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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단간론파 리턴즈(2015)

03. 밤에 내리는 비 너머에

[스파이를 찾아내 죽이던가, 스파이가 누군가를 죽이던가.]
[그 전에 너희들은 여기서 못 나가!]

절망적인 조건과 함께 4층을 봉쇄한 철장은 아무리 흔들어도 꼼짝달싹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또 누군가가 줄어야 풀어주겠다는건가. 이미 당연해질대로 당연해진 명제는 무거운 족쇄가 되어 매걸음마다 요사메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스파이에 대한 단서는 없었다. 이대로라면 전부 굶어죽던가, 혹은 스파이가 이 중의 누군가를 골라 살해하는 흐름이 될 게 분명했다. 설령 스파이를 운좋게 찾아낸다 한들 -혹은 스파이가 자신의 정체를 자백한다하더라도- 아이들이 공동의 살인범이 되지 않는 이상 마찬가지로 철장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어딜 보나 모노쿠마가 의도한 흐름이었다. 곳곳에서 빛나는 카메라를 볼 때마다 심장이 차가운 벌레에게 파먹히는 기분은, 식사를 하지 못해 배를 곯는 것보다 더욱 크게 그를 압박해왔다.

그리고 헤이즈의 시신이 발견되었던 그날 새벽.
요사메는 피투성이의 마츠모토 쥰을 목격했다.

그날 이후로는 제대로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불가능했다. 입에 넣고 무언가를 씹으려 하면 피가 사방에 튀어있던 음악실 바닥과 난도질된 헤이즈의 시신이 떠올랐고 자려고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 어슴푸레하게 보이던 피투성이 쥰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수면을 취하기 위해 약을 먹으면 도리어 심장이 미칠듯이 뛰어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고 간신히 잠들었다 싶으면 피투성이 악몽을 꾸는 나날이었다. 재판장에 들어서는 그 순간에 이르러서는 차라리 산 채로 날카로운 칼날을 삼키는 것이 더 편하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재판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제대로 입술을 뗄 수 없었다. 누가 무엇을 말하는 것 같기는 한데 귀에 물이라도 들어찬 것처럼 소리가 울려 집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아교라도 붙인 것처럼 좀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깨물며 쥰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네가) (피투성이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어.)

머릿 속에 떠돌던 생각들은 잘게 잘게 잘려 모자이크처럼 머릿 속을 뒤덮었다. 힘겹게 재판장의 흐름을 쫓아가며, 어쩌면 쥰이 무언가의 함정에 빠졌던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과 쵸고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터져나온 것은 동시였다.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은 요사메가 어떻게 막을 틈도 없이 흘러갔다. 쥰이 죽고, 쵸고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모노쿠마가 아무렇게나 돌린 룰렛같은 처형에 테디 베어가 걸려들어서.

정신이 들고보니 세 명의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요사메는 당장 칼을 삼켜버리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여태껏 많은 이들이 죽었고 수많은 약속이 깨졌다. 슬픔이라는 감정 아래 소중한 것을 상실한 아픔을 가만히 묻어두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식당은 이미 잠겨있어 들어갈 수 없었고 요사메는 칼로 제 목을 찢어버리는 대신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눈물을 터뜨렸다. 저택에서 수많은 괄시를 받았을 때에도, 여동생에게서 욕설을 들으며 끝끝내 저택을 나왔을 때도, 작은 골방에 내던져지다시피 한 채 필사적으로 샤미센 연주법을 배웠을 때에도 울지는 않았었는데.

그래도 지금은 울어야 했다. 사라져간 이들과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린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며 앞이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을 똑바로 걸어가기 위해서라도.
 
...밤의 비 너머에는 언젠가 아침이 올 것이다. 
소년은 그때까지 조금만 더 슬퍼하기로 마음먹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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