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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탐정의 속삭임(2014)

[무정지오/연반]신은 이 자리에 없기에

무정은 기어코 스물 다섯을 넘겨서도 숨을 쉬었고 그 사실을 스스로 견딜 수 없는 날이면 제 살을 찢었다.그때마다 손목은 제외되었다. 가장 손쉽게 닿는 곳은 가장 손쉽게 발각되는 장소니까. 만약 그녀를 모르는 일반인들이, 혹은 탐정이 그녀 손목에 남은 자살흔을 보고 "아, 이 사람은 이 세상을 저버릴 정도로 괴로웠던 적이 있구나!" 라던가 "자살할 용기가 있다면 차라리 살아갈 것이지..."라는 식의 일방적인 감상을 품는다는 것은 얼마나 역겹고 짜증나는 일인가. 그래서 무정은 제 등을, 어깨를, 혹은 무릎 아래쪽을 찢었다. 누가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본다한들 그녀 자신의 손으로 새겼으리라고는 생각 못 할 위치였다. 

피는 무심하게 흘렀고 찢어진 살은 너덜거리다 진물과 함께 달라붙었다. 폭력탐정의 몸에 남은 흉터는 그렇게 무딘 살과 동화되어 그녀를 이루는 무언가가 되었다. 너절하고 말라비틀어져 숨만 덜걱거리는 가죽인형 같은 것. 그날도 무정은 등 뒤에서 빗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깊은 피로함을 느끼고 있었다. 2년은 길다. 그렇기에 이번에야말로 죽어서 되돌려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기이하게 비틀린 시간관념이 규칙적으로 째깍거렸다. 동시에 이미 2년이나 지났는데, 왜 더 살면 안되냐는 비명...같은 것이 바람소리에 맞춰 덜걱거린다. 무정은 피곤함 가운데서 바늘처럼 솟아나는 신경증을 응시하다 손에 쥐고있던 칼을 들었다.

팔꿈치 안쪽이 선뜩하게 베이며 붉은 피가 번진다. 한 번으로는 족하지 않아 세 번 휘두르고, 다섯 번 찢어댄 무정의 손에서 떨어진 칼이 맑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불긋한 칼날은 머잖아 갈색으로 산화되어 거뭇하게 들러붙겠지. 무정은 깊은 현기증이 제 몸을 삼키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추락처럼 잠이 찾아들었다.

...문득, 차가운 감각이 있었다. 무정은 끈적한 무의식과 서늘한 의식 사이에서 유영하기를 그만두고 제 몸을 비틀어 누군가를 향해 겨냥했다. 이지러지고 번뜩이는 시야 속, 이마를 감싸쥐고 쓰러진 남자는 뜻밖에도 그녀가 아는 얼굴이었다.

"이지오."
"네." 

머리를 감싸안은 주제에 대답은 신속했다.

"여기서 뭘 하는거지?"
"문이 열려있어서 잠깐 들어와봤는데, 무정씨가 피를 흘리고 계시길래... 소독중이었어요."
"...쓸데없는 짓을."
"상처는 치료하지 않으면 아프잖아요."

그냥 내버려두면 흉터가 남구요. 뒤에 이어진 말은 묘하게 무정의 신경을 건드렸다. 무정의 몸에 수없이 남아있는 흉터들. 타인에 의해, 혹은 그녀 자신에 의해 태워지고 찢기고 베이며 남았던 흔적들. 그녀가 이제껏 살아온, 살아버리고 말았던 흔적들은 그녀의 몸에 새겨진 채 침묵했다. 그것을 껴안고 살아가는 것은 탐정의 의무니 각오니 하는 문제 이전에 생존과 관련된 일종의 거래였다. 죽기 싫다면, 상처입어라. 상처입기 싫다면.

죽어라.   

"네가 뭘 알아..."

피는 굳어지지 않아 소독된 피부를 타고 느리게 흘러내렸다. 비릿한 냄새가 사방에 가득했다. 그 사이 몸을 바로 하고 앉은 이지오가 그러게요. 하며 수긍했다. 저는 아직 여러모로 미숙해요. 무정씨에 비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겠죠.

"하지만 상처가 아프다는건 알아요."

뭔가를 열고, 뜯는 소리가 난다. 흐릿한 눈으로 쳐다보니 무늬가 알록달록한 것이 영락없는 캐릭터 반창고였다. 무정의 뱃속에서 짓눌린 내장들이 웃음 비슷한 숨소리를 토해냈다.

"그리고 당신이 아프지 않았으면 하구요."

다시금 흐르는 피를 닦고, 소독하고, 탈지면으로 상처를 덮고, 어울리지 않는 반창고를 엇갈려 붙인다. 무정은 그 꼴을 보아 자신이 팔을 몇 번 움직이기만 하면 반창고가 탈지면 째로 떨어져 나가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팔을 움직이기에는 몸이 몹시 피곤했다. 무정은 눈을 감았다.

여기서 자려구요? 감기 걸려요...

이지오의 목소리가 잠깐 울리다 어둠에 파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