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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창작/혐오스런 스팬담의 일생

[혐스일/카쿠→장관]파반느, 연주되는 동안에.


고풍스런 무도회장이었다. 반지르르하게 닦인 나무바닥에 천장을 장식한 샹들리에, 일정한 간격으로 벽을 지탱하고 서있는 기둥들까지. 다만 창문마다 드리워진 금술 달린 보라색 커텐 때문에 바깥이 보이지 않는게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그것도 저편에 서있는 사람을 보면 이유를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튼 뭔가에 자기 모습이 비춰지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지 않았는가. 만약 여기 좀 더 세심한 사람이 있었다면, 윤기가 흐르는 바닥에도 빈틈없이 카펫을 깔려고 했겠지. 카쿠는 그렇게 하는 대신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또렷한 구두소리가 이어졌다.

"장관. 여기서 다 보는구만."
"카쿠."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기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변성기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난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다. 

"한 곡 추겠는감? 아니지, 장관은 너무 연약하니 춤을 추다 미끄러져 넘어져 어딘가 부러지려나?" 
"너스레 떨기는. 내가 그 정도로 허약하지는 않거든."

장난스레 내민 손 위에 장갑을 낀 손이 올라온다. 그 순간부터 어디선가 느린 템포의 곡이 흘러나왔다. 이 음색에 이 박자라면, 파반느다. 춤에 그리 능숙하다고는 할 수 없을 장관이 상대라면 스텝의 속도는 느긋하게 잡는 편이 좋겠지. 카쿠는 상대의 손을 잡아 무도회장의 중앙으로 이끌곤, 가볍게 웃었다.

"그럼 시작하겠네. 모르겠으면 그냥 내가 가는대로 따라오면 되는구만."  
"오냐."

해볼테면 해보라는 식의 대답과 달리 상대의 움직임은 꽤나 뻣뻣했다. 그러고보면 장관은 사교 댄스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있었을까? 장관 집안의 태생이니 어렸을 때 배웠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 없건만, 자신을 따라오는 스텝은 완벽한 초짜였다. 어쩌면 약한 체력이 춤조차 배울 수 없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카쿠는 좀 더 스텝을 느릿하게 바꿨다. 그걸로 얼추 동작을 따라올 수 있게된 장관이 설핏 미간을 찌푸리는게 보였다.

"뭔가 느려진 것 같은데."
"원래 이런 춤이구만."

그러냐. 장관은 더 캐묻지 않았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렇게 납득한 모습이었다. 카쿠는 맞잡은 손에 조금 힘을 실었다가, 이내 상대가 누구인지를 생각해내곤 다시 힘을 뺐다. 안 그래도 금 간 유리마냥 언제 깨질 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무도회장을 몇 바퀴 돌았다.
장관은 조금 스텝에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그런데 말이여, 장관."
"왜."
"나한테 뭐 할말 없는감?"
"키 컸네."
"그거 말고는?"
"좀 늙었네."
"그뿐인가?"
"무슨 말이 듣고 싶은데."
"매정하구만. 이런 때에 듣고싶은 말 정도는 해줘도 되지 않나?"
"그건 네가 듣고싶은 말이 정해져 있을 때의 얘기지."

파반느는 이어진다. 카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웃었다.

"진짜 장관 같구만."
"산통 깨는 소리."

장관은 툭 내뱉을 뿐 그 이상의 부정은 하지 않았다. 카쿠도 도중에 상대의 손을 뿌리치고 등을 돌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늘릴대로 늘려진 스텝대로 움직이는 구두소리만이 음악 사이사이에 박혀들었다. 연주악단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음색만이 아름다웠다.

"결국 이건 뭔감?"
"주마등의 마지막 서비스."
"서비스 치고는 좀 부실한 것 같은데."
"네 믿음이 너무 공고한 거야."

아니었으면 벌써 원하는 말 들었을테고 음악은 끝났겠지. 장관의 모습을 한 상대가 덤덤히 말했다. 카쿠는 어쩐지 납득이 가고 말았다.

"아무튼, 나는 죽은 거제?"
"어."
"장관도 죽었고."
"훨씬 전에."

스텝은 가까워졌다가도 다시 멀어진다. 마주잡은 손은 장갑 때문에 온기를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기왕이면 장관 본인이 와주길 바랬구만."
"많이 좋아했나보지?"

카쿠는 침묵했다.

"그런 사람의 모습으로 오게 되있는 구조야. 뺄 것 없어."
"그럼 왜 하필 무도장인감."
"나도 모르지."

마지막으로 춤이라도 춰보고 싶었던 것 아냐?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 장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르려다, 가라앉았다. 

"하긴 장관이라면 춤 이전에 이런 자리를 질색팔색했을 것이여."
"그래서 내가 대신 와줬지. 고맙게 생각하라고."
"듣고싶은 말도 안 해주믄서 무슨."
"그러니까 그건 네 문제라니까."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해줄까? 상대가 뱉은 말에 카쿠는 그만 웃고 말았다. 웃느라 안그래도 느린 스텝이 엉키고 말았다. 아, 이거 좀 창피한데. 장관이 봤더라면 저 보라고 웃으며 손가락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쪽이 춤추고 있는게 자기의 얼굴을 한 저승사자라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아니면, 딱히 아무 반응도 안 할까.

속을 읽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상냥하면서도 동시에 더 할 나위 없이 냉정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 모습을 떠올리노라면 속에서 알 수 없는 것이 꿈틀거렸다. 처음에는 분노와 배신감이라 생각했던 그것이 다른 이름을 가진 감정이었음을 깨달은건, 우습게도 그 감정에 답해줄 사람이 사람의 의미를 잃어버렸을 때였다. 

그리고 일련의 계획이 있었고… 실패했다.
남은 것은 비탄과 영원한 침묵 뿐이었다.

"…하나 물어봐도 되나."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그 사람, 죽을 때 누군가를 보긴 했나?"

상대는 가만히 카쿠를 바라보다, 짧게 끄덕였다.

그렇구만.

카쿠는 굳이 그 상대를 묻지 않은 채 스텝을 밟았다. 느린 스텝이라고는 해도 꽤 오랫동안 춤추었을텐데 상대는 달리 지친 기색도 없었다. 만약에 진짜 장관이 상대였다면 지금쯤 장관의 두 발을 구두 위에 올리고 춤을 추고 있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카쿠는 그 장면을 상상해보다, 그만두었다. 상상 속 장관의 손이 맨손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스텝이 멈췄다.

"…그만 가제. 어차피 내가 장관에게 들을 수 있는 말은 없을테니까."
"당신이 이쪽에게 하고픈 말은 없고?"
"당신은 그 사람도 아니잖어."

장관의 모습을 한 사자는 그렇다면야, 하곤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카쿠는 희미하게 웃었다.

"만약에 진짜 장관이었다면."

음악도 끝났다.

"사랑고백쯤은 해봤을텐데 말이여."

저 멀리, 하나뿐이던 출구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