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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크로스 오버

[FGOX공의 경계]라푼젤, 땅 위에서 무엇을 하는가

-페그오 공경 콜라보 이벤트 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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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리지 않는군."

바로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소년이 고개를 돌리면, 그곳에는 방금 전 망령을 해치운 단검을 솜씨 좋게 품으로 되돌리는 료우기 시키가 있었다. 아무렇게나 자른 듯한 짧은 단발 머리에, 푸른 기모노와 붉은 가죽 자켓이라는 다소 기묘한 옷차림.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구름 사이로 은은하게 내려오는 달빛에 비춰진 그 모습에는 바라보는 이가 스스로 숨을 죽이게 만드는 서늘한 기품이 서려있었다. 후천적인 교육을 통해 몸에 익힌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러한 분위기에서 태어났기에 당연하다는 듯 몸에 스며들어있는 아름다움. 처음 만났을 때는 마구잡이로 맞붙느라, 그리고 이후로도 싸움을 이어나가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실이지만 이 소녀는 의외로 양갓집 출신인지도 모른다. 잠깐의 달빛에 홀려 그런 것을 생각하는 사이 자신이 최초로 들었던 목소리를 잊어버린 소년이었으나, 시키는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는 시선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둔한 위인이 아니었다.

"뭐야, 뭘 그리 뚫어져라 보고 있어?"
"아, 그게… 방금 전에, 뭐라고 말한 것 같아서."
"방금? ─아아, 들은건가."

날카로운 칼에 베인 상처에서 한 박자 늦게 붉은 피가 배어나오듯, 소년의 기억도 시키의 말을 신호 삼아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 무언가가 서로 화합하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그녀는 이미 이 맨션에서 맨션령과 스켈레톤, 구울과 서번트가 뒤섞여 나오는 장면을 목격하고, 또 처리해왔다. 그렇다면 이 장소를 표현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보다 엉망진창이라는 표현이 훨씬 알맞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시키는 구태여 어울리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생각하고 말한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던 말이 톡 튀어오른 것처럼 속삭였다. 어째서일까. 소년의 의문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곤, 시키는 눈 앞에 있는 주차장을 가리켰다. 

"저기에 있던 망령 중에, 특히 머리가 길고 새하얗고, 하여간 눈에 띄는 녀석이 있었지."

덧없이 흔들리며, 시키의 칼 끝에 먼지처럼 흩어져간 어느 여인의 망령.
사라지는 찰나에 보인 표정은 어쩐지 안도한 것 같기도 하고,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녀석은 일전에 한 번 상대한 적이 있어. 여기같은 주차장이 아니라, 꽤나 높은 건물의 옥상에서."

뼈라고 해야하나, 백합을 닮은 여자였는데.
날자, 날 수 있다, 날고 있다─ 아니, 차라리 떨어져라. 그런 말을 계속 속삭여서 말이지.
시끄러워서 허공에 머무는 몸을 잡아 찔렀더니 심해로 가라앉아가는 꽃잎처럼 흩어졌어.

"말하자면, 녀석은 그런 속성이었다는 거다."

부유.
비행.
부감.
도피.
동경.
암시.
유혹.
옥상.
하늘.

─추락.

"말 그대로 발이 땅에 붙어있지 않았던 녀석이야. 그런데 옥상도, 맨션 내부도 아닌 주차장에 있어. 당연히 안 어울리지 않아?"

소년은 고개를 든다. 구름 낀 밤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있는 맨션의 옥상 언저리에 방금 자신들이 보았던 긴 머리의 망령을 살짝 덧그려보자. 흐릿한 달빛을 받은 그녀의 윤곽이 부드러운 베일처럼 빛나는 듯 했다. 그 모습을 좀 더 세밀하게 상상할수록 의식이 물 속에서 피어오른 기포처럼 천천히 위로 상승한다. 망령은 달빛 아래서 가만히, 가만히 옷자락을 펄럭이고─.

"어이, 마스터. 정신차려."
"아… 미안. 잠깐 넋 놓고 있었어."

시키는 꽤 악력이 있는 모양인지 붙들린 어깨가 아프다. 소년은 어깨를 주무르며 자신이 서있는 주차장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방금 전까지 바라보았던 옥상과 달리 달빛은 거의 닿지 않는다. 허공의 우아함도 없다. 묵직한 아스팔트가 깔린 땅에는 구획 구분을 위한 푸른 관목이 자라고 있을 뿐이다. 방금 전까지의 상상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일이다.

"확실히, 그 망령에게는 허공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네. …그렇지만."
"그렇지만?"
"땅에서 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걸지도."

매일같이 허공에만 떠올라있으면, 땅에 있는건 꼭대기만 보일 뿐이고.
제대로 땅을 밟아두지 않으면 발바닥에 피가 제대로 돌지 않아서 불편하니까.

"…바보냐? 망령에겐 다리가 없다고."
"앗, 그런가."
"나참, 얼빠진 것도 정도껏 해라."

가벼운 손날이 소년의 이마를 때린다. 피하지도 못하고 정직하게 얻어맞은 소년은 앓는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