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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언라이트

[베른그룬]크리스마스 전야

사소한 추억이 있다. 손아귀나 주머니에도 넣어놓지 않고 흘려보낸, 크리스마스 전야의 추억. 

닿자마자 피부가 새카맣게 얼어붙을 정도로 싸늘한 비가 내리는 세계였다. 사위가 어두워 제 발밑을 확인하느라 잠깐 방심하기라도 하면 목이나 팔이 뎅겅뎅겅 잘려나갔다. 베른하드는 바늘처럼 첨예하게 신경을 곤두세운 채 코어의 위치를 추적했지만 회수에 성공했을 무렵엔 따라오던 대원의 수가 반절 가까이 줄어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코어를 찾아가는 길 이상으로 위험했고… 베른하드의 뒤를 따르고 있던 그룬왈드 또한 순간의 사고로 허벅지를 길게 베여 제대로 걷지 못했다. 이동이 불가능한 그룬왈드의 옷깃에 매달린 누군가의 손목을 발견한 것은 빗물에 식어가는 몸을 짊어지고 가까스로 귀환했을 무렵이었다. 주인은, 보나마나 죽었을 것이다. 베른하드가 손목을 처치하고 흰 천으로 감는 동안 그룬왈드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두려운가?"
"아뇨."
"그렇다면 호기심인가?"
"아닙니다."
"그럼 뭐지?"
"남은 몸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살아남은 대원은 적다. 상처를 입지 않은 대원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나마 이렇게 콜뱃에 실려 귀환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낙오되어버린 대원들은 이제 생전 처음 맞는 검은 빗줄기 속에서 잘게 잘게 죽어가겠지. 그룬왈드가 그런 낙오병의 최후를 쓰게 되새김질할 인품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베른하드는 잠자코 그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대부분이 탈진한 콜뱃은 조용했다.

"무력하게 죽었겠죠. 어둠에 갇혀, 아무 것도 모르고."
"부러운가? 아니면, 두려운 쪽인가?"
"싫습니다."
"……."
"저는…."

콜뱃이 흔들렸다. 그들이 소용돌이를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는 증거였다. 그룬왈드는 입을 다물었고 베른하드는 천에 싸인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날 이후 베른하드나 그룬왈드가 그 일을 화제거리로 삼는 일은 없었다. 쌓인 눈이 녹아내리듯 기억도 녹았다. 둘 중 누구도 그걸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흘끗 돌아본 창턱엔 눈이 쌓여있었다. 병실은 조용했다. 베른하드는 짙은 약냄새를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침대에 누운 그룬왈드는 그가 온 것을 눈치채지도 못한 기색이었다. 하기사 소용돌이의 생물이 남긴 독이 착실히 그의 목숨을 갉아먹어가는데 눈을 뜰 여력이나 있을까. 미미하게 흔들리는 초록 그래프도 언제 잠들지 모른다. 적어도 그 전에 해치워야했다.

무엇을?

품에는 짧은 단검이 있었다. 하지만 왠지 내키지 않는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베른하드는 자신의 양손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람의 목을 조를 수 있을까 상상했다. 물론 상상이다. 실제로는 잘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베른하드는 일부러 단검을 가져왔다. 내키지는 않았는다고 생각하면서, 작고 날카로운 단검을 품 속에 숨기고 이곳에 왔다.

차갑고 텁텁한 공기를 마시고, 내쉰다. 그룬왈드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는다. 기계음은 무미건조하다. 이대로 그룬왈드가 죽어버린다 한들 특별할 것은 없다. 그저, 다른 이들과는 달리 묘비 아래에 유해가 묻힌다는 사실만이 다를 뿐이다. 베른하드도 잘 알고 있다. 지금까지 몇 십, 몇 백이나 되는 대원과 부대장들이 그런 식으로 사라지지 않았던가. 이제와서 그룬왈드만 특별하게 취급할 이유 따윈.

저는.
만약 죽는다면, 당신의 손에 죽고싶습니다.
당신과 함께 죽고싶습니다.

발밑이 흔들린 것 같았다. 착각이다. 
빗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착각이다.
그룬왈드가 이쪽을 응시했다. 착각이….

아니야.

베른하드는 마른 침을 삼켰다. 호흡기를 끼고 있던 그룬왈드의 눈이 가늘어지나 싶더니 월식을 맞이한 달처럼 닫혔다. 닫혀버렸다. 베른하드는 여느 때와 달리 두근거리는 제 심장을 그러쥐었다. 목덜미는 하얗고 가늘다. 거기에 차가운 날을 들이대면 금새 붉은 피가 흘러나오겠지. 무엇보다 선명한 삶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방을 채우고 그를 더럽힐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죽을까.
함께 죽을까, 그룬왈드.

어이없는 생각이다. 하지만 베른은 이미 자신이 미쳐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건 정확히 언제부터였을까. 그룬왈드가 무력하게 짓씹히는 모습을 봤을 때부터였나? 아니면 그 눈동자 안의 감정을 제 침묵으로 묵살시켰을 때부터? 하긴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얻지 못할 인생이다. 끝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이다.


베른하드는 천천히 그룬왈드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넘어선 녹색 선이 조용히 침묵했다.