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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탐정의 속삭임(2014)

최초의 저주에 대해서


"왜 이 아이는 죽지 않는거지?"

자희는 탁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바싹 마른 몸에 언덕처럼 부풀어오른 배가 둥글었다. 은영은 젖은 수건으로 자희의 몸을 구석구석 닦아주며 조용히 대답했다. 아이도 살고싶은 거겠죠. 은영의 대답의 들은 자희의 눈이 매섭게 치솟았다.

"살아? 자기가 뭔데 감히 살고 싶어 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불쌍하잖아요."
"이깟 살덩어리의 어디가 불쌍하다는 거야? 아무 생각 없이 내 몸에 들러붙은 이 살덩이 때문에 미래도 시간도 희망도 다 빨아먹히는 내가 더 불쌍하다고!!"
"자희씨..."

은영의 타이르는 말이 채 끝날 사이도 없이, 자희가 앙상한 손을 들어 자신의 배를 내려쳤다. 지금 당장 죽어버리는 낮은 저주와 함께 퍽, 퍽, 거리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퍼진다. 은영은 서둘러 자신의 가방을 뒤져 안에서 진정제를 꺼내들고 자희의 한쪽 팔을 붙잡았다. 섬뜩한 눈으로 자신의 부풀어오른 복부만을 노려보며 끊임없이 저주의 말을 중얼거리던 자희가 은영의 움직임을 뒤늦게 눈치채고 몸을 비틀어댔지만 한때 간호사였던 은영은 버둥대는 환자를 제압하며 주사하는 방법을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 가느다란 팔에 재빨리 약을 주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축 늘어지는 자희의 몸을 조심스레 눕힌 뒤, 은영은 주삿바늘과 빈 앰플병을 안전한 곳으로 치우고 버둥대느라 흐트러진 자희의  옷자락을 추슬러주었다. 안 그래도 주삿바늘 자국 가득한 팔꿈치에 또 한번 늘어난 바늘 자국이 푸르렀다.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하다. 은영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낸 뒤 자희가 확실하게 잠들었음을 확인하고 잠깐 방을 나왔다. 자희와 은영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집안은 고요했다. 이번에 전화하면 혹시나 받을까 싶어 걸어본 전화는 아니나 다를까 부재중 전화로 연결되었다. 늘 있는 일이었기에 은영은 간단한 문자만 보내놓고 잠시 자리에 앉아 땀을 식혔다.

이래저래 자희를 돌보게 된 지도 벌써 반년이 다 되어간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리 티나지 않던 배도 이제 거의 둥글게 부풀었다. 본래라면 흐뭇한 미소가 지어져야 할 풍경이지만, 정작 아이를 밴 자희의 히스테리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만 가고 있었다.

원하지 않았던 아이.

자희는 몇 번이고 그렇게 말했다. 더 심한 경우에는 기생충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제껏 유산을 시도한 적은 수도 없이 많다. 이제는 태아와 모체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자칫 잘못하면 자희 본인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말해줘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자희는 그런 말을 들을 수록 더욱 악에 차서 아이를 유산시키려 했다. 자희에게 뱃속의 아이는 암덩어리나 종양처럼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사실 무리도 아니다. 사전에 들은 바에 의하면 자희의 임신은 그녀의 오빠를 향한 원한과 연결되어 있었다. 직업상 원한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오빠의 행적이 엉뚱하게 여동생에게 돌아와 그녀의 몸과 정신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이다. 

그래도 뱃속의 아이에게는 죄가 없다. 있을 리가 없다. 은영은 그렇게 믿었다. 지금은 저토록 제 뱃속의 생명을 향해 이를 갈고 있는 자희도, 막상 아이를 품에 안아본다면 기적처럼 모성애를 깨닫게 되라라.  

그 순간 은영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는 상기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했지만 목소리는 속절없이 들떠있었다.

"네. 자비씨. 무슨 일이세요?"

=

자희는 눈을 떴을 때 사방은 캄캄했다. 아마 새벽일 것이다. 아니면 밤이거나. 하지만 하루의 시간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뱃 속에 자라는 이 살덩이가 떨어지지 않는 이상 하루는 지옥이자 절망이며 무저갱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악몽은 현실이기에 더욱 끔찍했다. 마른 입으로 누런 숨을 뿜어내며 헐떡이던 자희는 문득 제 뱃속의 태동을 느끼고 눈을 홉떴다. 온몸의 혈관이 비틀리고 근육이 두근거린다. 틀림없이, 제 뱃속의 아이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왜? 
대체 왜?

할 수만 있다면 자희는 제 혈관을 뒤집고 신경을 터뜨려서라도 그 살덩이에게 묻고 싶었다. 너는 왜 내 몸에 달라붙어있는거지? 너는 왜 살아가려고 하는 거지? 그딴 남자에게서 태어난 생명인 주제에.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존재인 주제에. 

(아이도 살고 싶은 거겠죠)

살고 싶다? 인정할 수 없었다. 자희는 자기가 그 더러운 남자로부터 생명을 잉태한 것을 알고 난 이후로 줄곧 그 생명을 짓눌러 터뜨려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런 자신의 생명을 빨아먹고 있는 주제에, 살고 싶어한다는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란 말인가? 살덩이도 당연히 죽고 싶어야 했다. 인생을 포기해야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이 그 살덩이 때문에 모든 걸 잃고 마치 지옥처럼 살고 있는데...

...
........
...............

(아.)
(아아.)

(그렇구나.)
(그렇지 참.)

살아간다는 것은 지옥.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자희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다. 뱃 속의 살덩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그저 본능대로 살을 부풀리며 살아남으려는 것 밖에 모르고 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세상은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도. 자신의 잘못도 아닌 다른 누군가의 죄에 얽혀 신세를 망쳐버릴수 있다는 사실도. 자신이 구렁텅이에 빠져버리더라도 세상 어느 누구도 돌아봐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그 저주스런 몸뚱이를 낳아주자.

그리하여 누구에게도 사랑받는 일이 없기를.
그리하여 누구에게도 다가갈 수 없기를.

누구도 목소리에 귀기울여주지 않고 누구도 진정으로 이해해주지 않고 누구도 손 내밀어 도와주지 않고 그 누구도 힘있게 안아주거나 손을 잡아주거나 해주지 않고 아무도 슬픔을 위로해주지 않아 정신이 병들고 아무도 상처를 치료해주지 않아 몸이 썩어들어가고 그 존재를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없어 홀로 평생을 헤메이기를. 그리하여 자신의 생명을 저주하여 차라리 죽고싶어도 차마 겁이 나 아무것도 할 수 없기를. 그리하여 절망을 호흡하고 좌절에 짓눌리며 고립된 채로 끝까지, 끝까지 살아 자신의 존재와 인생에 그저 끝없이 실망하기를. 지옥처럼 살기를. 무저갱에 떨어진 영혼처럼 불행하고 끔찍한 삶을 살아가기를.

(그래. 너의 존재로 인해 내가 저주받았으니 너는 나에게서 저주받아야 한다.)
(저주받은 채로 살거라, 증오스런 아이여.)

그렇게 생각한 순간 거짓말처럼 온 몸에 온기가 퍼지고 기운이 솟는다. 낳을 수 있다. 나는 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 햇살처럼 박혀드는 확신 속에서 자희는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손놀림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둥근 배 아래,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살덩이는 자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 그거면 됐다. 그 살덩이에게 남은 일은 태어나 고통받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자, 그럼 이름은 무엇으로 지을까.
저주에 걸맞은 끔찍한 이름을 지어줘야 할텐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자희의 얼굴이 달빛 아래에서 부드럽게 빛났다.

=

이름을 지었어. 여자아이라면 정희. 남자아이라면 정한이야.

은영은 자희가 남긴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어버린 채 모포에 감겨 잠든 아이는 딸이었다. 그렇다면 이 아이의 이름은 정희다. 아버지는 누군지 알 수 없는 대신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해달라고 했으니 호적상의 이름은 '무정희'가 되겠지. 내심 아들이면 어쩌나 했는데 딸이어서 다행이었다. 

"...저기, 자비씨. 이 아이는 어떻게 하실건가요?"
"어떻게 하다니?"

밝은 금발의 남자가 눈매를 찌푸린다. 은영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키우실 거죠?"
"키우다니?"
"여동생... 자희의 딸이잖아요."
"그게 뭐? 그냥 적당히 어디 시설 같은데에 보내버리면 끝이지."
"아, 안돼요!!"
"왜 안돼?"
"그건..."

말은 어딘지 모르게 빙글빙글 맴돈다. 은영은 입술을 꼭 깨물고는 무자비에게 가까이 다가앉았다. 타이밍을 놓치면 모든게 수포로 돌아가는 수가 있었다. 

"저는 이 아이를 키우고 싶어요. 그... 자비씨의 아내로써."
"무슨 소릴하는건지 이해가 잘 안되는데."
"제가 무자비씨의 아내가 되서, 이 아이를 무자비씨와 저의 딸로써 키우고 싶다는 거에요.  그럼 자비씨에게는 가족이 생겨요. 이 집도 조금 덜 휑해질 거구요."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짓을 해야 하지?"
"제가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

재밌는 소릴 하네. 무자비는 침묵 끝에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담뱃재를 털었다. 그것이 무자비라는 남자의 허락방식이라는 건 그를 오랫동안 따라다닌 은영도 이미 알고있는 바였다. 그녀는 이미 죽어버린 무자희에게 몰래 감사의 말을 전하며 그에게 좀 더 바짝 다가붙었다. 

"저기, 담배는 끊어주세요. 아이에게 해로우니까."

그리하여 마치 무언가의 부록처럼, 무정희가 무자비와 다은영의 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