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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탐정의 속삭임(2014)

01.의혹

[심문위원회 XX년도 X월 X일 심문보고서]

심문 담당자 : 정민후 (심문위원회 소속)
심문 감독관 : 박중헌 (심문위원회 소속)
심문대상 : 무정(탐정회 소속 / 본명 : 무정희) 

담당 기록관 : 인지하 (기록관리부 소속)

이하의 심문은 인도적인 절차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어떠한 폭력적인 행위나 강압도 없었음을 증명합니다.

담당자: 당신의 칭호와 성함을 밝혀주십시오.
대상자: 이미 알고 부른 것 아닌가? 

담당자: 신원 확인을 위함입니다. 협조해주십시오.
대상자: 성가신 새끼들. 

(이후 대상자는 개인 소유품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대상자의 심문 태도에 대한 담당자와 대상자 사이의 논쟁이 있었으나 대상자가 담당자의 질문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조건 하에 흡연이 허가되었다.)  

담당자: 칭호와 탐정회에 등록된 이름 및 본명을 밝혀주십시오.
대상자: 무정. 본명은 무정희. 칭호는 '폭력'.

담당자: 당신이 어째서 심문위원회에 회부되었는지 알고 있습니까?
대상자: 내가 높으신 분들의 뱃속을 찔러대니 설사가 터진 모양이지.

담당자: 요 몇 개월간의 "난동" 자체는 인정하시는 거군요.
대상자: (무응답)

담당자: 사실 당신이 이곳에 회부된 것은 요 근래 당신이 벌인 "난동" 때문만은 아닙니다. 
대상자: 그럼 무슨 용건이지?

담당자: 사소한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정확히 대답해주시기 바랍니다.
대상자: 사소한 질문 치고는 더럽게 공을 들였군... 뭐냐?

담당자: 무정희씨, 당신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대상자: (무응답)

담당자: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무정희씨, 당신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대상자: 불쾌하군. 지금 이딴걸 질문이라고 하는건가?

담당자: 신경질적인 반응이시군요. 그렇게 민감한 문제입니까?
대상자: 민감이고 지랄이고... '아버지'라 불러야 할 그 남자에게 대해선 네놈들도 이미 알고 있을텐데.

담당자: 네, 호적상 전대 폭력탐정 '무자비'의 존재는 확인했습니다. '다은영'과 결혼하여 슬하에 당신을 포함한 두 명의 자식을 두었더군요.
대상자: 그럼 그걸로 끝이다.

담당자: 아뇨. 끝이 아닙니다. 심문회의 자체적인 조사 결과, 무자비의 배우자인 다은영은 본래 간호원 출신으로, 어느 폭행사건에서 심한 부상을 입은 무자비 탐정의 여동생을 간호하다 그와 눈이 맞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하는 것과 동시에 무정희씨 당신의 출생신고서가 접수되었습니다.
대상자: ...그래서?

담당자: 당신은 임산부가 임신기간 내내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간호한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대상자: (무응답)

담당자: 무자비의 여동생 무자희씨가 폭행사건에 휘말린 것은 당신의 출생신고서가 접수되기 딱 열 달 정도 전의 일이더군요. 그리고 그녀는  당신이 태어날 무렵 사망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사망진단서를 발급한 병원이 몇 년 전 화재로 전소되는 바람에 자세한 사인은 알 수 없었지만...
대상자: 그런 오래된 이야기를 이제와서 들먹이는 이유가 뭐지?

담당자: 당신의 출생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서 입니다.
대상자: 그걸 왜 네놈들이 밝힌다고 지랄이야!!

(대상자가 폭력적인 난동을 부릴 기미가 보여 감독관에 의해 심문이 30분간 중단되고 심문담당자가 변경되었다.)

2차 심문담당자 : 박하민 (심문위원회 소속)

담당자: 저는 무정희씨께서 최근에 벌이신 "난동"사건의 심문을 맡고 있습니다. 모쪼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대상자: 가지가지 하는군...

담당자: 이번년도 X월 X일을 기점으로 약 반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각 시설 상부와 사건 담당 부서를 대상으로 무정희씨에 의한 "난동" 신고가 접수되었습니다. 당시 사건을 담당한 조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무정희씨의 범행 동기는... "진실을 위해서." 로군요.
대상자: 은근슬쩍 범행이라고 하지마라. 머리뼈를 부숴버리기 전에.

담당자: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무정희씨는 대체 어떤 '진실'을 찾고 있으셨던 건가요?
대상자: 탐정회 상부와 트리거의 관련성 여부다.

(이하의 내용은 삭제할 것. -박중헌)
 
담당자: 트리거..인가요. 근거는 있으신가요?
대상자: '불가시의 명탐정' 계승식에 '조력자'로서 참가한 트리거가 있었다. 그 자체가 탐정회와 트리거의 관련성을 증명한다.

담당자: ...'계승식'이라, 엄청난 일을 술술 말해버리시는군요.
대상자: 모르는 체 하지마라. 심문회주제에.

담당자: 다음부턴 조심해주십시오. 불가시의 명탐정에 대한건 탐정회는 물론이요 심문회 내부에서도 탑 시크릿이니까요.
대상자: 한심하군.

(이상의 내용은 삭제할 것. -박중헌)

담당자: 믿기 어렵군요. 그 "난동"에서 결국 무정희씨는 그 어떤 단서도 찾아내지 못하셨습니다. 그저 의혹만을 내세우셨을 뿐이지요. 
대상자: (무응답) 

담당자: 그런 막무가내식 폭력은, 역시 아버지인 무자비 탐정님을 닮았다고 해야하는 걸까요? ...아니, 실례했습니다. 무정희씨는 현재 탐정회의 신뢰를 받고 계신 분이니, 설령 칭호가 같다해도 존재 자체로 논쟁이 만연했던 그런 남자와 비교하는 것은 실례겠지요.
대상자: ...뭘 말하고 싶은거지?

담당자: 말 그대로 무자비 탐정님과 무정희씨는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나저나, 요즘 들어 탐정회에 떠도는 소문은 알고 계시나요? 
대상자: 소문에는 관심없다.

담당자: 트리거의 스파이가 탐정회에 숨어있다는 소문입니다만.
대상자: 그게 뭐 어쨌다는거지?

담당자: 사실 그건 소문이 아닙니다. 트리거가 탐정회의 내부분열을 시도하고 있다는 의심은 늘 존재해왔으니까요. 최근에는 트리거 쪽에서 정중하게도 서신을 보내오기까지 했습니다. 

(대상자는 담당자가 보여주는 자료를 응시했다. "내 자식을 당신들의 피붙이처럼 키워줘서 고맙다. 이제 그 보답을 하겠다. 트리거로부터" 라고 적힌 편지다. 한글 파일로 출력되어 필적은 알 수 없다. 겉면에 우표와 우체국 소인이 있다.)

대상자: 이걸 믿는건가?
담당자: 본 사건과는 별도로 트리거를 뒤쫓던 탐정의 사망 현장에서 피해자와 함께 발견된 물건입니다. 최초발견자는 탐정의 조수였으며, 증언 및 주변 상황을 종합하였을 때 그 편지의 진위 여부는 명백합니다.

담당자: 이는 이 날 이 순간까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탐정으로 활동해오며 나름의 신뢰를 쌓아온 그들의 스파이가 탐정회 내부에 있다는 선전포고입니다. 탐정회는 곧장 엄격한 내부 감사에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용의자를 선출해냈죠.
대상자: 그게 나다? 망상에 가까운 헛소리로군. 탐정들 중에 출신이 불분명한 녀석들은 얼마든지 있을텐데? 신분 위장까지 염두에 두면 그 가짓수는 몇 배로 불어난다. 확실한 근거가 없는 이상 네놈이 하는 말은 추리도 뭣도 아냐.

담당자: 역으로 뒷받침 되는 근거가 존재한다면 아무 문제도 없죠. 지금부터 심문위원회의 권한으로 당신에게서 DNA 샘플을 채취하겠습니다. 
대상자: (무응답)

담당자: 제출 요청에 대한 불응은 의혹을 증가시킬 뿐입니다. 아니면, 제출해선 안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대상자: ...무자비 탐정과 무정희는 다른 사람이다... 이런 의미였나?

담당자: 그 질문에 답변할 의무는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죠. DNA 샘플 채취에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대상자는 꽤 오랜 시간 침묵한 뒤 샘플 채취에 협조했다.)

(기록종료)

=

며칠이 지난 뒤. 탐정회 메인 홈페이지 뉴스 항목.

[탐정회 부속 DNA 연구센터에서 폭발사건 발생]

[X월 X일 탐정회 부속 DNA 연구센터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범인은 트리거의 일원으로 추정되며, 그는 연구원의 아이디 카드를 위장하여 몰래 숨어들어온 뒤 모 연구실에 침입하여 몸에 두르고있던 몇 kg 상당의 폭탄을 폭발시켰다. 이 폭발로 인해 3명이 사망하고 2명이 큰 부상을 입었으며, DNA의 비교분석 시스템 및 결과가 상당 부분 파손되는 큰 피해가 발생했다...]

[심문위원회 소속 심문관 시신 잇따라 발견]

[지난 X월 X일 귀가중이던 정민후 심문담당관이 행방이 묘연해진 뒤 인근 호수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데에 이어 같은 심문위원회 소속 박하민 심문담당관이 귀가길에 피습당한 채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심문위원회 측에서는 두 사람의 잇단 죽음을 애도하며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탐정회 측과 적극 협조할 뜻을 밝혔다...]
 
=

"들었어?" 

"소문이 파다하지." 

"일반인 연쇄 살인에 이어 심문관 연속 사망이라. 뒤숭숭하구만."

"옆구리를 칼로 깊게 찔려 출혈사 했다더군." 

"최근 DNA 부서에서 중요하게 다루던 자료가 뭔지 알아?" 

"정민후는 술에 취해 있었다면서?" 

"트리거에서 보낸 편지봉투. 우표를 침으로 붙였다던데."

"그놈은 평소에 술을 독처럼 여기던 놈이잖아." 

"대담한건지 미친건지."

"탐정회에 숨어둔 트리거의 스파이를 찾아내는게 임무였으니까."

"부상자가 말하길, 박하민 심문관이 그 전날 급하게 찾아와서 자료를 뽑아갔다고..."

"심문위원회가 확보했던 DNA 샘플은 총 몇 명이지?"

"트리거의 스파이 관련 심문담당자들만 골라 죽였군." 

"심문위원회에 불려간 탐정 중에 요즘 유난히 날뛰는 탐정이 있었지 않아?"

"X일 시점에서 세 명입니다."

"담당기록관도 실종이라고? 나중에 시신이 하나 더 늘겠군."

"아아, 그 폭력탐정?"

"DNA 분석 자료는 정말로 다 날아간건가?" 

"박중헌 감독관이 먼저 탐정회에게 협조 요청했다는거 진짜야?"

"그래, 아깝게 됐지."

"불가시의 명탐정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친아버지라는거 몰랐어?"

"무슨 소리야? 그런 탐정이 불가시의 명탐정일 리가 없잖아?"

"박하민의 소지품에서 DNA 결과 복사본만이 사라졌습니다."

"사건 해결은 제법 하는 것 같지만 말이지..."

"역시 트리거가 직접 스파이의 정체를 숨기려고 하는건가."

"그러고 보니 그거 알아?"

"어떤 거?"

"폭력탐정 심문 보고서."

"그것만 데이터가 파괴되서 열람불가야."

"..."

"......"

=

의혹은 단지 잿빛 구름처럼, 백색 안개처럼 피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