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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영원한 7일의 도시

[세츠여휘]배신자들의 밤

-히로 루트 약스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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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얻은 거주지는 본래 연구소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지낼 예정이었던 숙소 중 하나였다. 침대를 비롯한 생활가구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밋밋한 베이지 색 방. 침대 근처의 작은 협탁 위에는 시계가 놓여있었는데, 기계식이 아닌 전자식인 탓에 불을 끄고 드러누우면 초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지휘사는 그 방에서 눈을 떴다.

등덜미를 쭉 훑어내리는 한기가 선명했다가... 체온 속으로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그 사이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방의 천장을 훑었다가 천천히 시계 쪽으로 향했다.

패널 위에는 새벽을 가리키는 숫자가 연둣빛으로 떠올라 있었다.

새벽 2시 12분.

 

지휘사는 마른 침을 한 번 삼켰다가 몸을 일으켰다.

얇은 시트가 스르륵 미끄러져내렸다.

 

닫아놓은 창문으로는 달빛이 가득했다. 차가운 유리창에 손을 올린 채 하늘의 구멍 같은 달을 올려다보던 지휘사는 문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바다 위에 건설된 연구소에는 헬기가 착륙하기 위한 헬기장과 항구가 준비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달빛에 한껏 물들어있는 그곳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느슨히 드리워져 있다. 지휘사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의자 위에 걸쳐놓았던 가디건을 나꿔채어들고는 방을 나섰다. 

 

*

 

밤의 연구소는 어둡고, 어슴푸레하고, 조용하다.

 

고요함을 바느질하듯 규칙적으로 작은 발소리를 내며 아랫층으로 내려온 지휘사가 밖으로 나오자, 짭짤한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한번 휘감았다 흘러갔다. 그림자는 아직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이쪽을 등진 채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특유의 갈색 꽁지머리가 자신과 똑같이 바람에 휘날렸다.

 

"세츠."

 

거리는 다소 멀었지만 짧은 부름이 가닿기에는 충분했다. 남자는 갑작스런 부름에 놀란듯 어깨를 움찔거리더니, 이내 뒤를 돌아보았다.

 

"지휘사? 이런 시간에 뭐하는 거야. 바람도 추운데."

"자다가 깼어. 세츠야말로 뭘 하고 있었어?"

"나는 야경을 좀 구경하고 있었지."

 

저기, 관광타워 보여? 아직도 반짝이고 있어. 그렇게 가리키는 손끝에는 과연 빛을 뿜고있는 거대한 타워가 있다. 하지만 지휘사의 시선은 그곳으로 가닿지 않았다. 그보다는 달빛 아래에 살짝 드러난 붕대와 뺨에 붙은 반창고가 더 신경쓰인 탓이다. 지휘사의 반응을 본 세츠가 쓴웃음을 지으며 제 손목을 팔랑팔랑 흔들어보였다.

 

"이건 신경쓰지 마. 약간 스친 것 뿐이니까." 

"……."

"에휴, 그레이무도 진짜 인정사정없다니까. 그치?"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웃고 있다. 지휘사는 심장이 조이는 기분에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히로와 함께 중앙청을 등진 지 약 이틀이 지났다. 달리 말하자면 '배신자'가 된 지 이틀 차가 된다는 말이다. 히로를 따르기로 결정한 날 환력을 무리해서 쓴 탓에 요양을 해야하는 앙투아네트와 중앙청 내부 업무를 책임져야할 안화를 대신해 에뮤사가 이끄는 기습부대가 이쪽을 공격해온 횟수는 거진 다섯 번을 넘어갔다. 세츠는 전투 때마다 자발적으로 참여해 지휘사편으로 넘어온 신기사들을 백업해왔으니, 어느 날이건 성스러운 별 교회의 구성원과 마주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오늘 오후의 기습을 통해 현실이 되었다.

 

교회 내부에서 이미 의논은 끝난 것인지, (혹은 그가 변명을 들어줄 생각이 아예 없었기 때문인지) 그레이무는 세츠를 마주하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세츠도 전장에 나타난 그를 보고 새삼 당황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자신의 지팡이를 고쳐잡았을 뿐.

 

그리고 기습은 이쪽의 승리로 끝났다.

 

"…나를 따라온 걸 후회하지는 않아?"

"하하, 어쩐지 뭔가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더라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여기서 후회할 것 같았으면 아예 안 따라왔지. 세츠는 다분히 장난스레 지휘사의 콧등을 건드렸다. 

 

"걱정하지 마. 나는 내 의지로 여기에 있는 거야. 지휘사도 교회에 온 날 나에게 그랬잖아? 자길 믿고 따라와 줄 수 있겠느냐고."

"확실히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마음이 흔들려?"

 

고개를 들면 푸르게 빛나는 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며칠 전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던 눈빛 그대로였다. 지휘사는 그 시선을 마주하다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시간상으로는 어제 아침 히로에게서 들었던 말이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실험에 응할 일반인과, 적잖이 피로해진 신기사. 유해화 실험을 진행시키기 위해선 반드시 그 둘을 준비해야 한다. 그 중 일반인 쪽은 이미 구했지만….

 

"…무엇이 옳은 길인지 헷갈려. 할 수 있다면 신에게라도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야."

"신은 대답을 주지 않아. 다만 그곳에 존재하실 뿐이지."

"그럼 신관님은 어때? 내가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지 대신 말해줄 수 있어?"

 

가까이서 바라보는 밤바다는 검고, 야경을 반사하는 물결만이 색색으로 반짝거렸다. 연구소의 어딘가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가운데 바다를 등지고 있던 세츠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거야 간단하지.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을 내려."

"책임?"

"응. 무엇을 선택하든 그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일 각오를 하는거지. 그럼 결과가 어떻게 되던 대체로 그게 정답이야."

"세츠도 그렇게 선택한거야?"

 

성스러운 별 교회, 중앙청.

그 두 가지 소속을 모두 버리고 배신자를 따르는 신관이 미소지었다.

 

"물론이지."

"어째서?"

"실은 지휘사가 취향이라… 아야야, 꼬집지 마 비틀지 마 아파파파파."

"세츠, 난 진지해."

"미안 미안…. 뭐, 신도의 소원을 들어주는게 신관의 임무라서, 라고 해둘까?"

"난 신도가 아닌데?"

"우리 성스러운 별 교회는 신도를 구분없이 받아들인답니다."

"말은 잘 해."

 

지휘사는 팔꿈치로 세츠의 허리춤을 쿡 찔렀다. 세츠가 키득키득 웃고는 지휘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무튼~ 마음이 가는대로 선택해. 설령 실패하더라도 이 유능하고 멋진 신관님이 한탄 정도는 들어줄 수 있으니까!"

"해결은 안 해주는거야?"

"그에 걸맞는 보수를 준다면야. 예를 들면 질 좋은 포도주라거나…."

"속물 같으니."

 

세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윙크했다.

지휘사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

 

지휘사가 괜찮다고 했는데도 세츠는 굳이 숙소 바로 앞까지 따라왔다. 가는 길에 지휘사가 넘어져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게 자기 책임이 될 거라는 이유였다. 아무리 그래도 발치에 불이 켜져있는데 구를 정도로 운동 신경이 낮은 건 아닌데.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지휘사는 그와 나란히 발걸음을 맞춰 어두운 연구소를 걸었다. 내려올 때는 한없이 길게 느껴지던 길은 돌아갈 때는 놀랄 정도로 짧게 느껴졌다.

 

"그럼 난 이만 들어갈게. 세츠도 쉬어."

"아, 잠깐만. 지휘사. 가만히 있어봐."

 

왜? 라고 물을 사이도 없이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이마를 쓸어올렸다. 그 손길에 맞춰 무심코 고개를 위로 들려던 순간, 무언가 따뜻한 것이 조용히 피부 위에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이후 낮은 목소리가 무언가의 구절을 읊는 동안, 지휘사는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 어슴푸레한 불빛이 비치는 복도는 날이 밝아오기 직전의 한 순간을 그대로 굳혀놓은 듯 했다.

 

이윽고 세츠가 몸을 떼어냈다.

 

"가벼운 축복이야. 계속 잠을 설치거나 중간에 깨면 곤란하니까."

"……아, 응. 고마워…."

"별 말씀을. 그럼 잘 자."

 

지휘사는 어물어물 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아버린 자신을 깨달은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지휘사는 처음엔 자기 뺨을 감쌌다가, 입가에 손을 모았다가, 이내 손을 깍지끼곤 그대로 몸을 웅크렸다.

 

방 안에는 초침 소리도 나지 않는다.

달빛만이 여전히 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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