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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탐정의 속삭임(2014)

독 초콜릿 살인사건. 무정편

"범인은 남편이다."

무정은 읽고있던 자료를 탁자 위로 내던지며 말했다. 이어 담배를 빨아들이는 그녀를 향해, 유시후와 무정 두 사람 분의 담배연기를 피해 최대한 몸을 뒤로 빼고 있던 예서가 투덜거렸다. 무정 탐정님, 근거까지 이야기 해주지 않으시면 안된다구요. 무정은 한숨인지 뭔지 모를 담배 연기를 짧게 뱉으며 그녀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초콜릿의 이동 경로는 총 세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초콜릿 회사로부터 '유스티스 펜퍼더' 교수. 교수으로부터 '그레엄 벤딕스'. '그레엄 벤딕스'로부터 아내 '조안'."

자료 한 장이 뒤집어지고 근처를 굴러다니던 볼펜이 간단한 그림을 죽죽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나란히 그려진 네 개의 원과 그 각각의 원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어나가는 화살표 세 개. 이윽고 원 하나하나에 거칠게 용의자들의 이름을 적은 무정이 첫번째 원과 두번째 원 사이의 화살표를 짚으며 말했다.

"초콜릿 회사로부터 유스티스 펜퍼더 교수로의 이동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허술하다. 허술함을 가장했다치더라도 타겟에 대해 너무 무관심해. 그의 기호품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표적이 독을 먹을지에 대해 궁리한 흔적이 전혀 없어. 결국 독 초콜릿이 교수에게서 그레엄 벤딕스에게 넘어갔는데도 회사는 어떤 대처도 하지 않았다. 만약 초콜릿 회사가 범인이라면 여기는 자기가 무슨 짓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머저리들의 집합소겠지."

볼펜은 그대로 두번째 원과 세번째 원 사이의 화살표로 이동했다.

"다음은 교수에게서 그레엄 벤딕스로의 이동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유스티스 교수가 뜻하지 않게 초콜릿을 얻은 것과 그레엄이 초콜릿을 받아간 상황이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전부터 그레엄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있던 남작이 때마침 자신에게 들어온 잉여물품에 독을 발라 그레엄에게 주었다고도 가정해볼 수 있겠지.
하지만 독살의 기본은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초콜릿에 독을 바른다면 그건 초콜릿과 마찬가지로 단 맛이 나거나 혹은 아예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물건이어야 해. 하지만 그레엄 벤딕스는 맛에서 "위화감"을 느끼고 초콜릿을 2개 이상 먹지 않았다. 그리고 살아남았지. 그런 식으로 자극적인 맛을 가진 독으로 상대를 독살하려 한다는 건  "돌발적으로 들어온 초콜렛에 이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독을 발라 사람을 죽이는" 상황과는 모순되는 요소다."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무정은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였다. 테이블은 이제  흡연자와 고통받는 비흡연자로 나뉘어버린 상태였다. 허공에 탁하고 가벼운 한 줌의 고통을 한 번 더 흩뿌린 뒤, 무정은 마지막 화살표를 짚었다.

"다음은 그레엄에게서 아내 조안으로의 전달이다. 이건 동시에 그레엄에게서 그레엄 자신으로의 전달이기도 하지. 하지만 이 전달에서 중요한 것은 "상황 전달자가 한 명"이라는 사실이다. 증언에 따르면 그레엄 벤딕스는 혀가 타는 듯 따가워 먹기를 그만두었지만 아내는 색다른 맛이라며 계속 초콜릿을 먹었다지. 하지만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사항은 없다. 그레엄 벤딕스는 죽지 않을 만큼의 양을, 그의 아내는 치사량을 먹었다는 사실이 확인될 뿐이지. 애초에 그는 정말로 "혀가 타는 듯 따가운 감각"을 느꼈을까? 아내는 그 맛을 "색다르다"고 느꼈을까? 어떤 이유를 대서든 초콜릿을 2개만 먹고 마는 일 정도는 간단하겠지. 죽은 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테니. 따라서 범인은 남편이다."

뒤이어 그레엄 벤딕스라는 이름에 크게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그럼 남편은 왜 아내를 살해한거지? 김철수의 추가 질문에 무정이 짧게 혀를 차더니 재를 털었다.

"그런건 알 바 아니다. 교수와 아내가 바람이라도 피웠겠지."
"하지만 그 추리에는 약간 비약이 있는 것 같은데. 유스티스 교수가 처음부터 그레엄 벤딕스의 아내를 노리고 있었고, 그녀의 입맛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초콜렛에 일부러 자극적인 맛의 독을 넣었을 수도 있지 않나?"

그녀와 그나마 가깝지만 서로의 팔이 닿지 않을 만큼 떨어진 자리에 있던 유시후의 말에 무정이 짧게 혀를 찼다. 자신의 추리를 지적받았기 때문에 짜증이 난 것인지, 아니면 그가 말을 걸어왔다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녀는 곧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것으로 태도를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초콜릿의 맛 따위는 제조공장에 물어보면 금방 들통날 문제다. 공장측이 범인일 가능성은 조금 전 제외되었으니, 초콜릿에 자극적인 독이 가미되었다면 그 중간 유통 과정을 의심해야 마땅하지. 그 경우 가장 유력한 후보자는 유스티스 교수가 된다. 한 개인의 입맛을 고려할 정도로 세심하게 독을 준비한 인물이 그런 식으로 자신의 꼬리가 밟힐 짓을 하진 않겠지."
"유스티스 교수를 꽤 신뢰하는군."

유시후가 농담처럼 꺼낸 말은 무정의 차가운 시선에 꿰뚫려 죽었다. 무정은 단숨에 깊이 담배를 빨아들인 뒤, 한 웅큼의 연기를 토해냈다.

"이건 단순히 자료를 기반으로 판단한 추측이다. 실제로 유스티스 펜퍼더의 무죄나 그레엄 벤딕스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선 대질심문이 필요하겠지."

무정은 그걸로 이야기를 끝냈다. 그녀가 말하는 "대질심문"이라는 단어가 묘한 무게를 가지고 아래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