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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탐정의 속삭임(2014)

[무정지오]비오는 날의 두 사람

저녁은 어두웠고 빗소리는 귓가에 흥건했다. 무정은 허름한 콘크리트 건물 입구에 선 채 탁한 담배 연기를 뱉었다. 우산 따위는 챙겨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가 방금 깨부수고 나온 남자들의 아지트로 돌아가 우산을 찾아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바람을 타고 날아든 빗방울이 그녀의 뺨과, 손등과, 아직 발갛게 타오르고있던 담뱃불을 적신다. 재와 섞인 빗방울이 바닥에 검은 점으로 남았다. 무정은 식어버린 담배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꺾어 내던졌다. 빗물에 젖은 담배는 금새 흐물흐물해질 것이다. 

우산은 없지만 모자는 있었다. 다만 빗줄기가 조금 굵은 것이 거슬렸다. 무정은 버릇처럼 새 담배를 입에 문 채, 착용하고있던 안경을 벗어 빗물이 안경에 닿지 않도록 제 품에 갈무리했다. 안경에 연결된 붉은 사슬이 마치 목걸이처럼 늘어졌다. 마지막으로 언제 빗물이 닿아 명이 다할 지 모를 담배에 불을 붙이고, 무정은 허름한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골목골목에는 폐자재와 부서진 나무와 쌓인 종이상자가 빗물에 젖어가고 있었다. 큰길로 이어지려면 이런 길을 앞으로 몇 번은 더 돌아나가야 했다. 마치 미로같은 골목길을 덤덤히 걸어나가는 무정의 발 밑에서 고인 빗물이 철벅거린다. 쉼없이 내리는 빗줄기와 젖은 장애물 덕분에 신발과 바지는 이미 흠뻑 젖어버린 지 오래였다. 길을 가로막듯이 놓인 철골을 밟고 넘어서, 자신이 들어오면서 부숴버린 나무상자의 파편을 짓밟으며 걸어가자 어느새 콘크리트가 발린 길 대신 가로등 놓인 아스팔트가 그녀를 맞이했다. 빗물은 이제 검은 길 위에서 오렌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우산을 쓰고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 중 몇몇이 붉은 모자를 쓴 채 비를 흠뻑 맞고 있는 그녀를 흘끔거렸다. 몇몇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쓸데없긴. 무정은 혼자 중얼거리곤 용케 살아남은 담배를 빨아들였다.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그저 걷고 걷고 걸으면서 빗물에 젖어가는 몸으로 자신의 사무실로 향할 뿐. 그 등에,

"무정씨."

...걸음이 멈춘다. 자신을 '저런 식으로' 부르는 인간은 한 명 뿐이다. 멈춰선 무정이 뒤를 돌아볼 사이도 없이 커다란 우산이 그녀의 머리 위에 멈춰섰다. 한 박자 늦게, 뺨에 맺혀있던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감기 걸려요."
"안 걸려."

우산의 주인이 누군지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무정은 습기를 머금어 묵어버린 담배의 필터를 꽉 깨물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우산의 주인도 덩달아 비에 젖은 발자국 소리를 내며 그녀를 쫓아왔다. 뺨에 빗줄기가 잠깐 닿았다가, 다시 물러난다. 

"...장기공연이 있는거 아니었나. 이지오."
"기억하고 있었어요?"

남자가 멋대로 달력에 표시하고 간 덕분이다. 
무정은 일부러 속사정을 설명하진 않았다.

"실은 무정씨가 보고 싶어져서 중간에 그만뒀어요."
"직업의식이 없군."

내뿜은 담배연기가 잠시 고였다가 뒤로 흘러갔다. 웃음소리가 그녀의 뒷덜미에 닿았다. 

"농담이에요. 실은 단원들이랑 극단주 사이에 트러블이 생기는 바람에 공연이 예정보다 일찍 끝나버렸어요. ...무정씨도 한 번 보러 오셨으면 좋았을텐데."
"흥미 없다."

그녀의 사무실에는 한 번씩 그가 놓고 간 연극표들이 놓였다. 물론 그녀가 그걸 들고 극장을 찾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방이 어두운 극장에 앉아 무대 위에 선 배우들이 자아내는 이야기를 본다는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설령 거기에 이지오가 서있다 한들, 그녀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건널목의 신호등은 붉은 빛이었다. 무정은 거의 다 타들어간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 구겨넣고 주머니메 집어넣었다. 이어 물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새 담배를 빼어물자, 이지오가 불만 섞인 목소리를 냈다.

"담배 너무 많이 피우면 안 좋아요."
"안다."
"알면서 왜..."

.....하고, 이어지려던 이지오의 말이 멈춘다. 투덜거림을 속으로 삭이는 것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뭔가를 발견한건지, 아니면 생각해낸건지. 그제사 처음으로 그를 돌아본 무정은 자신을 똟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이지오의 모습을 보았다. ...무언가, 진귀한 것이라도 본 얼굴이다.

"뭐냐."
"........무정씨가 안경 안 쓴 얼굴 처음 봐요."

아.

차들이 젖은 아스팔트 길을 달리는 소리가 평소보다 요란하다. 무정은 이지오를 응시하다 자신의 얼굴을, 정확히는 콧등과 왼쪽 눈, 뺨 사이를 더듬었다.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젖은 손바닥이 뺨에서 떨어지려는 순간, 이지오의 손가락이 자연스레 그녀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쓰지 않아도 보이는건가요?"
"...그래."
"그런데도 쓰고 다닌다는 건,뭔가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 건가요?"
"알 것 없다."

무정은 가차없이 안경을 도로 써버렸다. 이지오가 아쉬운 소리를 내더니 우산을 추슬렀다. 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고여있던 빗물이 요란하게 쏟아져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