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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언라이트

[그룬왈드 생축 소설]수확의 달 25일, 새벽.

 

처음 그 꿈을 꾼 것은 아마 작년 이맘때였다고 기억한다.

 

꿈 속의 나는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는데다 설상가상으로 피까지 흘리고 있다. 주변은 온통 어두침침하지만 누가 나를 쫓아오는 소리만은 선명하게 들린다. 이따금 나는 손에 든 검을 휘둘러 나를 잡아채거나 붙잡으려 드는 누군가의 손을 베어낸다. 그때마다 이명이 심하게 울려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앉아서 쉴 장소는 보이지 않고,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어두운 복도 -그래, 그곳은 어느 성의 복도다.- 를 끝없이 나아가다 마침내 쓰러져, 수많은 손이 내 몸을 어둠 속으로 질질 끌고 가는 동안 낮고 차분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순간 만큼은 목소리를 제외한 모든 것이 의미 없고 무가치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꿈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내가 무슨 내용을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귓가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조이던 목소리였건만.

 

그런 꿈을 몇 번이고 꿨다. 나중에는 꿈을 꾸면서도 '아, 또 그 꿈이구나'하고 막연히 떠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무렵부터 꿈에 대한 내용을 조금씩 기록하기 시작했다. 어둡고 답답한 복도, 쨍쨍 울리는 고함소리, 흐릿한 불빛과 나를 잡아채는 손, 내 손에 들린 검, 끝나지 않는 복도와 내가 뱉는 거친 숨소리, 그리고….

 

“      .”

 

아아, 역시 마지막이 기억나지 않는다.

 

친구의 친구가 꾼 꿈이라고 속여 동생에게 이야기해준 적도 있다. 나보다 한참 어리지만 어떤 면에선 묘하게 어른스런 구석을 믿고 이야기 해본 것인데, 동생은 그게 어쩌면 그 사람의 전생의 기억일지도 모른다며, 그 단어를 떠올린 순간 잊고 있던 전생의 기억이 되살아날지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전생이라.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평범하게 친구를 사귀다 보면 한 번쯤은 듣는 개념이지만 이제껏 크게 관심을 가진 적은 없다. 기껏해야 같은 반의 누가 가져온 잡지에 실린 전생 테스트를 호기심에 몇 번 해본 정도다(거기에 따르면 나는 어느 나라의 기사였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흘려들었건만, 시간이 지날수록 동생이 남긴 말이 자꾸만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그까짓 꿈이 뭐라고, 하고 무시하려 해봐도 그 꿈에서 깨어났을 때 느껴지는 상실감과 무력감이 자꾸만 내 의식을 그쪽으로 끌어당겼던 것이다. 하지만 만약 동생의 말대로 그 꿈이 지금 이 삶 이전의 내가 존재했었다는 증거라면, 과연 그걸 기억해내는 것이 옳은 일일까?

 

시험 삼아 같은 원예부원들에게 물어보니 기억해내고 싶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재미있을 것 같다거나, 전생의 자신이 궁금하다는 이유였다. 전생의 연인을 만나보고 싶다는 다소 불순한 동기도 있었다. 연인이라. 하지만 내 꿈은 재미나 호기심, 하물며 연정과는 터무니없이 거리가 멀다. 나는 쫓기고 또 쫓기다 쓰러져 끌려간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목소리를 들으며 끌려간다. 그런 전생을 기억해봤자 오히려 악몽이 되어 나를 짓누르는 것은 아닐지 생각하고 있노라면 가슴 속이 묘하게 술렁거렸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난 여전히 그 목소리의 정체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

 

우리 동네 한 켠에는 공사를 한답시고 철벽을 둘러놓은 넓은 부지가 있다. 거기에 무엇을 세우려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오랜 기간 그렇게 철벽만 둘러놓고 있던 탓에 안쪽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풀과 억새가 무성하게 피어 도심 속 들판을 형성하고 있었다. 적당한 그림자 하나 없는 탓에 낮에는 가기 힘들지만 대신 해가 저문 뒤에 가면 나름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퍽 마음에 드는 장소다. 나는 꿈 때문에 싱숭생숭해진 기분을 가라앉히려 부지 내부에 멋대로 쌓여있는 공사용 자제 한 켠에 걸터앉아있었다. 근처에 버스정류장이 있어 입구를 기웃대는 사람은 있지만, 나처럼 안에까지 들어오는 사람은 흔치 않다. 이따금 근처를 순찰하던 경찰이 여기 혼자 있는 나를 수상히 여겨 말을 거는 정도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어떤 남자가 풀잎 바스락대는 공사장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나이는 중학생인 나보다 조금 많은 정도일까.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는 타인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터무니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모든 감각과 신경이 분주하게 술렁이고, 이 세상 전체가 오래 전부터 그 남자를 중심으로 돌아갔었어야 했다는 생각에 현기증마저 일었다. 몸을 돌린 남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에는 이대로 심장이 터져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물론 내 착각이었고, 정신을 차렸을 무렵 남자는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았다.

 

나는 멍한 머리로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가 서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바슬바슬한 모래가 깔린 자리에 희미하게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차마 밟을 수 없어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들뜬 감정의 사금파리 사이로 가느다란 속삭임이 느껴졌다.

 

‘저 사람이다.’

 

하지만 뭐가?

 

대답을 알게 된 것은 몇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

 

빌헬름은 왕비를 죽였다. 호위병을 몇 명이고 죽이고 가장 은밀한 침소까지 파고든 그를 본 왕비가 채 비명을 다 내지르기도 전에 폐부 깊숙한 곳을 찔러 양쪽 허파를 찢어놓은 것이다. 단숨에 목을 쳐 죽여 버린다면 편했겠지만, 그녀는 자신이 한 행위에 따른 댓가를 받아야 했다.

 

그녀는 제 몸으로 낳은 아들을 제 손으로 찔러 죽였다. 침대를 붉게 적시며 숨이 끊어지는 아들을 등지고 방을 나온 왕비는 그 날이 셋째 왕자의 탄신일이었음을 알고 있었을까? 어릴 적부터 단 한 번도 다독여준 적 없는 몸을 엉망으로 난도질한 바로 그 손을 치켜들며 모정 이전에 국법에 따라 반역자를 재판했다고 외치는 왕비를 향해 군중들은 론즈브라우 여왕 만세의 구호를 외쳤다. 빌헬름은 외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여왕이 될 자격이 없었다.

 

 

그는 불사의 몸이다. 거기다 남들에게는 말하기 어려운 욕망을 지닌 주군을 모셨던 덕분에 어떤 방식의 죽음이 고통스러운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평생을 왕성에서 부족함 없이 살아온 여인에게는 산 채로 숨이 막혀 죽어가는 것처럼 끔찍한 죽음도 없으리라. 빌헬름은 그녀가 폐에 남은 마지막 공기 한 줌이 빠져나가고도 한참동안 헐떡이며 발광하다 죽을 것을 알았기에 침실의 문턱을 넘은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왕비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하나뿐인 주군에 대해서 생각했다. 갓난아기 무렵부터 세상에서 유리되어 죽음에 홀린 듯 살아가다 저 더러운 가신들의 음모에 휘말려 전쟁터에 내몰리고 끝내는 혈육에게 살해당한 자신의 주군. 지금이라도 당장 그 시체의 발치에 엎드려 마지막 예를 차리고 질긴 목숨을 끊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전하가 계신 곳은 너무나 멀다. 전하의 영혼도 육신도, 모두 빌헬름에게서 까마득히 떨어진 곳으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잠깐 느려진 발이 기사들에게 밟히고 짓눌려 부러진다. 제 몸의 뼈가 조각나고 살이 찢기는 소리를 듣던 빌헬름은 붉은 카펫에 제 핏자국을 남기며 끌려가던 순간 언뜻 제 주군의 목소리를 들었다. (수고했다, 소령.) 어쩌면 환청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빌헬름은 더할 나위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이제 그만 죽어도 좋다.)

 

그래서 빌헬름은 그 자리에서 생을 버렸다.

 

론즈브라우의 마지막 왕족 마루라 왕비를 죽인 범인을 끌고 가던 기사들은 범인의 살점이 썩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썩은 살은 부글거리며 사라졌고 하얀 뼈조차 가루가 되어 한 줌 먼지가 되었다. 멍청한 얼굴로 서있는 그들 사이로 먼지투성이 바람 한 줄기가 빠져나간다.

 

=

 

눈을 떴을 때는 새벽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가, 목이 말라서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생각만큼 마르지는 않다는 생각에 도로 침대 가에 앉기를 반복하다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전하.”

 

한 웅큼의 단어가 혀끝에 맺히자마자 심장에 고여 있는 피가 뜨거워진다. 내가 모르는 무의식 어딘가에서 환희에 찬 부르짖음이 들린 것도 같았다. 나는 손을 꽉 모아 쥐고 쉼없이 몸을 떨었다. 어째서 이토록 소중한 것을 잊고 있었을까. 어째서 기억해내야 하는지 망설이고 있었던 걸까. 그분이야말로 내 영혼의 일부이자 삶의 의미였던 것을.

 

심장이 조여온다. 나는 무턱대고 옷을 껴입은 채 단단히 잠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섰다. 하지만 공사장에 전하는 계시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어쩌면 전하는 나를 잊었거나, 기억하고 있더라도 별 대수롭잖게 여기고 계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전하를 책망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환한 보름달이 떴는데도 새벽 바람은 스산하다. 나는 오랫동안 그곳에 꼼짝 앉고 앉아있었다.

 

차가운 정적으로 가득한, 전하가 좋아하실 법한 밤이다. 하지만 지금도 전하가 이런 밤을 좋아하실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전하는 이전까지의 나와 같이 전생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그냥 잊어버린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하를 다시 떠올린 이상 다시 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전하를 만나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새벽에 어울리지 않는 열기를 가지고 맹렬히 돌아가던 머리는 누군가의 발소리를 뒤늦게 깨달았다. 근처를 지나가던 경찰이나 부지를 살피러 온 공사 관계자일까? 운이 나쁘면 적당한 먹잇감을 찾고있는 불량배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운이 좋다면.

 

“전하?”

 

언젠가의 기억과 꼭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이가 말없이 이쪽을 응시한다. 하지만 그 입술에서 내 이름이 불리는 일은 없었다. 잊으신 것일까. 아니면 알고도 부르지 않는 것일까. 초조해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하에게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발밑에서 요란하게 밟히는 모래는 언젠가 함께 했던 벌건 전장을 떠올리게 했다. 주군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멈춰서, 이제는 희미한 신하의 예를 갖춘다. 동작이 서툴러 몸이 휘청거렸지만 가까스로 넘어지지는 않고 무릎을 꿇을 수 있었다.

 

“빌헬름 쿠르트가, 그룬왈드 론즈브라우 전하를 뵙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오히려 나의 목소리를, 존재를 약간 밀어내는 듯한 거부감이 느껴졌다. 기억하지 못하고 계신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자리에서 물러날 수는 없다. 전생과 현재를 넘어 전하와 나를 잇는 무언가가 없을까?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전하께서는 저에게 죽음을 허하셨지요. 아니, 어쩌면 그것은 제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전하를 지켜드리지 못했으니까요.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전하를 죽인 이를 제 손으로 처벌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저는 그녀를 죽이고 난 뒤,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났습니다. 전하께서는 이 모든 일을 기억하고 계신가요?”

 

밤은 대답하지 않는다. 조롱도 웃음도 비판도 수용도 없다. 모든 것은 실패로 끝난 것이다. 나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뱉고 싶지 않은 말을 한 땀 한 땀 토해냈다.

 

“죄송합니다. 잊어주세요.”

 

빌헬름의 언어를 버리고 현재의 언어를 머금은 채 떠나가려는 등 뒤에서 문득 나뭇잎이 속살거렸다. 바람에 뭉쳐 흔들리며 자아내는 조그마한 환성.

 

“소령, 나는 아직 물러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차마 똑바로 응시할 수 없는 붉은 눈이 아름다워 심장이 뛰었다.

 

“전, 하?”

“오랫만이군, 쿠르트 소령.”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방금.”

 

감격에 차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전하에게로 다가간다. 전하의 낮은 목소리가 심장을 뒤흔들어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전하가, 나를 기억하고 계신다. 기억해 내주신 것이다. 설사 신을 만나 천상의 행복을 선사받는다 한들 이만한 기쁨을 느낄 순 없으리라.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기를 반복하며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당연히 아무 소용도 없었다.

 

“전하께서 저를 잊으셨을까 염려했습니다.”

“그런 것 같더군.”

“하지만 방금 기억해내셨다면, 어쩨서 이 자리에….”

“잠깐 도망친 것 뿐이다. 본가는 내 생일이다 뭐다해서, 밤새도록 시끄러워.”

“생일…이셨나요.”

“그래.”

 

목소리에는 아무 감흥도 없다. 본래 그런 분이셨다. 다시 태어나신 지금도 부유함 만큼이나 부패한 집안에서 살아가고 계신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전하.”

“뭐지?”

“이번 생에도 제가 전하를 따르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게 소령이 나에게 주는 선물인가?”

“아뇨. 전하의 목숨을 지키지 못했던 죄인이 주제넘게도 다시 한 번 전하와 함께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자기 중심적이로군, 소령.”

 

눈 앞에 내밀어진 손은 그 옛날과 똑같이 하얗다. 붙잡으면 느껴지는 온기에 마음이 일렁이는 것을 느끼며, 나는 다시 한 번 주군의 손에 입맞추었다. 심장에서 새로 솟은 피 덕분에 온몸이 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