 감추려 그녀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댔다. 그 주고받음이 썩 불쾌한 것은 아니어서, 두 사람은 수선을 끝낸 상의를 건네주고 헤어지는 대신 술집에서 술이나 한 잔 마시고 헤어지기로 했다. 

그리하여 낡은 탁자 아래에 놓인 술병이 열 개를 넘어갔을 무렵, 두 사람은 웃음이 멈추지 않아 탁자 끝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어야 하는 지경이 되어있었다. 대체 무어 그리 재밌는 얘기를 하는지 궁금해 다가간 취객 중 하나는 상대가 술을 너무 잘 마신다고 말하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는 다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얼른 제 자리로 돌아왔다. 뒤이어 일행의 허리춤을 쿡 찌른 그는 길거리 점쟁이 마냥 한껏 낮춘 목소리로 속삭였다. 장담하지. 앞으로 일 년 안에 저 두 사람은 결혼할거야.

과연 그 말대로였다.

"그러니까 술은 잘 마시고 볼일이란다."
"테클라, 일단 부정하진 않겠지만 뱃속의 아이에게 하기엔 너무 이른 충고가 아닐까?"

약 열 달 뒤 건강한 아이를 낳은 두 사람은 자그마한 집에서 가난하긴 해도 행복하게 살았다. 열병의 파편이 그녀의 폐부에 스며들어 몸 속 깊숙이 웅크리지 않았더라면, 좀 더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 수 있었겠지.

가난하긴 해도 행복한 삶은 병마를 만난 순간 늪에 떨어진 빵조각마냥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가족간의 웃음과 수다, 저녁 무렵의 촛불빛에는 가격표가 없었으나 병마를 쫓아내거나 환자의 고통을 줄여줄 약과 진단에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비싼 가격표가 달랑거렸다. 여자의 얼굴이 반쪽이 되고 헛소리를 할 지경이 되자 남자는 거의 반쯤 미쳐 돈이 될 것을 닥치는대로 긁어모았으나 열병은 그보다 한 발 앞서 여자의 목숨을 거둬갔다. 그녀가 임종하는 순간 유일하게 곁에 있었던 아이는 차가워지는 손을 잡고 어머니의 열이 내린 모양이라고 안도하고 있었다. 

남자는 문간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주저앉았다.
떨어진 주머니에서 묵직한 소리가 났다.

=

반려를 잃은 남자가 모은 돈을 술집에서 탕진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를 때리는 삶으로 전락하거나, 몸에 좋은 약이랍시고 고통없이 죽는 독약을 각각의 손바닥에 얹곤 물과 함께 삼키는 일은 없었다. 대신 장삿길에 흘러들어간 돈은 누가 저승에 저당 잡힌 죽은 이의 목숨에 후한 값이라도 쳐준 것 마냥 눈 깜박할 세 불어났다. 아이는 골목길의 작은 집에서 중심가의 저택으로 옮겨졌고, 살아가는 면적이 넓어진 만큼 집을 관리하기 위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아이는 새로 만난 면면들을 모두 친근하게 여기고 반겼으나, 그 댓가로 아버지의 발소리와 손길에서 멀리 떨어지고 말았다. 

그가 아이를 쓰다듬는 법이나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법을 각종 계산과 저울과 잣대와 경쟁 뒤로 내팽개친 것은 아니었으나, 사람에게 주어진 몸이 하나인 이상 상업에 몸을 던진 그는 아이의 곁에 있을 수 없었다. 만약 아이가 죽거나 다친다면, 특히나 빌어먹을 열병 따위를 앓다 죽는다면 곡괭이를 머리에 찍어 죽여버리겠다는 경고를 받은 집사 한 명이 그를 대신하여 아이의 옆자리에 서있었다.

신분의 고차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는 집안일을 하는 하녀와 하인들과 자주 어울려 놀았다. 집사는 집안 구석구석으로 숨어 도망다니는 아이를 찾을 때마다 한 패가 되어 아이를 숨겨주곤 모른 체 하는 하인들을 상대로 진을 빼야했다.

"도련님 덕분에 전 팔자에도 없는 탐정이 될 판입니다."
"탐정 재밌겠다. 난 조수할래."
"좀 반성을 해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더글라스가 하인들의 눈치만 보고도 아이가 어디 숨었는지 알게 되었을 무렵, 아이의 아버지가 죽었다. 

마물에게 습격당해, 뒤늦게 발견된 시체를 수습하고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그가 쌓은 재물은 빠르게 허물어져갔다. 애초에 빚으로 시작된 사업이니 맺을 건 확실히 맺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장례식장까지 찾아온 상인과 사업가들이 채권이니 각서같은 것들을 들이밀며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몸을 벌벌 떨며 장례식장 구석에 숨어있었다.

집사가 하인을 시켜 아이를 돌려보내고 잠시 자리를 비운 그사이 하인과 하녀 몇몇이 말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미처 닫지 못한 문 틈새에선 남은 하인들이 월급이니 퇴직금이니 하는 이야기를 나누며 한숨을 쉬었다. 병든 가족들. 식사를 해야하는 가족들. 장작과 학비와 부서진 벽. 

지친 기색으로 돌아온 집사는 수고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아이 앞에서 잠시 뜨악한 표정을 지었으나, 아이가 드물게 진중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랬다간 도련님에겐 한 푼도 남지 않을겁니다."
"괜찮아."
"괜찮아? 진심입니까? 부모도 없고 친척도 없고 돈도 한 푼 없는 울다하의 11살 꼬마라는게 어떤건지 알아요?"
"더글라스가 싫으면 내가 할게. 나누기 정도는 할 수 있고... 실은 금고 어떻게 여는 지 알아. 돈도 내가 다 숨겼어. 더글라스는 절대 못 찾을걸."
"……하하, 제기랄. 그래요. 어디 길바닥에서 굴러먹어봐요."

다행히도 아이에게는 그를 도와줄 하인이 몇 명인가 남아있었다. 그들은 금고에서 아이가 꺼낸 돈을 모두 세고, 조심스레 계산하여 각자에게 돌아갈 금액을 정한 뒤 새하얀 봉투에 꼼꼼히 돈을 담았다. 다음날 아침 아이에게서 직접 그 봉투를 받은 하인들은 그에게 인사를 하거나, 아무 말도 없이 몸을 돌리거나,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말을 남기곤 방을 나갔다.

잠깐 돌아온 집사는 그걸 제 주머니에 쑤셔박고 떠났다.

가구 몇 채가 들려나갔다. 징수를 하러 온 작업원은 아이를 보고는 썩 곤란한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아이의 아버지가 어디의 누구씨에게 진 빚을 갚지 않았기에 이를 가져가게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아이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도 비슷한 부류들이 몇 번이고 찾아왔다가 가구를 가득 싣고 떠나갔다. 짐 사이에 실려 떠나가는 하인도 있었다. 아이의 손인사는 무시되거나 마주 돌려보내지거나 했다.

그리고 비가 내렸다.

아이는 하염없이 계단참에 앉아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문을 걷어차다시피 들어온 집사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거침없이 걸어들어와 아이 앞에 멈춰선 그에게서 비와 모래 냄새가 났다.

"빌어먹을 상인 새끼들…. 빚 문제는 다 처리했습니다. "
"응,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난 그리다니아로 갈 겁니다. 거긴 좋아요. 숲 속이고, 탁 트였고. 가서 목수 일이나 하면서 살거에요."
"응."
"도련님도 같이 갑니다."

아이는 고개를 들었다. 집사는 딱히 뭐 별 것도 아니라는 얼굴이었다.

"가능한 한 울다하에 미련은 싹 자르고 싶은데, 어린애를 남기자니 뒷맛이 끔찍해요. 지긋지긋한 상인놈들이랑 똑같은 놈이 되고 싶진 않으니 얌전히 따라와주시죠.

당연히 이 저택은 팔 겁니다. 수고비와 합치면 그리다니아로 가서 집을 살 정도는 되겠죠. 거기선 정령와의 교감을 받아야 이민할 수 있다고들 하던데, 뭐 우리가 가서 재앙을 일으키려는 것도 아니고 별 문제는 없을 겁니다. 

자, 할 일이 바쁘니 그만 일어나주세요. 거기 앉아있다 감기라도 걸리면 코르네유 주인님이 저세상에서 곡괭이 들고 저 쫓아옵니다."

아이는 일어나는 대신 울음을 터뜨렸다.


2. 그리다니아는 전원도시국가로, 임업과 농업, 목제 및 가죽 공예업이 발달했다. 공식적인 수호신은 풍요의 여신 노피카.

소년이 의자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걷잡을 수 없는 호흡이 입가에서 날뛰었다. 고개를 숙인 채 맞은편 자리에 앉아있던 더글라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소년이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소리쳤다.

"제기랄, 제발 그만 좀 웃어요!"
"그치만, 그치만 더글라스가-."

소년의 목소리가 바닥에서 들끓기를 멈추지 않는다. 더글라스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앓는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내가 미쳤지, 진짜 정신이 나갔지, 어쩌자고 도련님한테 말했는지.

"아냐, 미안해, 진정했어. 응, 그러니까, 조, 좋아하는 사람이…."

간신히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은 소년이 또 웃음을 터뜨린다. 더글라스는 다 포기한 얼굴로 탁자에 얼굴을 박았다. 소년이 야생에서 채집해와 키우고 있는 라벤더 화분이 들썩였다. 

"예에! 저는 소름 돋는 소리도 참 잘하는 열 여섯 살 누구씨랑은 달라서 말이죠!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머리가 굳는 멍청이입니다!"
"괜찮아! 사람은 다 그래!"
"거참 고맙기도 해라!"

소년은 키득키득 웃고는 의자를 바싹 끌어당겨 앉았다. 더글라스는 여전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상대는 누구야? 내가 도와줄게."
"…도련님이 도와주지 않아도 되요. 이번에 그리다니아로 이주하신… 니베이아라는 분이니까."
"……."
"알아요, 그 사람 어린 딸이 있죠. 남편은 죽었다던가, 이혼했다던가... 근데 반했어요. 젠장, 한 눈에 반한다느니 어쩌니 하는건 다 헛소린줄 알았는데." 

더글라스가 탁자에 머리를 찧자 라벤더 화분이 더 크게 흔들린다. 소년은 급한대로 손을 뻗어 더글라스의 이마를 보호하고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더글라스, 귀가 새빨개."
"좀, 못 본 척, 해주시죠!"
"다 보이는걸 어떡해."

소년은 그렇게 말하곤 이제 가족이나 다름없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사람, 정말 사랑하는구나."
"……그래요."
"그럼 내가 도와줄게."
"됐어요. 내가 어떻게 감히 그 사람을."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 ……괜찮아."

그 뒤로도 더글라스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역시 자기는 안 될 것 같다느니 그 사람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느니 하며 움츠러들길 반복해 퍽 소년의 구경거리가 되었으나, 결국 흔하다면 흔하고 혹은 세상에 다시 없을 과정을 거쳐 니베이아와 연인이 되어, 마침내 미래를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그날 상기된 얼굴로 돌아온 더글라스가 다짜고짜 소년을 껴안고 빙빙 도는 바람에 둘 다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쓰러지는 불상사가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결혼식 날, 니베이아는 소년이 만든 부케를 들고 천천히 식장에 들어섰다.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누구 하나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모두가 목청 높여 환호했다. 소년도 그 틈바구니에서 웃음을 떨치질 못했다.

소년이 모험을 떠난 것은 일주일 뒤의 일이었다.

"…정말 가려구요? 우리, 한 가족이 된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죄송해요, 니베이아씨. 그치만 역시, 모험가가 되는 편이 아름다운 분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걸요."

"그런 이유로 모험을 떠나는 사람은 온 세상 천지 당신 뿐일겁니다.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돌아오거나 연락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원한 사지 마세요. 아시겠어요?"
"알아, 더글라스. 걱정마. 아무 일 없을 테니까."

"오빠 편지 많이 써줘. 샬럿 친구들한테 다 자랑할거야."
"응, 멋진 이야기를 잔뜩 보내줄게."

밝게 웃는 샬럿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소년은 허리를 들어 자신을 마중 나온 가족을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더글라스, 니베이아, 샬럿."

"고마워요."

사랑해요.

3. 림사 로민사는 해양도시국가로, 어업과 조선업, 금속 가공업, 해운업이 발달했다. 항해의 여신 리믈렌을 수호신으로 섬기고 있다

"…이제 알겠어요. 더 이상 당신과 있으면 안돼요. 당신은 정말로 다정하고, 상냥하고... 그래서 나는 당신과 있으면 그만 안주하고 말아요. 당신이 나를 이끌어 줄거라고 믿어버려요. 괜찮다구요? 알아요, 그 말 할 줄 알았어요. 당신은 늘 그 말을 하지요. 나를 인도하고 감싸주지요. 하지만 그러면 안됐던거야. 당신은 모두에게 상냥해. 모두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그러면서 정작 자기는 뒷전이야.

당신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 그런데도 누군가를 아끼려고 하지. 마치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 같아요. 그런건... 그런건 안돼요. 그럴 수는 없어요. 나는 당신에게서 벗어날 거에요. 당신에게서 벗어나, 그 미친 짓을 멈추게 하겠어요. 그래도 당신은 또 누군가에게 다정하게 대해주겠지…. 내가 유일하게 마음이 쓰이는 점이라면 그것 뿐이에요. 하지만 나는 도저히 당신이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 자신이 없어요. 그러니 차라리 떠날 수 밖에. 잘 지내도록 해요.

난 당신의 알맹이를 파먹지 않고서도 행복해질 수 있어요."

[안녕, 샬럿. 잘 지내고 있어?

최근에 라노시아 지방에서 겪은 얘길 들려줄게. 그곳에 까맣고 동그랗게 생긴 도도새라는 생물이 살고있는데, 그중에서도 사람이 버린 음식을 주워먹고 몸집을 거대하게 부풀린 새가 자기 동족들을 못살게 굴고 있었어. 다가가려고만 하면 독샘에서 독을 뿜는 통에 다들 쩔쩔매고 있었지. 그래서 ...(중략)... 하여, 화살을 맞은 도도새는 쓰러졌어. 너무 살이 쪄서, 당분간은 사람들이 운동을 열심히 시켜줄거라는 모양이야. 살이 빠지고 몸이 작아지면 다른 친구들과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겠지. 그리고 또 ...(중략)... 그 고기를 요리하느라 사흘 밤낮은 매달렸던 것 같아. 이런, 편지지가 슬슬 끝날 것 같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안부 전해줘. 건강하게 지내.

추신. 동봉한건 그 도도새의 깃털이야. 친구들에게 자랑해.

-샬럿을 사랑하는 오빠가.]

"그만 헤어지자. 아니, 네가 싫어진 건 아냐. 그냥 더 이상 네 곁에서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한 것 뿐이지.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늘 곁에 있어주고, 위로해주고, 응원해주고…. 좀 즉흥적인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야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내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네 안에,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다른 뭔가가 있다는 거야.

차라리 네가 바람을 핀거라면 화를 내겠는데…. 그게 아니잖아. 젠장, 너는 나에게 충실했어. 내가 확신해. 그런데도 네 마음 깊은 곳에 내가 아닌게 있어. 그걸 알고 있었어? …아니, 그냥 대답은 듣지 않을게. 잘 있어.

그래도 너와 같이 지내는 동안 불행하진 않았어."

[더글라스, 요즘은 어때?

나는 잘 지내고 있어.  확실히 세상을 돌아다니다 보니 아름다운 분이 많이 보여서 좋네. 매번 가슴이 설레는 나날이야. 아하하, 이렇게 쓰고 있자니 벌써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게 보이는 것 같네. 너무 화내지 마. 아무래도 이게 내 천성인 모양이야. 이번에는 돌아다니다 사골란 사막이란 곳을 갔는데 ...(중략)...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 널부러진 모래지렁이 떼라니, 보고있자니 몸서리가 다 쳐지더라. 차마 화살을 다시 뽑을 엄두가 안 나서 죄 다시 사야했어. 아, 돈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 모험가 길드의 의뢰 보상도 있고, 정 없을 때는 마을에서 노래를 하면서 모으거든. 의외로 즐거워. ....(중략)... 이런, 편지지가 다해가니 이만 쓸게. 잘 지내고, 두 사람에게 안부 전해줘.

추신. 근처에 울다하가 보였는데, 가보진 않았어. 그냥... 내키지 않아서. 게다가 내 집은 더글라스가 있는 그리다니아니까. 알잖아?

-더글라스를 많이 사랑하는 도련님이.]

"그거 알아? 너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거나 들을 때마다 웃지 않아. 입이야 웃지, 눈이야 휘어지지. 근데 마음이 안 웃어. 아니라고? 어디서 나한테 거짓말을 하려고 해. 네가 아무리 흐릿한 말로 숨기려고 해도 나는 다 알고 있어. 너는 사랑한다는 말 자체가 버거운 사람이야. 그런데 멀쩡히 타인과 사귀려고 하다니, 말도 안되지. 위선자도 이런 위선자가 없어. 사랑한다는 말도 듣지 못하고 아예 발음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남을 지탱해주려고나 하고. 그게 아니라고? 오해가 있어? 웃기지 마. 네가 남에게 뭘 바라지도 않고 도와주는 이유, 말해줄까?

너는 다른 누굴 '이미' 사랑하는거야. 그것도 지독하게 사랑하겠지. 그런데 그 사람에게서 사랑받을 자신이 없어서 도망친거야! 그러고선 메워지지 못한 애정을 다른 걸로라도 메꾸고 싶어서 다른 사람에게 달라붙었지! 그런 식으로 지내면, 자기를 짓밟고 남에게 진심인 것 마냥 제 살을 베어 먹여주면 모두가 눈물 흘리며 기뻐하고 그 사람을 대신해서 널 사랑해줄 테니까! 이 끔찍한 기만자 새끼! 당장 내 눈 앞에서 꺼져!"

[니베이아씨에게. 몸은 건강하신가요.

지금 저는 포도주 항구라는 곳에서 잠시 쉬고 있어요. 이름 그대로 포도주를 만드는 곳이라, 조금만 걸어도 포도향이 진하게 풍겨옵니다. 조금 마셔보았는데도 맛이 좋아서, 어렵게 한 병을 구했습니다. 요리에 쓰면 좋다고 하네요. 깨지지 않고 잘 가기를 바라며 둘둘 말았는데, 좀 과해져서 큼직해졌습니다. 찬찬히 풀어서 쓰시면 되요. 그리고...(중략)... 이만 쓰겠습니다. 더글라스와 샬럿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추신. 제 건강은 염려마세요. 늘 건강하답니다.

- 니베이아씨를       ]

펜이 멈췄다. 바깥에서 서늘한 바람이 새어들어와 목 뒷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쓸 수 있어, 제발. 진정해. 별다른 말도 아니고, 바로 앞 정면에서 하는 말도 아니고. 기껏해야 선을 몇 개 그으면 끝나는 일이잖아 샬롯과 더글라스에게 보낼 때에도 순식간에 끝났어… 소년이 기도문이라도 읊는 것마냥 스스로에게 되뇌이는 동안 편지지가 재촉이라도 하듯 살짝 흔들렸다. 

소년은 아예 펜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제 손목을 주무르며 초조하게 방 구석을 맴돌았다. 네 글자. 네 글자야. 그것만 넘기면 할 수 있어. 매번 인사 자리에 잉크나 물자국을 남길 순 없잖아. 이상하게 여기게 하면 안돼. 그냥, 자연스럽게 쓰면 되잖아.

(사)

마치 다른 단어를 쓰는 것처럼 생각하는거야. 그런건 얼마든지 있잖아. 지금 생각나진 않지만, 그런 말들이 있어. 아무렇지도 않은 말들. 그걸 쓰듯이 쓰면 되는거야.... 그냥 자연스레 잡고,펜을 움직이면 돼. 그냥 글자 네 개야. 전체 내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사소한 내용이라고.

(랑)

(하는)

사랑한다고?

머리가 세차게 벽에 부딪쳤다. 반동을 어쩌지 못하고 뒤로 나동그라진 소년은 번쩍이는 눈과 이마를 감싸쥐고 한참을 끙끙거려야 했다. 뜻밖의 충격 때문인지 아까까지의 초조함이 조금 덜해진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연신 얼굴을 문지르며 숨을 몰아쉬던 소년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것 처럼 비스듬한 시야 속 돌바닥과 맞은편 벽을 뚫어져라 노려보다 제가 방금 도망친 자리로 돌아갔다. 내던진 펜을 다시 쥐고 손을 움직여, 편지의 마지막을 완성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니베이아씨(잉크자국)의 사랑스런 아들이]

몸에서 힘이 빠진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 깃펜을 주울 여력도 나지 않아 그대로 의자 위로 늘어져버린 소년은 제가 방금까지 한 짓을 떠올리고 얼굴을 감쌌다. 가느다란 손아귀 사이로 탈진한 듯한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가, 이내 흐느낌이 되었다.

=

"아아, 코소테. 여기에요. 네, 미안해요. 내가 대신 나왔어요. 도저히 얼굴을 마주하고 침착하게 말할 자신이 없다네요. 나도 당신에게 묻고 싶은게 있기도 했구요. 일단 그 아이의 전언부터 말해줄게요. <미안해요, 우리 헤어지는게 좋겠어요. 정말 미안해요.> ...사실 이건 내가 좀 요약한 거에요. 원래는 미안하다는 말이 열번은 더 넘어요. 대체 뭐가 그리 미안하다는 건지…. 아아, 아니에요. 사과하지 말아요. 오히려 내가 더 유감스러울 정도인걸요. 두 사람의 일이니 내가 파고들수는 없지만, 정말 다정해보였는데.

…저기, 코소테. 이제부터 어디로 가나요? …어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하여간에 음유시인이란 사람들은 이렇다니까. 나도 전에 음유시인을 사귄 적이 있는게… 아차, 이게 아니지. 실은, 당신을 만나고서 계속 묻고 싶은게 있었어요. 무례하고 이상한 질문이라면 사과할게요. 있죠….

코소테라는거, 정말 당신 본명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