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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마녀들의 이야기下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쓰던 도중에 마마마에서 이걸로 마녀가 그만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바보인가....

-9화의 옥타비아는 제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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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않는 크레파스를 줘!"
 
햇님이 방긋방긋, 나도 방긋방긋.
바람이 손을 흔들어주어서 나도 마주 흔들어주었습니다. 멋진 친구.
새하얀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려야지, 빙글빙글빙글.
엄마는 언제 돌아오실까?
 
오늘 그릴 캐릭터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XXX.
TV에서 예쁘게 춤추는 마법소녀.
멋진 옷을 입고 신기한 카드를 모으면서 날아다녀. 멋있어.
나도 저렇게 되고싶은데, 왜 엄마아빠는 그런 말을 들으면 웃는걸까나.
으음, 핑크색으로 리본을 칠하고- 빨간색으로 구두를 만들어야지- 에헤헤.
 
학교에서 틈만 나면 그리는 XXX. 선생님도 보고 칭찬해줬어.
아이 에쁘다. 이제는 안봐도 예쁘게 그릴 수 있지롱. 봐, 지금도 예쁘게 그리고 있잖아.
살색, 살색…. 우엥, 또 다 써가잖아. 너무해, 너무해. 산 지 얼마 안 지났는데.
으음, 그치만 전부 색칠했으니까 괜찮아. 에헤헤헤, XXX 귀여워.
나도 이 아이같은 마법소녀가 되고싶다아아.
그럼 마스코트도 생기려나? 친구도 지금보다 많아질까나?
 
어라? 그런데 너는 누구야?
 
"안녕, *****? 나는 큐베. 뭘하고 있는거야?"
 
안녕,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마법소녀 XXX.
이거봐라, 귀엽지? 나 얘가 나오는 만화책 전부 가지고 있어.
우리 반 애들 중에서 내가 제일 잘 그린다? 그치? 잘 그렸지?
 
"그렇네. 그럼 *****, 너도 마법소녀가 되보지 않을래?"
 
내가? 마법소녀? 될 수 있어? 진짜?
 
"물론이지. 만약 네가 마법소녀가 되준다면, 소원 하나를 들어줄게."
 
소원? 나 별로 소원 없는데… 꼭 빌어야 하는거야? 엄마한테 물어보면 안돼?
앗, 그렇지. XXX도 부모님에게 들키지 않게 마법소녀가 되었으니까 나도 비밀로 해야하는구나.
미안해 미안해. 음음, 잠깐만 기다려? 지금 열심히 생각해볼테니까-
 
"정해지면 언제든지 얘기해."
 
으ㅡ음, 소원, 소ㅡ원, 소ㅡ원ㅡ?
아, 생각났다!!
 
"뭔데?"
 
=
 
와아, 넓다. 막 벽이 뺑글뺑글 돌아가- 무슨 미로같다!
아하하!! 있잖아, 저기 저-기 있는 투명한 달팽이는 뭐야? 무지 이쁘다아!
오와, 방금 새 날아갔어 새!! 큐베, 봤어? 머리에 나비가 달려있었어!
여기 무지 신기해애! 유원지보다 더 재밌어!! 엄마아빠랑도 놀러오고 싶다아!
 
"하아… *****, 우리는 지금 마녀를 물리치러 온거야. 느긋한건 좋지만, 좀 더 위기의식을 가지는게 어때?"
 
에헤헤, 미안! 그치만 너무 신기한거얼.
근데 근데, 마녀도 사실은 착한 아이 아닐까? 아무도 자기랑 놀아주지 않으니까 토라진거야!
내가 가서 같이 놀아주면 마녀도 다시 착한 아이가 되지 않을까? 응? 어떻게 생각해?
 
"글쎄… 전례가 없어서 잘 모르겠는걸?"
 
그럼 내가 해볼게! 괜찮아! 마녀라고는 해도 마법소녀랑 두글자밖에 차이가 안나잖아?
분명히 친해지면 착한 아이일거야! 엄마랑 아빠가 그랬어!
마음만 먹으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는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만화책에서도 마녀가 나중에 착한 아이가 되고 그랬어! 그러니까 나도 친구할꺼야!
그럼 같이 집에서 소꿉놀이도하고 그림도 그리고 그래야지! 과자도 줄거다?
큐베에게서 받은 마법의 크레파스도 자랑할거야!
 
"하지만 서두르는게 좋아, 이 마녀는 성질이 급한 것 같으니까."
 
성질이 급하다는건, 우리 옆집 아저씨 같다는 거야? 엄마가 자주 그랬어. 아저씨는 성질이 급하다고.
우리 옆집 아저씨, 맨날 가만히 계시질 못하고 뛰어다니거나 전화를 하거나 하여간 바쁘게 움직여.
그래도 나를 보면 꼭 사탕을 하나씩 준다? 그럼 마녀도 나를 보면 사탕을 주려나?
나 오렌지 맛이 좋은데.
 
앗, 문이다. 어디보자아. [미시오]라고 되어있네?
그럼 민다? 하나, 둘, 세엣ㅡ 영차! 열렸다!
 
…….
 ……….
………….
 
저기이, 큐베?
 
"왜 그래? *****."
 
다들 쓰러져있어. 어떻게 된거야?
우리 엄마아빠도 있어. 어떻게 된거야?
왜 다들 안 움직여? 왜 다들 새빨갛게 되버렸어?
왜 다들… 몸이랑 머리가 따로따로야?
 
"아무래도 다들 마녀의 저주에 휩쓸린 모양이야. 우리가 한 발 늦었네, *****."
 
그건 무슨 뜻이야? 우리 엄마랑 아빠, 죽었어? 왜? 왜? 왜?
그럼 내가 마법을 써서 살려낼래! 어떻게 하면 돼?
엄마랑 아빠를 되살릴 방법을 가르쳐줘!
 
"안됐지만 마녀에 의해 죽은 사람을 되살릴 마법은 없어."
 
그럼!! 그럼 내 소원을 써줘!! 분명히 뭐든지 다 들어줄 수 있다고 했지?!
 
"안돼. 너는 이미 [닳지 않는 크레파스를 받는다]는 소원을 사용했잖아?"
 
싫어! 싫어싫어싫어!! 크레파스 도로 가져가!! 이제 필요없어!
크레파스보다 엄마아빠가 더 좋아!! 그러니까 엄마랑 아빠가 죽는거 싫어!!
엄마아빠가 없으면 내가 그린 그림을 누가 봐줘?! 엄마랑 아빠 살려내! 살려내란 말야!!
 
"단 하나뿐인 소원을 번복할 수는 없어."
 
싫어!!!! 큐베 정말 싫어!!!!!!!! 마녀한테 갈꺼야!!!!!!
마녀랑 친해지면 엄마아빠를 다시 되살려줄거야!!!! 그치?
그렇지? 큐베? 저기, 그렇지? 우리 엄마랑 아빠, 다시 살아날 수 있지이이이?
 
"안됐지만 마녀도 죽은 사람은 되살려 낼 수 없어, *****. 마녀라서 되살려낼 수 없다는게 맞겠지."
 
 ……우, 우우……….
 
"원망하려거든 부모님을 저주한 마녀를 원망해, ******."
 
으,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엄마아아아아아아아!!! 아빠아아아아아아아아!!!
엄마랑 아빠가 없으면 나랑 누가 숨바꼭질 해줘어어어어어어어어?! 싫어!! 싫어!!
죽지마!! 죽지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마녀 나빠!! 마녀 나빠!! 마녀 나빠!!!
너무해너무해너무해!! 나는 친구가 되려고 했는데! 마녀는 우리 엄마랑 아빠를 죽여버렸어!!
못됐어!! 나빠!!! 나빠! 나빠나빠나빠나빠나빠!! 이젠 몰라!! 마녀랑 친구 안해!! 미워할거야!!
때려줄거야!! 마구 괴롭혀줄거야!! 절대로 친구 안해애애애애애애애애!!!!!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래, 그럼 된거야, *****."
 
그리고 약 1시간 뒤,
부모를 잃은 충격 속에서 마녀를 죽인 소녀는 이윽고 낙서의 마녀Albertine가 되었다.
 

 
 6. "부모님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책꽂이. 왼쪽에서부터 화학, 생물, 물리, 지구과학, 사회, 세계지리, 세계사, 경제, 정치, 수학, 외국어, 문학, 비문학, 역사, 윤리. 풀어야 하는 문제집은 일주일에 두권. 오답노트는 꼼꼼하게. 틀린 문제는 오답노트를 만들고도 다시 한번 복습. 예습 복습은 기본. 수면시간은 기본 4시간. 식사를 하면서도 영어단어를 외우고 등교를 하면서도 수학 공식을 외울 것. 주말에는 한 주동안 배운 내용을 가볍게 테스트하고 꽃꽃이나 다도를 배움으로써 마음을 다스린다.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서 하는 일은 신문을 읽으면서 재빨리 세계 정세를 파악하고 부모님 앞에서 이야기 하는 것. 매일 저녁마다 하는 일은 한편의 한시를 외워 부모님 앞에서 한자로 쓴 뒤 그 뜻과 의미를 해석하는 것. 요리를 먹을 때에도 수없이 많은 매너를 지켜야 하고, 목욕을 할 때에도 너무 오래 들어가 있으면 안된다. 몸가짐은 언제나 조심스럽게. 행여나 부모님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오랜 귀족가문의 피를 이은 집안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일이 없도록. 단 하나뿐인 외동딸로서, 부끄럽지 않은 품위를.
 
"이게 다 널 위한 거란다."
"네, 어머니."
 
대학 교수이신 부모님이 참가하는 공식 행사에는 남 부럽지않은 드레스를 입고 생글생글 웃으며 참가. 창피를 당하지 않도록 사교댄스도 적절하게 배워두지 않으면 안돼지.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것은 뛰어난 지성과 멋진 미모, 부드러운 성품을 동시에 겸비한 딸을 부러워하는 한숨소리. 집에서는 누구보다 다소곳한 딸이며 학교에서는 믿음직한 학생회장. 모든 이들이 우러러보고, 어떤 어려운 문제도 척척 해결한다. 모두가 너를 의지하고 있어. 네가 없으면 그 무엇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거야. 하지만 너는 우리들이 없으면 금새 균형을 잃고 굴러떨어지겠지. 마치 받침대를 잃어버린 조각상처럼.
 
"너는 선택받은 아이란다."
"네, 아버지."
 
그러니 더더욱 완벽하게, 대장장이가 울퉁불퉁한 철을 마구 두드리고 식히고 덥히며 명검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이 너의 몸과 마음을 단련하자. 이렇게 우수한 가문에서, 이렇게 우수한 부모에게서, 이렇게나 우수한 재능만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여, 너는 틀림없이 우리들의 크나큰 자랑거리가 되겠지. 아아, 이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이냐.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리가 없겠지?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단정하게 차려입은 정장이 숨통을 조여온다. 책상에 펼쳐진 온갖 참고서들이 눈을 어지럽힌다. 백열등의 빛이 너무 창백해서 서글프다. 지금 이곳은 단순한 새장. 아니, 자신은 그 안에 들어있는 새조차도 못한 신세. 비슷한 것은 그저 갇혀있다는 사실 뿐. 굳이 비유하자면 새장 안에 넣어진 기계새. 그저 주어진 명령대로 움직이고 노래하는 태엽인형. 갇혀있다. 갇혀있어. 누구라도 좋아, 무엇이라도 좋아.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까 내가 이 새장 밖을 나가게 해줘. 자유로워지게 해줘. 기계인형이 아닌 새가 되어 마음껏 날개짓하게 해줘. 있는 힘껏 노래하게 해줘. 그럴 수만 있다면 무엇을 희생해도 좋으니까.
 
"그럼 나랑 계약해줄래?"
 
=
 
 노을이 진다. 저택에서 가장 가까운 이 해변가에는 언제나 봐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운 노을이 진다. 소녀는 늘 단정히 입던 정장의 단추 몇 개를 느슨하게 풀어낸 채 바닷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짠 냄새가 코로 스며든다. 평소같았더라면 집안에서 바이올린 교습을 받거나 외국어를 배우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와서 허겁지겁 돌아갈 필요는 없다. 어차피 그 날 이후로 자신의 모든 강습은 끊어지고 그 많던 가정교사들도 모조리 해고되었으니까. 지금 집에 돌아가봤자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광활한 시간만이 넘쳐흐를 뿐이다. 그리고 생글생글 웃고있는 부모님도. 그 모습을 상상한 소녀는 어쩐지 뱃속이 써늘해지는 감각에 몸을 웅크렸다. 귓가에 파도소리가 울려퍼졌다.
 
 "*****, 왜 그래? 어쩐지 의기소침하네."
"아아, 큐베구나…. 그냥, 너무 한가해져서 말야…."
"자유로워지고 싶다는게 네 소원이었잖아? 소원이 이루어진 기분은 어때?"
 
소원이, 이루어진, 기분.
 
소녀의 입술이 소리없이 달싹였다. 이윽고 한껏 웅크려진 소녀의 몸에서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큐베는 근처에 주저앉은 채 소녀의 통곡을 들었다. 훌쩍거리는 어깨와 부들부들 떨리는 허파의 듀엣은 눈물이 날 정도로 처절했지만, 큐베는 그저 두 번 눈을 깜박였을 뿐이었다. 이윽고 소녀의 성대가 세차게 노래했다.
 
하나도 모르겠어. 엄마랑 아빠는 내가 소원을 빌자마자 단숨에 나를 옭아매고 있던 사슬을 풀어주셨지만, 정작 나는 여전히 그 사슬에 묶여있어. 새장 바깥으로 나오면 마음껏 노래하고 마음껏 날개짓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오히려 그 새장에 더더윽 갇혀버렸다구! 지금은 내가 하고싶었던게 뭐였는지도 기억 안나! 장래희망이 과학자였다는건 기억나지만, 그랬다간 겨우 그만둘 수 있게 된 공부라는 새장에 스스로 기어들어가는 꼴이잖아? 그건 싫어!! 기껏 빈 소원이란 말야! 난 좀 더 자유로워지고 싶어!! 그치만 어떻게하면 자유로워지는 건지 모르겠어!! 하나도 모르겠다구!! 뭘 하고싶었는지, 뭘 해야 즐거운지, 애초에 대체 즐겁다는 것이 뭔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학교가 끝난 뒤에 여기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거나 철창을 두드리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 뿐이야!! 난 이런게 하고 싶었던 걸까? 이래서야 자유로워졌어도 아무런 쓸모가 없잖아!!
 
"하지만 그게 네 소원이었어, *****."
 
큐베는 하얀 꼬리를 살랑이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소녀는 더욱 크게 흐느꼈다.
처음 보는 거리에서 길을 잃어버린 미아도 그만큼 섧게 울부짖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난… 이제 어쩌면 좋아?"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마녀사냥을 포기하지 말아달라는 것 뿐이야."
"……."
 
소녀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물기 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반짝이는 반지는 노을빛을 받아 주홍색으로 예쁘게 물들어갔다. 하지만 살짝 각도를 기울여서보면 그림자가 져서 마치 새까만 녹이 슨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멍하니 손을 뻗어 노을을 가려보던 소녀의 머릿속에 섬광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나는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늙어가는게 아닐까? 갑작스런 공포에 사로잡힌 소녀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머릿 속에 개미지옥에 파묻혀 서서히 가라앉아가는 기계 새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쇠로 만들어져 맞물린 부리에서는 비명 한 올 새어나오지 못하고….
 
"왜 그래? *****."
"아니… 아무것도 아냐. 마녀를 잡으러 가자."
 
자신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을 꿀꺽 감추며, 소녀는 노을을 등지고 일어섰다.
 
그리고 약 7일 2시간 후.
소원으로 인한 자기 내부의 허무를 견디지 못한 소녀는 결국 은의 마녀Gisela가 되었다.
 

 
 7. "엄마와 아빠도 나를 이해하고 함께 고기를 먹지 않게 해줘."
 
"그거 안 먹어?"
 
왁자지껄한 학생식당에서 그런 질문을 들은 소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식판 위에는 동그란 햄이 케찹 범벅이 된 채 애처롭게 남아있었다. 다이어트라도 해? 이어지는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은 소녀는 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상대방을 향해 네가 대신 먹어도 상관없다고 말하며 남아있던 시금치를 꼭꼭 씹어먹었다. 햄은 어느샌가 케첩의 일부분만을 남긴 채 자취를 감춰버린 상태였다. 만약 친구의 입가에 약간 묻은 케첩 자국만 아니었더라도 학생식당 햄 실종사건이라고 명명할 수 있었으리라. 소녀는 못말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친구의 입가를 지적했다.
 
"입에 케첩 묻었어."
"아… 고마워. …근데 너 요새 다이어트 해?"
"아니. 그건 왜?"
"요새 들어서 고기류는 완전 입에도 안대잖아. 무슨 일 있어?"
"아아… 별거아냐."
 
소녀는 살짝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식판에 달라붙은 케첩은 하얀 식판에 대비되어 무척이나 붉게 보였다.
그 색깔이 언젠가 보았던 TV 프로그램의 한 장면에서 나왔던 핏덩이를 떠올리게 만들어, 소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
 
"어머나, 정말 너무하네."
"그러게. 그러니까 누가 바람을 피우래?"
 
주말 오후였다. 모처럼 집안일을 도와드린 소녀는 자신도 한 사람 몫의 일을 해냈다는 성취감에 젖은 채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당연히 어머니도 함께였고, 둘이서 한 마음이 되어 드라마를 보고있던 모녀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서 뺨을 맞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드라마가 끝나자 재빨리 다른 채널로 화면을 돌렸다. 때마침 다음 채널에서는 일반 가정에서 먹는 고기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철저하게 조사한 르포물이 방영되고 있었다. 아마도 지난 주말 저녁 무렵에 방송된 것이 재방송되고 있었던 것이리라. 살아있는 닭의 목이 순식간에 잘려나가 나뒹굴고, 돼지가 멱따는 소리를 내며 뒹굴다가 이윽고 사지를 버둥거리며 입을 다무는 장면은 도저히 안온한 오후의 노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었다. 소녀는 저도 모르게 리모콘을 내던지며 어깨를 움츠렸다.
 
"저게 뭐야!!"
"이런이런, 빨리 채널 돌리렴 얘. 저런거 봐서 좋을거 없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다 소녀가 리모콘을 집어던졌다는 것을 알고 재빨리 그것을 집어들어 화면을 바꿨다. 어두침침하던 화면이 금새 알록달록해지며 박수소리와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게스트에게 문제를 내고 그 문제를 맞추지 못하면 우스꽝스런 벌칙을 주는 퀴즈쇼에서 좀전에 보았던 그 비참한 광경은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깨를 움츠린 자세 그대로 소란스런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소녀는 갑자기 몸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끼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갔다. 뒤에서 어머니가 의아하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어째서인지 멈출 수가 없었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침대로 파고들어간소녀는 이불을 몸에 휘감은 채 자신이 조금 전에 보았던 영상을 떠올렸다. 도끼에 잘려나간 닭의 목. 단말마를 지르다 조용해진 돼지. 흥건핮는 않더라도 분명 점점이 튀어나가던 핏자국…. 한참을 그러고있던 소녀는 서늘한 손가락으로 이불을 박차고 나와 재빨리 컴퓨터의 전원을 키고 검색을 시작했다. 몇날 며칠을 부모님에게 졸라서 산 컴퓨터는 소녀의 지시에 따라 착실하게 정보를 내놓았고, 약간은 섬찟한 눈으로 화면에 나타난 자료를 모조리 읽은 소녀는 일견 비장한 표정이 되더니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앉아 과자를 먹고있던 어머니가 소녀를 향해 과자봉지를 내밀었다가 그 표정을 보고 흠칫했다.
 
"나 앞으로는 고기 안 먹을래."
 
<와하하하, 그건 말도 안돼죠 XXXX씨->
등 뒤의 TV에서 요란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너무 기분나빠. 앞으로는 채소만 먹을거야."
"아니 얘가 지금 무슨 소리야? 한창 클 나이에."
"한창 클 나이고 뭐고 기분나쁘다고!! 안 먹을거야!!"
"얘가…!!"
 
벌떡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어머니는 자신의 딸과 눈싸움을 벌이다 손목만을 움직여 TV의 전원을 껐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거라니깐!!>이라고 외치는 게스트의 목소리와 방청객의 웃음소리가 우스꽝스럽게 지워졌다. 갑작스럽게 찾아든 침묵 속에서 창밖에서 들려오는 도로의 소음이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갑자기 왜 그러니?"
"다 봤어. 전부."

소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어머니를 노려보았다. 마트에서 깔끔하게 포장되서 파는 닭고기, 소고기, 돼지고기의 뒷면에 어떤 추잡한 짓거리가 이루어지는지 모르는 주제에, 아니 분명하게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주제에 태연하게 그걸 사서 요리하고 입으로 밀어넣으며 즐거워하던 여자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도 수많은 동물들은 강제로 살이 찌워지고 운동도 못하는 좁은 환경에서 갇혀지낼 뿐만 아니라 죽고싶지도 않은 순간에 억지로 목숨을 잃어버려야 해!! 그것도 겨우 우리들의 한입거리가 되기 위해서!! 우린 매일같이 동물들의 시체를 먹으면서 살아온 거야!! 그런데도 동물들이 불쌍하지도 않아? 미안하지도 않아? 그러면서도 매주 일요일마다 뻔뻔하게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리러 갔다니, 정말이지 어이가 없는 데에도 정도가 있지!!"
"넌 대체… 아니, 됐다. 나중에 얘기하자."

어머니는 골치아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소녀가 비싼 장난감을 사달라고 마구 졸랐을 때 길거리에서 지었던 것과 똑같은 표정이었다. 순간 그녀가 자신의 중대한 결심을 일순간의 변덕으로 치부하고 있음을 깨달은 소녀는 울컥 치솟는 화를 제지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됐어!! 엄마하고는 완전 말이 안 통해!! 앞으로 난 식사 따로 할거니까 그리 알아요!"
"뭐?! 아니 얘가 정말!! 그게 어디 그리 간단한 일인줄 알아? 엄마는 허락 못해!"
"싫어! 앞으론 절대로 고기같은건 못 먹어! 먹으면 전부 토할거야!!"

소녀는 일방적으로 외치고는 방 안에 틀어박혔다. 주말 오후에 난데없는 벼락을 맞아버린 어머니는 멍청히 그 모습을 쳐다보다 마을 산책을 갔다온 소녀의 아버지에게 사정을 설명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나설 때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던 집이 이렇게 난장판이 되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던 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딸의 방문을  두드렸지만, 되돌아온 것은 히스테릭한 고함뿐이었다.

그 일이 있은 이후로 며칠간, 소녀는 집에서 단 한번도 밥을 먹지 않았다.
반항이라면 나름의 반항이었다.

하지만 그 반항은 스스로의 체력을 깍아먹어, 당연하게도 어느날의 저녁에 식사를 하는 대신 어딘가에서 죽어가고 있을 동물들을 위해 기도하며 공복을 이겨내던 소녀는 그만 깜빡 기절할 뻔했다. 점심때 학교에서 나온 급식을 잔뜩 먹어두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위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자신의 창문 턱에 앉아있는 하얀 고양이 같은 것을 본 소녀는 자신이 공복에 야채절임을 너무 많이 먹은 탓에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것이 소녀에게 건넨 말에 비하면 소녀의 착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안녕, *****. 내 이름은 큐베. 나랑 계약해서 마법소녀가 되어주지 않을래?"
"마, 마법소녀?!"
"그래! 만약 마법소녀가 된다면, 네 소원을 하나 들어줄 수도 있어!"
"…소원?"

소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소원. 바라고 원하는 것. 두 손이 문득 비어있는 배를 쓰다듬고 메마른 입술이 말없이 뻐끔거렸다. 자신이, 지금 이렇게 하고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지? 뭣때문에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고 있었던 거지? 엄마아빠가 미워서? 아냐, 나는 그냥, 이해해주지 않는다는게 너무 답답해서…. 지난 며칠간 자신의 머리에 씌워져있던 무언가가 갑자기 벗겨져나간 듯한 기분에 멍하니 서 있던 소녀는 큐베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화술이 좋지 못하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

"흐음, 그래서 가족들이 단체 채식주의자라고? 힘들겠네에."
"뭐 그렇지도 않아. 이리저리 찾아보니까 의외로 그런 사람들도 많더라고."
"설득하느라 힘들었겠네. 너 국어 점수 별로잖아?"
"아하하… 뭐 하니까 어떻게든 되더라."

웃으면서 얼버무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식판을 반납하려던 소녀는 평소같았으면 자신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을 친구가 여전히 골똘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의아함을 느꼈다. 친구는 자신의 식판에 남아있는 케첩자국을 젓가락으로 마구 휘저으며 영문 모를 자국을 만들고 있었다. 대개, 이 친구는 뭔가에 깊게 빠져들면 이런 손장난을 보이는 버릇이 있다. 호기심을 느끼고 다시 자리에 앉으려던 소녀는 친구의 다음 말에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근데 그거, 위선 아냐?"
"…………뭐?"
"넌 아까 고기때문에 희생되는 동물들이 불쌍하다고 했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인간을 위해 희생되는건 식물도 마찬가지 아냐? 아무리 무생물이라고 해도 식물도 엄연한 하나의 생명이야.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잎으로 햇빛을 받고, 줄기를 뻗지. 왜 동물이나 생선은 불쌍하게 여기면서 식물은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해? 말을 못하니까? 의식이 있는지 어떤지 모르니까?"

소녀는 말문이 막혔다. 그것이 분노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친구의 지적에 정곡이 찔려 할말이 없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식판을 쥐고있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면서 공중에 멈춰있던 식판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고… 소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친구는 뒤늦게 붙임성 있는 미소를 띄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뭐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농담이었어 농담!! 아하하, 삐졌어?"
"………."

소녀는 대답하지 않고 친구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소울 잼이 부글, 하고 끓어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난 위선자가 아니야."
 
나직히 중얼거린 말은 소란스러움에 파묻혀.

"위선자가 아니라고… 이 멍청아."
 
사라졌다.
 
이후 약 4일 15시간 뒤,
소녀는 타락한 소울 잼과 함께 그림자의 마녀Elsa Maria가 되었다.



8.  "XXX의 상처가 전부 낫게 해주세요"
 
소녀는 치맛자락에 얼마 되지 않는 무언가를 숨긴 채 좁은 골목길을 달려갔다. 콘크리트가 발려 울퉁불퉁한 길은 자칫 잘못 넘어졌다간 소녀의 여린 피부를 세차게 긁어낼 수도 있는데도 소녀는 걸음을 늦추기는 커녕 오히려 더더욱 속도를 높였다. 마치 그 끝에 길을 구르는 위험보다 더 중요한 볼일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윽고 골목길의 한구석, 누군가가 버려놓은 쓰레기가 모여있는 모퉁이에 다다른 소녀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본 다음 무릎을 굽히고 쓰레기 더미의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나무 판자나 커다란 자재같은게 버려지면서 생겨난 공간 사이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갈색 개가 쫑긋 귀를 세웠다.
 
"XXX! 나왔어! 배고프지? 이거 먹어!"
 
소녀의 치맛자락에서 얼마되지 않는 밥덩어리가 굴러나왔다. 시간이 지난 모양인지 굳어버린 밥풀이 치맛자락에 들러붙었지만, 어떻게든 덩어리를 떼어낸 소녀가 개에게로 한손을 내밀자 개는 슬그머니 몸을 이쪽으로 빼고는 허겁지겁 소녀의 손에 올려진 식량을 낼름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하루에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빗물을 받아둔 그릇의 물과 이렇게 소녀가 가져다주는 식량이 전부니 상당히 굶주려있었을 것이다. 소녀는 열심히 자신의 손가락을 핥는 개를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금새 텅 비어버린 손으로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느다란 손이 일그러진 상처에 살짝 닿았다.
 
"불쌍한 XXX."
 
소녀가 상처입은 개를 발견한 것은 약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사람에게 당했는지, 아니면 들개에게 당했는지 다리와 얼굴에 상처가 나있던 개는 분명 보드라웠을 갈색 털을 찐득한 피로 물들인 채 신음하고 있었고, 깜짝 놀란 소녀는 개를 집으로 안고 들어와 자신이 알고있던 연고와 반창고를 닥치는대로 꺼내 치료를 해주었다. 하지만 사람 이외의 생물이 집안에 돌아다니는건 그게 뭐든지간에 질색을 하는 어머니는 당장 그 더러운 개를 바깥에 내던지고 오라고 소녀를 윽박질렀고,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상처입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개를 매몰차게 버릴 수 없었던 소녀는 자신만이 아는 비밀스런 공간에 개를 몰래 숨겨두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소녀는 자신의 밥을 조금씩 남기면서 개를 먹이고 옷을 몰래 빼돌려 개를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것은 고달픈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어쩐지 가슴 뿌듯해지는 일이기도 했다. 적어도 소녀는 지금까지 이토록 누군가에게 헌신해본 적이 없었으며, 누군가에게 헌신한다는 것은 곧 상대방이 자기자신을 오롯이 받아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또한 소녀에게는 처음이나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XXX, 내가 없어서 쓸쓸했어?"
 
개는 낮게 짖으며 소녀의 손에 얼굴을 부볐다. 쓸쓸했구나. 나도 XXX랑 놀고싶어서 학교에서 쭉 쓸쓸했어. 소녀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개의 머리에 자신의 이마를 마주대었다. 개는 잠시 코를 킁킁 거리더니 분홍색 혀로 소녀의 코를 핥았다. 저절로 얼굴에 간지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요 장난꾸러기!"
"왕!"
 
소녀가 손가락으로 개의 이마를 때리자 개는 얼굴을 푸르르 젓고는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갈색의 털뭉치가 기세좋게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꼬리와는 달리 소녀가 옛날에 입던 원피스나 스웨터, 못 쓰는 타올이 깔린 바닥 위에 뉘어진 뒷다리는 조금도 움직일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소녀와 개가 처음 만났을 때 제일 피가 많이 나있던 그 자리다. 기실 지금도 거뭇거뭇한 핏자국이 남아있는 뒷다리를 바라보던 소녀는 살그머니 손을 뻗어 힘없이 늘어진 뒷다리를 조심스레 건드려보았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소녀에게 호감을 드러내고있던 개가 흠칫 몸을 떨더니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일어난 변화에 깜짝 놀란 소녀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찍으며 뒤로 넘어졌고….
 
"…XXX?"
 
멍하니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갈색 개는 여전히 심통이 뒤틀렸는지 여전히 사납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완벽한 적의, 빈틈 없는 거절, 차가운 냉대.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갈색 개의 모습에 멍하니 주저앉아있던 소녀는 더럭 솟아나오는 공포심에 몸을 떨며 다시 한번 개에게로 손을 뻗었다. 괜찮을거라고, 방금 그건 상처를 건드려서 놀란 것 뿐이라고, 이젠 시간이 지났으니까 다시 손가락을 핥아주리라고 기대하면서.
 
"크르렁!"
"꺄아!!"
 
소녀의 믿음은 참혹하게 짓씹혔다. 피부에 선명하게 남은 짐승의 이빨자국을 망연히 쳐다보던 소녀는 붉은 핏방을이 서서히 스며나오기 시작했을 무렵 주체할 수 없는 공포심을 느끼고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심장에서 서늘한 핏물이 마구 솟아나오는 느낌이었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발목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휘감기며 낄낄 웃어제꼈다. '멍청하긴, 너는 어차피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거나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해!' 소녀는 그 목소리를 떨쳐내려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달렸다.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있었다.

물린 상처에서 배어나온 피는 가느다랗게 흘러내렸다. 소녀는 현관에 그대로 주저앉은 채 가쁜 숨을 내쉬다 머리를 감싸쥐었다. 손은 덜덜 떨리고 세차게 뛰는 심장은 진정할 기세를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마치 자신에게 되뇌이듯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언뜻 듣기에는 무언가의 주문처럼 들리기도 했다.
 
"아냐, XXX는 잠깐 놀란 것 뿐이야. 조금만 더 기다리다가 가면… 아니, 하룻밤 자고 내일 가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다시 나랑 놀아줄거야… 그치만 안 놀아주면 어떡하지? 아냐, 그럴리가 없어… 매일마다 내가 밥도 주고 같이 놀아줬는걸? XXX도 내가 오면 좋다고 꼬리를 흔들어줬잖아? 혀로 뽀뽀도 해줬는걸? 겨우 그거 하나때문에 나를 싫어할리가 없어… 그래, 그럴 리 없어… 상처가 아파서 잠깐 예민해진거야. 상처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또 나랑 놀아주고있었을테니까…. 괜찮아, 괜찮아, XXX는 내가 싫어진게 아니야…. 그러니까 상처가 나으면 나랑 놀아줄거야… 틀림없어…."

……정말로?

"그래!!!"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소녀는 자신의 행동이 깜짝 놀라며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한거람. 이러면 마치 내가 XXX에게서 미움받고있는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 같잖아? 그럴리가 없어. XXX는 나를 좋아하는걸? 단지 상처때문에… 그래, 전부 상처때문이야. 나쁜 상처, 못된 상처. 이제는 세뇌나 다름없는 말을 반복하며 자리에서 일어서 방으로 들어가려하던 소녀의 눈에 처음 보는 생물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새하얀 고양이, 혹은 토끼를 닮은 기묘한 동물.

그리고 그 동물이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 내 이름은 큐베. 너에게 부탁이 있어서 왔어."
"에? 어… 너, 말할 수… 있는거야? 부탁은 또… 뭔데?"
"나와 계약해서 마법소녀가 되어주었으면 해!!"

머뭇머뭇거리는 소녀의 말에 동그랗고 빨간 눈동자로 웃으면서 대답한 동물-큐베는 뒤이어 이렇게 말했다. 만약 네가 마법소녀가 된다면, 네가 바라는 소원 한 가지를 무엇이든지 이루어 줄 수도 있다고. 그 말을 들은 소녀는 여태까지의 모든 소녀가 그러했듯이 그 말이 정말이냐고 물은 뒤 잠시 생각에 잠겼고… 잠시 뒤 조그마한 입술을 움직여 자신의 소원을 말했다.

자신을 오롯이 바치기 위한 소원을.

=

소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포에 질린 채 달려갔던 길을 되돌아와 쓰레기 더미 속에 숨어있던 개를 바라보았다. 소녀가 그 안에 숨겨두고 며칠이 지날 동안 그 안에서 꼼짝달싹도 못하던 개는 비틀비틀거리면서도 네 개의 다리로 자신의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순진한 까만 눈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소녀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개를 자신쪽으로 부르는 손뼉을 쳤다. 자그마한 귀가 쫑긋거리더니 이윽고 개가 소녀의 품으로 달려들었고, 소녀는 더없이 행복한 기분을 느끼며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개에게로 얼굴을 부볐다. 온기는 너무나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이대로 계속 있을수만 있다면….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던 소녀의 머리를 깨부순 것은 어느 소년의 외침이었다.

"아앗!! 엄마, 찾았어! XXX야!! 여기 있었구나!!"

피가 식는다. 소녀는 그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비단 그 소년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목소리가 울려퍼지자마자 소녀의 폼에 안겨있던 개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소녀의 품을 쏙 빠져나가 소년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달려가버린 것이다. 온기는 순식간에 공기중으로 흩어졌고 부드러움은 상실되었다.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린 소녀의 눈에 비친 것은 골목길 저편에서 갈색 개를 안아들고 기뻐하는 모자의 모습이었다. …아마도, 그 개의 원주인이지 싶었다. 혹시나 싶어서 일부러 개목걸이도 빼놨었는데 설마 이렇게 어이없게 마주치게 될 줄이야. 소녀는 자신의 집 쓰레기통에 버려져있는 빨간 끈을 떠올리며 이를 꽉 물었다. 

"정말 다행이다- 얼마나 걱정했다구!"
"그래도 이 털 더러운 것 좀 봐라. 돌아가면 목욕부터 해야겠네!"
"괜찮아요! 내가 씻겨줄테니까! 그치 XXX?"

개는 짧게 한번 짖었다. 모자가 웃었다. 소녀는 그저 골목길 한구석에 무릎 꿇은 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이윽고 모자와 개의 모습이 골목길의 모퉁이 저편으로 사라져갔고… 그동안 단 한번도 눈을 깜박이지 않던 소녀는 뒤늦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자의 뒤를 쫓아 골목길을 달려갔다. 하지만 모자는 이미 건널목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고, 어찌 손 쓸 도리없이 못 박힌 듯 서있던 소녀의 머릿속에서는 토해내지 못한 말들이 미친듯이 소용돌이쳤다.

그 개는 내가 주웠어요. 상처입어서 꼼짝도 못하는걸 내가 치료했다구요. 서툴었지만 열심히 노력했어요. 엄마한테 혼나서 어쩔 수 없이 밖에 숨겼지만 그동안 내가 돌봐줬어요. 그 개도 나를 좋아해줬어요. 밥을 주면 손가락을 핥아주고 뽀뽀도 해줬어요, 꼬리도 흔들어주고 나랑 같이 놀아줬단 말이에요. 상처때문에 아파하는게 슬퍼서 내가 마법의 힘으로 낫게 해줬는데….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데려가요? 데려가지 마요, 데려가지 마요….

나는 걔가 없으면 쓸쓸하단말야….

"여기서 뭘하고 있어?"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소녀는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큐베가 있었다. 대체 언제 자신을 따라온걸까. 그런 것을 생각하던 그녀가 다시 모자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들은 이미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린 상태였다. 소녀는 감출 길 없는 상실감에 무릎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유일하게 자신이 사랑하고 사랑받는다고 실감할 수 있던 단 하나의 존재가 사라져버렸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자신은 또 무엇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할까. 혼자는 이토록 외로운데. 이토록 쓸쓸한데.

"…………치사해."
"응?"
"자기만 잔뜩 사랑받다니…."
"누구 얘기야, *****?"
"……………."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가에서 참지 못한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그리고 약 8일 3시간 20분 후.
애정에 너무나 굶주려있던 소녀는 결국 개의 마녀Uhrmann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