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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영원한 7일의 도시

[세츠<여휘]환상통

눈을 떴을 때에는 안과 앙투와네트가 지켜보는 침대 위였다. 아아, 또 돌아왔구나. 그녀는 빠르게 알아차리고 체념했다. 또 이전과 같은 루프가 시작되려는 것이다. 누구도 구할 수 없고, 무엇도 해결할 수 없는 무력한 시간들이. 앙투와네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첫날의 설명을 반복한다. 그녀는 그 설명을 들으며, 복부에서 올라오는 타는 듯한 통증을 조용히 참았다. 

설명을 끝낸 앙투와네트가 물었다.

"달리 또 알고싶은 것이 있나요?"

그녀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이윽고 앙투와네트가 떠났다. 그녀는 자리에 남은 안이 자신을 두고 휴게실 바깥으로 나간 사이 약품이 담긴 찬장을 열고 진통제를 품 속에 숨겼다. 위치는 이전 회차에서 대강 알아두었기 때문에 헤맬 일은 없었다. 왜 이리 늦어요? 안이 다시금 안쪽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녀는 구겨진 신발을 고쳐 신는 척을 하며 웃었다. 미안해. 신발이 잘 안들어가서.

그리고 익숙한 일들이 흘러갔다.
그녀는 아무도 보지 않는 사이 진통제를 씹어삼키며 지난한 시간을 견뎠다.

복부의 통증은 가끔 진통제의 약효를 능가했다. 그녀는 그때마다 자신의 방이나 아무도 찾지 못할 골목 구석에 몸을 숨겼다. 솟아나는 식은땀, 두근거리는 심장, 인두로 지져대는 듯한 아픔은 그녀를 찾아오는 단골손님이었다. 부서진 건물 파편에 복부를 찔려죽은 이후로 쭉.

처음에는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기절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중앙청의 기술을 총동원해 정밀검사를 받아도 원인은 찾아낼 수 없었다. 정신적으로 받은 충격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세워졌을 때, 그녀는 이전 회차에서 자신의 복부를 뭉갰던 건물 파편을 떠올렸다.

누구도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딱 한 명을 제외하고는.


*

"어라, 의외의 손님이네. 여기는 누구도 모르는 장소라고 생각했는데."

세츠는 장난스레 말하며 웃었다. 그녀는 몸을 웅크린 채 고개만 돌려, 은거지에 등장한 불량신관을 쳐다보았다. 그녀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고양이들이 그의 등장에 일제히 울음소리를 높이며 다가갔다. 세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고양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긴 제복자락이 펄럭거렸다.

"어디 안 좋아?"

"...조금."

"진통제 줄까? 마침 가지고 있는게 있거든."

"아까 먹었어."

"그럼 좀 누울래? 무릎배게는 받는 쪽이 취향이지만, 지금같은 상황이라면 특별히 양보해줄 수도 있-"

 

그녀는 세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얼결에 허벅지를 내주게 된 세츠가 이상한 소리를 냈지만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벤치에 앞발을 걸친 삼색 고양이가 그녀의 얼굴을 보곤 긴 울음소리를 냈다. 그녀의 이마에 조심조심 세츠의 손등이 닿았다가 떨어져나갔다.

 

"우왓, 이마가 식은땀투성이잖아. 괜찮아?"

"안 괜찮아."

"...구급차를 부를까?"

"필요없어. 그냥 좀 쉬면 나아질거야."

 

그녀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머리 위에 부드러운 뭔가가 닿은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분명 세츠가 늘 가지고 다니는 손수건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녀는 이마에 닿은 것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확신했다. 

 

"너무 힘들면 좀 쉬고 그래. 혹사하다 쓰러지면 몸만 상하잖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언젠가 그가 해준 말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내용임을 되새겼을 뿐이다. 

 

"세츠."

"응."

"미안해."

"뭘 이 정도로."

 

대화는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욱씬거리는 통증을 참으며 눈을 감았다.

 

*

 

아파.

아파.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죽고 싶지 않아.

죽는 건 무서워.

 

살려줘. 도와줘.

 

아무라도 좋으니까.

누구라도 좋으니까.

 

나를….

 

그녀는 퍼뜩 눈을 떴다. 주변은 노을빛이 깔려 있었다. 대체 얼마나 잠들어있었던 것일까? 

 

"이제 일어났나보네."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이 세츠의 무릎을 배고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던걸 생각해냈다.

 

"몸은 좀 괜찮아졌어?"

"...응."

"다행이네. 그럼 돌아가볼까? 여기는 숨어있기에는 좋지만 저녁이 되면 쌀쌀해."

 

그 말에 따라 몸을 일으키면 어깨에서 무언가 스르륵 떨어진다. 무엇인가 싶어 돌아보니 그곳에는 세츠가 매일같이 어깨에 걸치고 다니는 신관복이 흘러내려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바라보고있는 사이, 세츠가 아무렇지 않게 그 옷을 거둬들여 제 어깨에 걸쳤다.

 

"안화에게는 내가 설명해뒀어. 다음부턴 몸이 아픈데도 무리해서 움직이면 안된다?"

 

그럴게.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세츠."

"응?"

"내가 자면서 이상한 소릴 하진 않았어?"

"아하하, 뒤척이지도 않고 푹 자던걸."

 

세츠는 웃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듣지 못한 눈치였다.

 

*

 

언젠가의 일이지만, 그녀는 세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나는 사실은 시간을 되감아 루프하고 있다.

그때마다 소중한 사람들을 자꾸만 잃게 된다. 

그때 입었던 상처의 통증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프다. 괴롭다. 무섭다. 이제 이런 건 싫다.

 

더 이상 이런 일들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울음 섞인 고백을, 세츠는 웃어넘기지 않고 전부 들어주었다.

자신이 그녀를 도와주겠다고 말해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세츠는 죽어버렸다.

건진 것은 그녀의 목숨뿐이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밝히지 않겠노라 결심했다.

무슨 일이 생기든 자신이 어떻게든 해결하겠노라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한 가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건 비참한 기억들 사이에서 홀로 반짝반짝 빛나는 추억이었다. 

복부가 찢기는 통증이 엄습해와도 양보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이제 끝났다.

자신을 방문 앞까지 데려다준 세츠가 돌아가는 모습을 창 밖으로 지켜보며, 그녀는 진통제를 두 알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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