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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탐정의 속삭임(2014)

[무정지오]수면의 두께, 마음의 거리

물 밖으로 상체를 내밀면 목의 아가미가 덮인다. 젖어있던 비강이 마르고 뭍의 공기를 빨아들인 허파가 부풀어오른다. 깊은 물에 잠긴 종소리처럼 울려퍼지던 의사와 감정은 이제 성대와 혓바닥을 통해 억지로 형태를 부여하지 않으면 전달되지 않는다.

어부 혹은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놀리는데 재미를 느끼는 세이렌같은 부류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시간을 물 속에서 보내는 인어는 뭍의 건조한 의사소통 방식에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무정은 뭍의 언어를 잘 알았다. 인어가 수면의 경계선을 넘는 순간 순식간에 몸뚱이에 붙는 값어치도.

불사의 피. 불사의 살점. 정확하지도 않은 입소문은 죽은 인어의 시체조차 같은 무게의 금에 상응하는 귀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게 살아있는 인어라고 하면, 가격은 감히 입에 올릴 수도 없을 정도로 묵직해진다. 인어 사냥꾼들이 길게 살고싶다면 뭍에 오르기 전 살아있는 인어의 숨통은 끊어놓으라고 하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러나 무정은 수조에 담긴 채로 지상에 올라왔다.  겨우 해변가까지 올라갔던 과거의 경험까지 합친다면 두 번째 상륙이었다. 물에 풀어진 마취약과 세정제 냄새 때문에 쾌적한 여행길이라고 하긴 어려웠으며, 물을 반으로 자른 것처럼 투명한 수조 유리 너머의 시선은 불쾌했다. 무정은 몇 번인가 수조를 부수려는 시도를 했다가 수조에 담긴 물채로 감전당하거나 마취약을 맞았다. 그녀는 몰랐겠지만 그 난폭한 행동과 몸에 남은 상처는 상류층의 취향에 걸맞지 않는 외형과 어우려져 상품 가치를 조금씩 깍아먹었다. 큰 돈을 들여 인어를 유통하는 중개인의 입장에선 머리를 쥐어뜯을 일이었다.

따라서 그녀를 마음에 들어하는 유별난 구매자가 등장했을 때, 무정은 유래없이 신속한 속도로 매매되었다. 절대만족을 보장하는 영수증과 함께 인어를 배달한 차량은 행여나 구매자의 마음이 바뀔까 염려하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달아났다. 무정은 여전히 불쾌한 상태로 고정된 수조 속에서 비늘로 뒤덮인 하반신을 휘어뜨리고 있었다.

「─」

유리를 사이에 둔 뭍의 언어는 일렁이는 물결 사이로 보이는 햇빛처럼 일그러진다. 무정은 이맛살을 찌푸린 표정 그대로 투명한 벽에 손을 대고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그는 잠깐 곤란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이내 수조 위쪽으로 자리를 옮겨 무겁게 고정되어있는 뚜껑을 열어젖혔다. 공기청정기가 가동되면서 흔들리는 수면 때문에 남자의 모습은 아까보다 더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였다.

「─...」

뭍의 언어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지 못한다. 태생부터 공기를 품고 있는 탓이다. 마찬가지로 물의 파동도 수면 밖으로 떠오르지 못한다. 다만 인어는 물 밖으로 상반신을 내미는 것으로 뭍의 언어를 토해낼 수 있었다. 인간과 교류할 수 있었다. 그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무정은 잠깐 위쪽을 응시하다 단 한 번의 헤엄으로 얇은 수면 너머로 상반신을 드러냈다.

검은 머리의 남자였다. 어쩐지 수상해보이는 분위기에, 왼쪽 눈 아래에는 점이 있었다. 이름은 당연히 모른다. 얼핏 보이는 표정은… 놀라움과, 기쁨인가. 무정은 제 몸에 고인 물기를 걷어낸 뒤 건조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한동안 쓸 일이 없었던 성대에 공기가 스치며 기이한 소리를 냈다. 

(그건 목소리라 부르는 거야)

"뭘 원하는 거지?"

남자는 뜻밖에도 얼굴이 붉어졌다. 병의 증세인가. 남의 눈에 보일 정도면 꽤 심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역시 약재로 쓰기 위함인가. 무정이 거기까지 판단했을 때 남자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누가 보았더라면 이미 구입한 인어에게 동거 허가를 구하는 머저리가 있다며 조롱거리로 삼았겠지만, 다행히도 이곳에는 상처투성이인 단발의 인어와,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모를 검은 인간뿐이었다. 

"거절한다면?"
"음, 거절, 하지 말아주셨으면 하는데."

저는 당신에게 반했거든요.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붉고, 차가운 물 속에서만 살아온 인어는 열기를 머금은 뭍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텅 빈 물 속에 애꿎은 그물을 내던진 꼴이었다. 그게 무슨 이유가 될 수 있냐며 되묻는 인어에게, 남자는 조금 쑥쓰러운 듯 대답했다.

"사랑하는 이와는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고 싶으니까요."

무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뭍의 인간을 응시했다. 그의 입술에서 나오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말이 아직 마르지 않은 귓가에 겨우 걸려있었다. 이토록 가볍고, 아무런 무게도 없는 진동이라니.

"소름끼쳐."

그 말을 끝으로 무정은 물 속으로 잠수했다. 사면이 투명한 수조 속에 숨을 곳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만 작은 모래와 자갈이 깔린 바닥은 있었다. 무정은 그 가장 깊은 곳에 가라앉아 고요한 물을 들이쉬었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겨둔 남자의 말이 수면 위를 떠다니며 그녀의 비늘 위에 흐릿한 그림자를 남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