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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세포신곡

#매일매일_800자_챌린지(2)

※2023.05.13~2023.05.22사이에 세포신곡 CoE 기준 주변인물들을 소재로 한 800자 연성입니다.

!!세포신곡 본편델씨은자막간 스포일러 주의!!


 

01.

 

시나노 에이지는 퍼뜩 눈을 뜬다. 머리가 살짝 띵했다. 어디에 부딪쳤었나? 아니, 그보다는 오랜 시간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 같다. 기립성 저혈압을 닮은 현기증이 머리를 잠시 휘저었다가 썰물처럼 밀려나갔다. 

 

일단 자신의 상황을 점검해본다. 분명 집을 찾아온 낯선 이들을 맞이한 것은 기억난다. 그 다음에 떠오르는 것은 누군가의 비명소리와 울리는 총성, 그리고 다리쯤에서 번져나오던 통증이었다. 거기서 또 기억이 끊어져, 이 작은 공간으로 이어진다. 중간에 주운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여기있던 비품인지는 몰라도 랜턴 하나가 빛을 발한다. 근처에는 응급처치 상자가 좁은 벽에 딱 알맞게 놓여있었다.

 

"……."

 

숨소리가 울린다. 랜턴은 자신보다 비스듬한 뒤쪽에 놓여있기에 맞은편 벽에 제 몸의 실루엣이 비쳐보였다. 그건 너무나 익숙해보이기도 하고,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괴물의 형태같아 보이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제 몸에서 비롯된 것이니 도망칠 수도 무시할 수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스친 건 왜였을까.

 

"아, 맞다. 상처."

 

별다른 통증도 없는 다리를 살펴본다. 랜턴의 하얀 빛을 받은 상처는 빠끔히 구멍이 뚤려있지만 출혈은 없고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 예전에 직장 선배에게서 "상처가 아프지 않다면 그건 정말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들은 기억이 나지만, 이상하게도 위기의식은 느껴지지 않았다. 상처가 별것 아니라서일까?

 

숨소리가 얕게 울린다. 아마도 공간이 좁은 탓이다. 시나노 에이지는 그 좁은 공간에 앉아 가만히 어둠 너머를 응시한다. 그 너머에서 뭔가가 오기라도 할 것처럼, 그 방문자가 반드시 자신을 알아보기라도 할 것처럼.

 

잠시 후 누군가가 가쁜 숨소리를 내며 도망쳐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시나노와 시나노의 세포들이 찾던 그 사람이었다.

 

 

02.

 

쿠마자키 카렌은 어느 넓은 방 안에 숨어있었다. 왜 하필 그곳인가, 한다면 뚜렷한 이유를 댈 수는 없었다. 다만 근방에서 자신을 찾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지고, 멀리서지만 확실하게 포치의 기운도 일렁이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도망쳤다. 그러다 몸을 숨기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아내어, 이렇게 몸을 숨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화장실에 비치된 도구함 속에 숨을까 했다. 하지만 막상 문을 열어보니 공간은 카렌이 들어가 있기에도 너무 좁았고 무엇보다 잠금장치가 고장나 있었다. 그래서 근방의 다른 공간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안에서 자물쇠를 잠그고, 아무도 없는 것 마냥 숨을 죽인다. 종종 누군가의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오곤 했으나 문을 닫은 채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으면 천천히 멀어져갔다. 아마 누가 안에서 문을 잠갔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언제까지고 한 군데에 숨어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제 곧 장소를 옮겨야 한다는 생각을 거듭하며, 카렌은 방 안을 둘러본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박스와 책이 쌓여있는 공간 한 쪽에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목발 하나가 놓여있었다. 혹시 누군가를 위한 응급도구인걸까. 하지만 카렌은 딱히 다리를 다치지 않았으므로 이 물건을 가져갈 필요는 없었다.

 

언제쯤 여기서 나가야할까. 어떻게 해야 아무에게도 잡히지 않고 무사히 도망다닐 수 있을까. 카렌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자신의 다음 행동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살아남고 싶었다. 살아남아야 했다. 아빠와도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죽지 않을거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목표가 마음 속에서 단단한 형태를 갖춘다.

느슨해지려는 입술을 꽉 붙들고, 카렌은 새로운 도주로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03.

 

긴장이 

풀렸던 것일까.

 

야나기 니나는 혼몽한 기운을 느끼다가 깨어난다. 창밖으로 나뭇잎 그림자가 보이고 들이마시는 숨결에는 책장 내음이 배어있는 공간이었다. 여기가 어디더라. 가만히 생각하는 사이 뺨에 차가운 것이 닿는다. 니나는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 살짝 미소를 머금은 쟈부치 요우가 서있었다.

 

"쟈부치 선배."

 

그렇다. 이때는 아직 고백을 하지 않았었다.

(이때는?)

 

"괜찮아? 너무 무리한 거 아냐?"

"아니에요. 지금건… 잠깐 다른 생각을 했을 뿐이라고요."

"무슨 생각?"

 

시원한 음료수를 내려놓은 쟈부치 요우가 맞은편에 앉는다. 그리고는 니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니나는 생각한다. 아아, 이 얼굴이다. 이 시선이다. 이렇게 올곧게 상대를 바라봐주고, 타인의 의견을 조용히 들어주는 이 모습을, 나는.

 

"야나기?"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랑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죄송해요."

"왜 사과하는거야?"

"…선배를, 혼자 둬버려서."

"나는 괜찮아.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어."

 

쟈부치가 웃는다. 야나기 니나는 가슴이 시리는 통증과 따스한 온열을 동시에 눌러참아야 했다. 아마도 이것은 자신이 꾸는 꿈이겠지. 이제는 지나가버린 먼 과거의 추억을 보고있을 뿐이겠지. 그런데도 하고싶은 말이 넘친다. 넘쳐나서 참을 수가 없다. 이제는 소용 없다는 걸 알아도. 닿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알더라도.

 

"요우."

"야, 야나기?"

"미안해. 나, 이번에는 당신을 외면하지 않을게."

 

쟈부치 요우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가, 천천히, 천천히… 씁쓸함을 머금은 것으로 변해간다. 눈썹 끝이 내려간다. 그럼에도 입가에 최후의 배려처럼 미소가 머무른 표정이 애처로웠다.

 

"바보구나, 니나."

 

거기서 깨어난다. 약간의 침울함과 함께 눈을 뜬 야나기 니나는 입술을 잠시 깨물고는, 베이지톤의 담화실 벽을 바라보며 천천히 마음을 다잡았다.

 

 

04.

 

"돌아가야겠군요."

"흐음."

 

통화를 끝내고 돌아온 우츠기가 그렇게 말했을 때에는 아직 오전중이다. 에노모토 노아는 시계를 한 번 흘끗 바라보고는 차를 마셨다. 지고천 연구소 도쿄 지부의 간부 대기실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고, 가구들은 모두 푹신하다. 한쪽 테이블에는 에노모토 노아에게 헌상하는 마카롱이 놓여있었는데 전부 한 입씩 베어물어져 있었다. 우츠기의 시선이 잠깐 그걸 훑는다.

 

"오리진 베타가 탈출했다고 합니다."

"실험실을 통째로 폐쇄하면 되는 일 아냐? 쟈부치도 은근 허둥대네."

"어쩔 수 없습니다. 그만한 일이니까요. 우리가 직접 정리해야죠."

 

대주교의 말은 부드럽지만 저항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에노모토 노아는 남은 마카롱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편히 앉아있던 덕에 풀려있던 머리카락을 다시 묶는다. 두 사람이 달리 핸드폰이나 소지품을 들고 다니는 것도 아니어서 준비는 그걸로 충분했다.

 

"도쿄지부 녀석들에게는 말했어?"

"네, 전달은 끝났습니다. 금방 차를 준비해줄 겁니다."

 

과연 도쿄 지부의 실행력은 빨라서 이전에도 몇 번 본 얼굴이 운전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근데 기차역에서 나고야 지부로 돌아오는 동안에는 누가 운전해? 노아의 단순한 질문에 우츠기가 대답했다. 제가 운전하죠. 지금 나고야 지부는 운전수를 보낼 여력이 안 될테니.

 

"엉망진창이겠네."

"엉망진창이겠죠."

 

그 이후로 두 사람은 나고야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도 나누지 않다가, 지고천 연구소의 정문으로 들어가기 직전에야 서로 다시 입을 열었다.

 

"있잖아, 우츠기."

"네."

"실패한 것 같지?"

"그런 것 같군요."

"피곤해지겠네."

"정말로요."

 

간부 인증을 받은 셔터문이 열린다. 두 사람은 태연한 얼굴로 피비린내 나는 공간 속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05.

 

"돌아오지 않는군."

 

쿠마자키 리쿠가 입을 열었을 때, 작은 쪽방에 있던 사람은 총 다섯 명이었다. 두 명은 리쿠 자신과 딸인 카렌이다. 나머지 셋(아이바 이부키, 야나기 니나, 쿠라치 테루키) 또한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서로의 안색을 살폈다. 이윽고 쿠라치가 먼저 헛기침을 한다. 리쿠는 이 자리의 주도권을 일단 그에게 넘겨두기로 했다.

 

"바깥의 소란스러움은 잦아든 것 같네. 그리고 아토 군과 이소이 군은 귀환하지 않고 있어. 그들이 예정했던 계획을 생각해보면, 무슨 일이 생겼다보는게 타당하겠군."

"…저희는, 어떡하면 좋을까요?"

 

먼저 구제책에 대가선 사람은 야나기 니나다. 카렌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이런저런 말을 걸어주고 배려해주느라 꽤 기력을 소모했을 텐데도 그 눈빛에는 아직 빛이 남아있었다. 그건 아마도 다른 사람들을 위한 믿음이 기반한 것이리라.

 

"일단,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아이바 이부키도 한 마디를 거든다. 그 말을 시작으로 네 명의 어른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공감의 기운이 감돌았을 때 카렌이 입을 열었다.

 

"저기, 지금이라면 나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포치도 어디론가 사라졌고."

 

카렌이 말한다면 신뢰할 수 있다. 하지만 나간다해도 당장 어디를 가야할지가 문제일터다. 쿠마자키 리쿠는 자신이 만들던 사제폭탄의 흔적들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저기. 만약에 PC와 관련된 시설이 있다면, 내가 좀 쓸 수 있을지도 몰라."

"자네가?"

"이래보여도 네트워크 경비 회사 직원이었거든."

 

할 수 있는 일은 해야지. 그렇게 덧붙이는 손이 조금 떨린다. 아마도 자신은 지금 지고천 연구소에 들어올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선택을 내리고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렇게 해야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카렌을, 소중한 딸을 지킬 수 없겠지.

 

"그렇다면 우선 PC가 있는 방을 하나씩 찾아보기로 하지."

"카렌, 걸을 수 있겠니?"

"응. 괜찮아요."

 

쪽방의 문이 열린다. 리쿠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밖으로 나섰다.

 

 

06.

 

긴 꿈을 꾸는 기분, 이라고 회상할 틈은 없었다.

 

어째서인지 연구동에서 베타가 빠져나왔다. 연구동에서 빠져나온 이들은 얼핏 보기에는 모두 일반인처럼 보였다. 그래서 방심한걸까? 아니, 방심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심적 여유도 없었다. 오리진 베타가 탈출하고, 실험체들이 탈주한 상황. 연구동은 통째로 폭발해서 없어졌으나 판단을 그르치면 본동까지 어떤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니까, 방심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주관적 판단이란 언제나 믿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에 쟈부치 요우는 물려죽은 무장원의 시체를 뒤로 한 채 혼자 중얼거린다. 선생님을 위해, 그 아이를 위해, 니나를 위해.

 

하지만 어쩌면, 그 모든 선택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걸 용납하고 싶지 않아서 쟈부치 요우는 계속해서 소리지르고 명령하고 공격하며 자신의 목소리에서 도망치고자 한다. 불태우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건 불가능했다. 제 그림자를 발에서 떼어놓겠노라 외치는 것이나 진배없었던 것이다.

 

…시선이, 느껴진다. 옛날에 느꼈던 흘끔거림이나 기분나쁜 힐책의 시선과는 다르다. 니나가 자신을 지켜봐주고 있다. 자신이 떠나는 마지막 모습을 끝까지 지켜봐주고 있다.

 

바보같은 여자, 정말로 바보같은 여자.

나같은건 버리고 가라, 시원하게 잊어버려.

 

하지만 니나는 그러지 않는다. 애초에 그럴 사람이 아니기에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한다. 그러나 많은 것들은 이미 어긋나버렸다. 정말이지 돌이킬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라고, 쟈부치 요우는 멀어져가는 의식으로 생각한다.

 

언젠가 니나가 고백했던 때를 회상한다.

그때 자신은, 뭐라고 답했던가.

 

"…고맙다.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나도 너와 같은 마음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앞으로 함께 해도 될까.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보란듯이 내쪽에서 어기게 된 셈인가. 눈시울이 조금 뜨겁다. 실제로 불타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내면의 감각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부디 살아줘, 니나.

 

그 생각이 마지막으로 타올랐다가, 이윽고 사그라들었다.

 

 

07.

 

아이바 이부키는 한 번 토했다.

 

아토 하루키가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죽은 자들의 근본에서 핏줄기와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서, 제 속에서 꿀렁이는 구역질을 참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원인에 공포나 혐오는 섞여있지 않다.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두려움, 그리고 죄책감 정도일까.

 

아이바 이부키는 자신이 "운이 좋았"음을 이해하고 있다. 운좋게 숙부가 깊이 얽히지 않았다. 운좋게 연구동까지 안내되지 않았다. 운좋게 장서실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운좋게 이소이 레이지에게 발각되었다. 운좋게 쪽방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운좋게.

 

운좋게,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사람이 죽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통쾌하지도 숭고하지도 않다. 그 정도야 알고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보고 체험하는 것은 다가오는 충격의 정도가 다르다. 지금 시점에서 아이바가 가슴을 필 수 있는 자신의 행동은 있는 힘을 다해 아토 하루키의 정신을 지지해주었다는 것. 그리고 연이은 두 번의 살인장면에서 쿠마자키 카렌의 눈을 가려주었다는 것 뿐이다. (소리는 쿠마자키 리쿠가 차단했다)

 

한바탕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고 돌아온 아이바는 아토 하루키를 떠올린다. 그가 해낸 수많은 일들과, 어쩔 수 없이 할 수 밖에 없었던 일들에 대해서 곱씹는다. 그가 지금 어떤 심정일지는, 자신이 감히 짐작할 수도 없겠지.

 

그렇다면, 하다못해 그의 마음을 지탱할 수 있는 든든한 지지대로 존재하자. 아토 하루키의 행동을 믿고 변함없는 응원을 건네자. 만약 필요하다면, 주술을 걸어주는 것도 잊지 말고.

 

마지막 생각에 희미한 웃음이 걸린다. 이제 슬슬 본동으로 돌아가 하루키와 합류하자는 리쿠의 말을 들으며, 아이바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하루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나 생각한다.

 

이동하던 중에 깨진 생화 화분이 보인 것은 역시 자신의 운좋음 덕분이었을까. 아이바는 조용히 잎사귀 하나를 주워 주머니에 밀어넣고 일행의 뒤를 따랐다.

 

 

08.

 

카노 아오구는 자신의 선택을 의심하지 않는다.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후회하지 않는 것.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한 확신이 있다는 것. 따라서 그는 자신의 행동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계속해서 후회하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왜 굳이 이해해줘야 하는가? 그런 이들이란 대채 실험실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꿈틀거리는 고깃덩이가 되어버리게 마련인데!

 

하지만 하나는 다르다. 아소 코지라는 이름의, 온갖 거짓을 휘감고 다니는 그 자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얻을 수 있는 것을 얻고,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으려 발버둥치지 않았다. 때로는 모든 것을 알아차린 주제에 알아차리지 못한 척을 하기도 했다. 이런 영악한 자식. 카노 아오구가 그렇게 말하는 건 나름의 칭찬이다.

 

따라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시 만난 아토 하루키에게 제 계획을 밀어붙이는 것은 필연이다. 카노 아오구에게 아소 코지는 약간 머리가 좋을 뿐인 가짜 교사고, 아소 코지에게도 카노 아오구는 수상쩍을 뿐인 연구원이니까.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을 리가 없다. 예상대로 흘러갈 것이다. 낙관적이고 절대적인 청사진이 아소 코지의 돌발행동 하나에 갈기갈기 찢어졌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반응은 예상치 못했다. 애초에 카노 아오구 자신이 대상을 인간 이하로 보는데 한껏 예의를 갖춰 감사 인사를 전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아소 코지는 그렇게 했다. 그렇게 한 걸로도 모자라 자신이 세운 모든 계획을 수포로 만들었다. 이 빌어먹을 놈. 빌어먹을 자식.

 

어떻게 이런 살해방법이.

 

피가 용솟음치며 상처로 스며나온다. 의식은 이상할 정도로 안락하게 멀어져갔다. 그 모습을 아소 코지가 조용히 눈에 담는다. 분명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로 치욕스런 상황일텐데 희미한 웃음이 나왔다.

 

그래, 어디 잘해봐라.

잘해서 끝까지 살아남아, 아소 짱.

 

마지막 말은 굳이 전해질 필요가 없었다.

이미 남아있기 때문이다.

 

 

09.

 

무기가 필요하다.

 

거대한 고깃덩어리같은 형체를 완전히 으스러뜨리고 난 뒤에 떠오른건 바로 그 생각이었다. 물론 무기를 찾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 사이에 아토 하루키와 남은 일행들이 어떻게 될지도 미지수였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지고생명체에 대항하기 위한 전용탄환이다. 여차할 때에는 목숨을 벌어줄 최대의 손패가 되어주겠지.

 

다행히도 아토 하루키에게서 구 연구동의 지도를 잠시 구경했던 덕에 물건이 있을 법한 장소를 찾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근처의 나무 박스를 하나 걷어차자 탄환이 떨어진 건 그야말로 우연이자 행운이었으나 그 다음 행운은 조금 오래 걸렸다. 정작 탄환을 날릴 총기류가 꽤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만은 레이지의 괴력만으로도 어쩔 도리가 없다.

 

결국 총과 탄환을 모두 확보할 무렵에는 돌아온 길을 되짚어가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게 되어버렸다. 만약 레이지가 지고세포를 이어받지 않았다면 전력으로 돌아가다 탈진했을 지도 몰랐다.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 거지같은 지고천 연구소도 하나 쯤은 장점이 있었군. 자신이 아까 뭉개버린 고깃덩이를 스쳐지나가는 동안 레이지는 많은 것을 생각한다. 대부분은 아버지와, 스승님과, 츠바이크 씨와, 세오도아에 대한 것이고.

 

그 사이에 제 의형에 대한 아주 작은 희망같은 것이 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이 희망에 안주할 수 없다. 이소이 레이지는 멀리서 느껴지는 에노모토의 흉악한 기척을 감지하며 재빨리 연구소 2층으로 몸을 날렸다. 에노모토 노아가 서있는 자리를 직선으로 노리는 난간 자리. 거기서 미리 탄환을 장전한 총을 겨눈다. 과녁 사이로 에노모토의 머리통이 들어왔다.

 

"Ciao!"

 

튀어나온 목소리는, 어떤 기도를 대신하는 것이다.

 

 

10.

 

"불안해?"

 

세오도아가 묻는다. 이소이 사네미츠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보았다가 긴 한숨을 뱉었다. 걱정되지 않을리가 없잖아. 일부러 소리를 내어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그 행동 만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동작이었다. 시간은 이미 4월 8일을 넘어가버린 4월 9일 오전 8시 30분. 지고천 연구소 도쿄 지부에 잠입한 애니에게서는 원인불명의 지부 폭파의 보고가 들어와있다. 그렇다면 레이지는 무사할까, 어디 심한 상처를 입은 건 아닐까. 머리는 멋대로 시나리오를 증폭시키며 폭주하고 작가인 사네미츠는 어느 하나도 부정하지 못해 가벼운 착란을 맛본다.

 

"너무 염려하지 마, 레이지는 분명 무사할거야."

 

세오도아의 얼굴은 온화하고 사네미츠는 그 얼굴에서 약간의 희망과 아주 많은 불안을 맛본다. 네가 정말 모든 걸 알고 있는거야? 너에게 모든 것을 걸어도 되는거야? 그런 얼굴을 세오도아가 알아보지 못할 리도 없다. 움츠러든 어깨에 검은 장갑이 닿았다.

 

"그리고 하루키도."

 

어떤 이에게 켜켜이 쌓인 세월은 너무 촘촘하고 세밀해서 그와 비슷한 일을 겪은 누군가가 아니면 차마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하기도 하다. 사네미츠와 세오도아는 누구보다 제일가는 이해자의 사이는 아니었으나 둘 사이에는 모종의 이해관계가 존재했고….

 

그 순간 사네미츠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온다. 마치 튀어나가듯이 전화를 받은 사네미츠의 표정이 얼어붙었다가, 천천히 녹아내리며 울음과 미소가 섞인 덩어리가 된다. 세오도아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더 이상 긴 얘기를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천천히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오늘은 비가 내리지 않는다.

아마도 어떤 아이가 죽지 않은 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