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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트라우메라이 2기(2017)

[엔딩 로그]사라진 것이 전부는 아니므로

고향에 돌아오니 시내에서 마을로 돌아가는 버스가 멋들어진 푸른 색이 되어있었다. 반짝거리는 차에 어색하게 올라앉은 여자는 이런게 세월의 흐름이란건가, 라고 생각했다가 실소했다. 나이를 먹으면 얼마나 먹었다고 벌써부터 세월 운운이람. 하지만 여기를 떠나기 전 이 버스는 촌스러운 노랑이었고 자신에게 어깨 부상 같은건 없었다. 그녀는 다시 홧홧하게 타오르는 가슴을 애써 외면하며 이어폰을 귀에 끼웠다.

플레이 리스트가 절반 정도 지났을 무렵 버스는 익숙한 이름의 정류장 앞에서 정차했다. 자신 말고도 장을 본 바구니나 덜 짠 목도리가 담긴 종이가방, 두꺼운 서류가방을 든 승객들이 줄줄이 내린 정류장은 퍽 한산했다. 그녀는 가방을 추스리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걸었다. 예전의 구멍가게가 약국으로, 예전의 빵집이 편의점으로, 예전의 책방이 카페로... 변한 길을 걸어가는 동안, 풍경은 조금씩 기억과 닮은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려면 꺽어들어가야 하는 골목에 이르러선 하나도 변한 점이 없었으나, 그녀는 그곳을 지나쳤다. 오랫만에 온 김에 고향 구경이나 하는 거지 뭐. 마른 입술이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마음 속에선 전혀 다른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그 사이 카페 바깥자리에서 뜨개질을 하던 노인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궜다. 카페를 지난 뒤에도 그 놀란 듯한 눈빛이 자기를 계속 따라오는 것 같았다.

젠장, 노인네가 젊은 사람 보는게 대체 뭐가 대수라고 그래?
설마 날 알아봤으려고?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어느새 옆 동네까지 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합학교 시절 서로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 살았던 곳이다. 몇몇은 어딘가에 취직해 이 마을을 떠났고 몇몇은 옛날에 연락이 끊긴 지 오래지만, 여기에는 마을을 한 바퀴 산책해도 좋을 만큼의 추억이 쌓여있다. 그녀는 느릿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딘가에서 고양이 소리가 들린다.

고양이를 싫어하진 않는다. 예전에는 훈련을 위해 머무르는 훈련장이나 숙소에서 고양이가 보이면 언제든 먹이를 줄 수 있게 건식 사료를 챙겨뒀었다. 하지만 이전에 샀던 사료는 소속 구단을 떠나게 되면서 믿을 만한 팀원이나 경비원에게 넘기고 왔다. 배를 채울 생각으로 샀던 육포도 버스에 타기 전 죄다 먹어버린 지 오래였다. 낭패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일단은 울음소리가 너무 귀여웠고(당연하다) 듣기에는 꽤 여러 마리가 있는 것 같았으며(보기 드문 풍경이다) 이미 누군가가 그들을 돌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누가 돌보고 있나?). 근데 이 목소리, 어디서 들은 듯한데.

"냐옹냐옹~"

온갖 친구와 동료와 감독님과 매니저, 취재 기자의 이름 속에서 오랜 시간 만나지 않은 이의 이름을 건져올리기는 힘들다. 하지만 정원 딸린 이층짜리 집 앞에 섰을 때, 여자의 머릿 속에선 몰래 친구 집 정원에 숨어들어 물줄기로 장난을 쳤던 초여름날의 기억이 벼락처럼 떠올랐다. 날씨는 아이들이 더위를 떨치기 위해 난리를 칠 수 있을 만큼 적당히 후덥지근했고 모두들 뭔가 시원하고 재밌는 놀이를 하고 싶어했어했다. 그때 자기 집 정원에서 물을 뿌리고 놀자며 나섰던 어느 아이의 눈부신 금발이, 지금 바로 눈 앞에 있다.

"...사라진 슈메터링?"

이쪽을 반쯤 등진 채 고양이를 달래던 손길이 멈춘다. 상대는 등을 곧게 핀 채 아무 말도 않다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옛날처럼 반짝이는 금발, 붉은기 도는 주홍빛 눈동자, 하얀 피부가 보이나 싶더니- 한쪽 얼굴을 뒤덮는 화상, 마지막으로 검은 안대가 오후 햇살 속에서 모조리 드러났다. 얼음처럼 투명한 표정이었다.

아차.

시간의 무게를 실감하고 후회하려던 찰나 그 얼음이 주르륵 녹아 미소를 피웠다. 사라진의 무릎 위에서 뒹굴거리던 고양이가 나직한 울음소리를 내곤 정원 울타리를 넘어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 동그란 눈동자에 신경이 쏠린 여자는 상대방이 자신을 당신, 이라 불렀다가 잠시 입을 다무는 것을 미처 신경쓰지 못하고 그만 놓쳐버렸다. 하긴 고양이가 자기에게 애교를 부리러 오는데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겠는가.

"오랫만이네."
"응? 아, 음. 나 기억해?"
"기억하지, 당연히."
"기억력이 좋네. 우리가 만난 지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데..."

금발의 청년은 정원 안쪽에 앉은 채 미소지었다. 언젠가 여기서 까불며 장난쳤을 때도 저런 식으로 웃었던가? 잠깐 샘솟았던 의문은 발치에 달라붙어 골골대는 노란 고양이 덕에 살살 녹아내렸다. 사라진 근처에서 팔다리를 편하게 하고 누워있던 검은 고양이 하나는 이제 잠에서 깨어난 모양인지 기지개를 쭉 피곤 땅바닥에 등을 비볐다. 그 서슬에 얼굴을 맞은 얼룩 고양이 하나가 불만에 찬 울음소리를 냈다. 그녀는 잠시 웃었다.

"가족이 많네, 사라진."
"잠시 집을 비우고 오니 세들어 있었어. 쫓아내긴 그래서 잠시 키우는 중." 
"여행이라도 다녀온거야?"
"응, 잠시."

세상을 구하고 왔어.
슈메터링은 그렇게 말하곤 빙긋 웃었다.

"...그거 대단한걸. 나는 기껏해야 피구공이나 튕기다 왔는데."

그것도 이제 더는 못하게 됐지만. 구태여 덧붙이는 입안에서 쓴 맛이 난다. 여자는 고양이를 쓰다듬던 손을 잠시 거두고 오른쪽 어깨를 주물렀다. 팔꿈치 이상으로 들어올릴 수 없는 팔뚝은 더 이상 할 설명은 없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유감이네."
"됐어. 벌 만큼 벌었으니."

슈메터링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기분나쁘진 않았다. 적어도 호들갑을 떨며 앞으로 어떻하냐던 동료 선수의 말이나, 네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연락할테니 지금은 고향에서 푹 쉬라던 감독님의 말보다는 훨씬 나았다. 어쩌면 고양이가 곁에 있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인간은 근처에 따뜻하고 폭신한 생물이 있으면, 더불어 그 생물이 올망한 눈으로 자길 올려다 보고있으면 다른 일은 전부 하찮게 여기는 법이다. 적어도 그녀는 그랬다.

"같이 가볼거야?"

먀웅, 하는 울음은 다소 묵직하다. 사람으로 치자면 일생의 결단을 내린 느낌이랄까. 그런데 방금 좀 이상한 말을 하지 않았나 싶어 여자가 고개를 들면, 슈메터링은 아까와는 조금 다른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너랑 같이 갈거래."
"누가?"
"네가 쓰다듬어 주고있는 아이."

시선을 내려다보면 초록눈의 고양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다 먀아- 길게 운다. 아, 진짜 너무 귀엽네. 확 안아줄까보다. 그녀는 머릿 속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생각들을 황급히 흐트러뜨리곤 이러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우리 집에는 이미 개가 있어. 늙어서 얌전하긴 하지만 고양이를 보고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고. 게다가 어머니는 엄청 깔끔을 떠는데, 아버지도...

"네 사정은 상관없어."
  
돌아온 목소리는 의외로 단호하다. 그녀는 입을 벌린 채, 여전히 정원에 앉아있는 사라진 슈메터링을 본다. ...아니, 사라진 슈메터링이... 맞나? 여름날에 호스로 물을 마구 뿌려대다가 어머니에게 한 소리를 듣자마자 잽싸게 모두를 데리고 도망쳤던 아이가, 이런 말을 저런 얼굴로 할 수 있는 건가?

"그 아이는 네 집에 가보고 싶어해. 거기에 머무를지 어떨지는, 다음에 결정할 일이겠지."

...........

"사라진, 너 상당히 유별나졌구나."
"아버지를 닮아서 그럴지도 모르지."

멋진 농담이라도 한 것마냥 웃은 사라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집안으로 들어간다. 졸지에 균형을 잃은 검은 고양이는 불만스레 꼬리를 까닥이곤 다시 느른하게 몸을 눕혔다. 그의 바지에 붙어있던 풀잎이 간단한 손짓에 떨어져나갔다. 자기 할말은 잘도 하고선 작별인사는 내팽개치고 그냥 들어가는 거냐. 그녀가 어이없어 하는 사이 열린 창문에서 뭔가를 열었다 닫았다하며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보면 이 집안은 옛날부터 공예품을 팔거나 수리하거나, 혹은 자잘한 물건을 고쳐주곤 했지. 망가진 기차 장난감을 무상으로 고쳐주던 어느 여인을 떠올리는 사이, 고양이가 태평스레 손가락을 깨물었다.

"이녀석. 장난치지 마."
"와아앙." 

뭐 어때, 라는 듯한 울음소리.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더니 사라진이 뭔가를 들고나왔다.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온 그가 건넨 것은 끈을 엮어 만든 목걸이와 묘하게 생긴 원형 장식이었다. 지금 나한테 물건 파는거야? 저도 모르게 튀어나간 말에, 그는 기분 상한 내색도 없이 대답했다.

"무상이니까 걱정하지 마. 물건을 좀 정리하는 중이거든."
"정리라니... 가게 문을 닫는거야?"
"응."

대답은 산뜻하다. 얼결에 받아든 물건은 척 보기에도 정교했다. 이 정도 실력이면 가게를 계속 운영해도 될텐데. 그렇게 묻자 슈메터링은 그냥 웃기만 할 뿐이다. 자세한 사정을 물어볼까 하던 그녀는 자신이 너무 오지랖을 부리는 것 같아 겸연쩍게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동안 슈메터링이 물건을 설명했다. 하나는 어렴풋이 짐작했던 대로 애완동물에게 매어주는 목걸이(만약 고양이가 집에 데려간 지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사라진다면 그땐 키우는 개에게라도 달아둬. 귀엽잖아.), 다른 하나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스테인드 글라스(햇빛이 통과하면 색색의 그림자가 생기는데, 그게 상당히 예뻐. 그냥 장식으로 둬도 되고)였다.

"기왕이면 다친 팔을 낫게 할 수 있는 마법의 아이템이 좋을 것 같은데."
"그쪽은 내 전문분야가 아냐. 저주의 아이템이라면 힘써보겠지만."

사라진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소리를 한다. 그녀는 태평한 얼굴의 그를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세상을 구했다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고양이랑 재고 물품 떠넘기기밖에 없어?"
"세상은 구했다지만 개인을 구하는 방법은 모르거든."

"무슨 이런 구원자가 다 있담."
"후후."

웃음은 부드럽다.
그녀는 뜻밖의 선물들을 안고 돌아갔다.


얼마 뒤 사라진 슈메터링은 대대로 내려온 가게와 함께 불탔다.

종합학교 시절의 실낱같던 인맥은 그 죽음을 구심점으로 삼아 팽팽하게 당겨졌다. 마을 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적지 않은 조화와 조문객들이 방문해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래 전부터 모친과 친한 사이였다던 어느 노인이 장례사를 읊고 무덤의 일꾼들이 관을 운구하여 땅을 메우는 동안, 사람들은 2년 전 숨을 거둔 그의 모친과 사라진을 함께 추억했다. 어느 것이고 세피아 색으로 빛바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직 젊은데다 손재주도 좋은 녀석이었는데 말야. 아깝게 됐어."

누군가가 말하자 조문객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벼운 한숨과 옛 이야기, 쓴웃음이 관과 함께 묻혔다.

그녀는 사라진 슈메터링과의 마지막 만남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장례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슈메터링의 정원에서 본 듯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뒷골목 벽 위에서 꼬리를 까딱거리다 사라졌다. 장을 보러 들린 시장에서는 낯설지 않은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푸른 리본 목걸이를 맨 채 길게 하품을 했다. 야채를 파는 상인이 가게 옆에 푹신한 쿠션을 깔아두어 퍽 편안해보였다. 그 가게에서 양배추와 당근을 사고 돌아온 그녀를, 노란 고양이와 나이 먹은 늙은 개가 나란히 반겼다.

다친 팔과 함께 살아가는 동안 사라진 슈메터링에 대한 기억은 빠르게 희미해졌다.
창가에 놓인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만이 그때와 같은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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