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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단간론파 리턴즈(2015)

END. 미련에는 작별을 추억에는 영원을

노을이 진 거리는 눈에 익숙했다. 그런데도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장소에 떨어진 것 마냥 주위를 둘러보던 소년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를 틀어 올린 차분한 분위기의 여성이 소년의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구나."

입은 떨어지지 않는다. 소년은 그녀를 올려다보며 손을 몇 번 쥐엄거렸다. 손바닥이 까끌까끌한 것은 모래 장난이라도 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 무언가 불꽃놀이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이상하게도 기억은 희미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들어올 거라면 손부터 털어내거라."
"……."
"아니면, 그대로 돌아갈테냐?"

멀리서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리기에 소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주위에 인적은 느껴지지 않는다. 전봇대와 전선이 어지러이 늘어져 있는 연주홍빛 하늘에 펼쳐진 구름은 저녁의 푸름을 머금고 흐트러져 있었다. 

"허나 돌아간다 한들 되돌릴 수는 없을 거다."

그 순간 가슴과 온몸 곳곳을 파고들던 날카로운 감각이 되살아나, 소년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저 앉았다. 끔찍스러운 고통과 절망은 덤이었다. 소년이 맨땅을 긁어대고 고통스러운 숨을 토하며 쿨럭이는 동안, 여인은 제 품에서 짧은 곰방대를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세이, 미련은 일찌감치 털어버리거라. 그 편이 좋아."

소년은 천천히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먼 옛날 헤어졌던 모습 이후로 거의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온 흐릿한 연기는 노을 사이로 사라졌다. 소년은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으며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저는. 약속을 했어요. 잊지 않겠다고… 모두, 쭉 나의 친구들이라고…."

사실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 쭉 남아, 얼터 에고라는 형태로 남은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남아있기에는 나누었던 약속과 짊어진 기억이 너무 많았다. 그걸 모조리 잊어버린 채 안에 남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어리광이었다. 그렇기에 소년은 나가는 것을 택했다. 슬픔과 상실에 어깨를 짓눌리게 되더라도 그들의 죽음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그러냐. 하지만 죽은 이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기껏해야 이승의 일을 추억하거나, 굽어볼 수 있을 뿐이지. 여인은 덤덤히 덧붙이고는 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혔다. 틀어올린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내 소년의 머리에 매달린 장식을 건드려보던 여인은 그 차분한 얼굴에 처음으로 씁쓸한 웃음을 떠올렸다.

"하여간 나와 그 인간의 어디에서 이런 아들이 나온 건지. 네 여동생처럼 깨끗하게 잊어버렸더라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

아.

그러고보면 메이가 있었다. 지난 5년 간 얼굴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이제는 생사조차 알지 못하게 된 여동생. 소년의 얼굴에서 대강 그의 생각을 짐작해낸 모양인지, 여인은 쓴웃음을 지우고 다시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메이 걱정이라면 할 필요 없다. 그 아이는 잘 살아있어. 그리고 너와는 달리 훨씬 늦게 돌아올 게야."

여인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몸을 짓이기는 듯 하던 고통은 잠잠해져 있었다. 소년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린 아이처럼 자그마하던 몸은 어느새 죽기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변한 뒤였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 테냐.

여인은 현관에 들어선 채 뒤를 돌아보았다. 소년은 노을에서 저녁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오랫동안 응시하다 천천히 손을 털었다. 손끝에서 부스스 떨어진 가루가 바람을 타고 잠시 반짝이다 사라져갔다. 세이는 그 찰나의 흔적을 오랫동안 응시하다 아주 잠깐 울었다.

가슴에 고인 추억은 별빛처럼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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